
생성형 인공지능(AI) 챗지피티에 ‘버거킹 매장에서 분주하게 일하는 동료들 사이로 평온한 모습으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모습을 연필 스케치로 그려달라’는 지시어를 입력해 만든 일러스트.
몇 년 전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버거킹에서 신비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주문이 밀려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상황. 카운터 뒤편의 정신없는 분위기가 보는 사람까지 경직시켰습니다.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 사이에서 혼자 5배속으로 움직이는 한 여드름쟁이 아르바이트생이었습니다. 단지 손놀림이 빨라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쟁 같은 주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혼자 평온한 표정으로 ‘착착’ 소리를 내는 듯한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몸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가끔 소리를 치기도 하는 다른 알바들과는 달랐습니다. 그 모습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혼자 잔잔하게 물살을 가르는 배처럼 보였습니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인간에게 ‘일솜씨 본능’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의 솜씨를 보면 누구나 쾌감을 느낍니다. 알바의 일솜씨를 넋 놓고 감상하던 저는 주문한 음식이 나온 것도 몰랐습니다. 그날 본 풍경에 관한 가장 적절한 인상을, 우아함이라 하겠습니다.
우아한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나를 편안한 세계로 데려가는 것 같습니다. ‘우아함의 기술’(노상미 옮김, 뮤진트리 펴냄)의 저자 사라 카우프먼은 이런 현상을 ‘몸이 몸에 말을 건다’고 표현합니다. ‘우아함의 기술’은 우아함의 본질을 탐구하는 책입니다. 30년 동안 무용 비평가로 활동하며 인간의 우아함을 관찰해온 저자는 우아함이 등장하면 차갑고 위태로운 우리의 세상이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뀐다고 말합니다.
우아함이란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우아함은 설명하기 막막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 우아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책은 케리 그랜트, 오드리 헵번 같은 할리우드 스타부터 비욘세, 마이클 잭슨 같은 팝스타와 넬슨 만델라 같은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우아함에 관해 논합니다. 이들은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아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이 있는 공간을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카우프먼은 우리가 우아함이 실종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21세기의 삶은 너무 급하고 서투르고 불만스럽습니다. 카우프먼은 이런 무례한 시대의 해독제로 우아함을 내놓습니다. 옛날부터 우아한 사람들이 환대받았던 이유는 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에 적합했기 때문일 겁니다. 우아한 사람은 세상에 편안하게 존재합니다. 스스로 편안하게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주변을 좀더 편안하게 만듭니다. 누군가 발이 걸려 넘어지면 지켜보는 사람들은 긴장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착하게 일어나면 모두가 긴장을 풀 수 있습니다. 우아함이 세상을 편안하게 만든다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우아함의 기술’, 사라 카우프먼 지음, 노상미 옮김, 뮤진트리 펴냄, 2017년.
소개된 운동선수 중에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가 있습니다. 테니스를 잘 모르는 저는 페더러의 경기 영상을 찾아봤습니다. 여러 경기를 감상하고 난 뒤 이 선수의 움직임이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이나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의 움직임과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선수들의 특징은 투쟁심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페더러의 경기에서는 공을 쫓아가다 중간에 포기하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공을 잡을 수 있는지 없는지 미리 판단하고 잡을 수 없을 것 같으면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력을 다해 분투하는 모습에서는 투쟁심이 느껴지지만, 분투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 선수에게는 경이감이 느껴집니다.
페더러가 움직이는 방식은 거의 서정적입니다. 물 흐르듯 연속적이고 율동적이어서 아무리 급격히 멈추고 잽싸게 발을 움직여도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우아함이 꼭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승자보다 우아한 선수를 더 오래 기억합니다.
운동선수들은 시합하기 전에 신경이 날카로운 경쟁자나 구경꾼들을 피합니다. 선수들이 시합 전에 눈을 감고 헤드폰을 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긴장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근육도 굳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편안한 사람을 보면 편안해지고 불편한 사람을 보면 불편해집니다. 이런 뛰어난 공감 능력 덕분에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공중곡예사와 함께 날아다니고 육상선수와 함께 트랙을 질주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아함은 몸과 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아한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고, 호흡이 느려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반대로 불안하고 경직된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들어갑니다. 카우프먼은 여기서 중요한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우아함이 전염될 수 있다면 우아함을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아함은 이론으로는 배울 수 없고 오로지 그것을 갖춘 사람들을 보면서 얻을 수 있다.”(체스터필드)
저자는 누구나 노력을 통해 우아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타고난 모방자인 우리는 우아함을 많이 볼수록 더 우아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타운의 품위 교육을 받고 비욘세가 된 것처럼, 수많은 공을 치며 우아한 동작을 연마한 페더러처럼 될 수 있다고요. 카우프먼의 철학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그런 척하라.’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가 포핸드 샷을 날리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의문이 듭니다. 아무리 연습한다고 해서 내가 비욘세처럼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노바크 조코비치는 페더러보다 덜 연습했기 때문에 덜 우아해진 걸까요?
피에르 부르디외는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카우프먼이 우아함의 개인적 가능성을 탐구한다면 부르디외는 우아함의 사회적 조건을 폭로합니다. 카우프먼은 ‘절대 성급해 보이지 않는 능력’을 우아함이라 말하지만 부르디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사람이 좀처럼 성급하지 않은 이유는 성급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배우 케리 그랜트는 카우프먼이 우아함의 표본으로 제시한 인물입니다. 문을 열어줄 때, 잔을 건넬 때, 계단을 오를 때 그의 몸은 군더더기 없이 움직입니다. 카우프먼에 따르면 이 매끄러움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무수한 반복이 남긴 흔적입니다. 부르디외라면 이 장면을 다르게 볼 것입니다. 그의 말투와 걸음걸이, 식사 방식, 취향, 자세, 웃는 방식까지 사회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그랜트의 ‘자연스러움’도 그냥 자연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부르디외는 이른바 ‘고상한 취향’이란 계급이 몸에 새겨놓은 흔적이라고 봅니다. 그는 이것을 ‘아비투스’(habitus)라고 불렀습니다.
부르디외가 특히 예리하게 지적하는 것은, 습득된 것이 마치 타고난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사회적 착시입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돈이 많기 때문에 생긴 여유, 말투, 취향, 몸짓, 자기 확신은 마치 타고난 품격처럼 보입니다.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서 획득한 습관이 그 사람의 본디 자질로 둔갑합니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후천적으로 습득된 우아함은 어딘가 과잉되거나 긴장돼 있어서 오히려 우아하지 못합니다. 애써 우아해지려는 태도 자체가 우아하지 않기에, 우아함은 노력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요즘 유행하는 “흙수저는 공격적일 수밖에 없다”는 순환논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케리 그랜트가 ‘흙수저’였다는 겁니다. 그랜트는 영국 브리스틀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우아한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의 우아함은 수많은 훈련 끝에 몸에 새겨진 기술이었습니다. 이는 카우프먼의 낙관적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우아함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누구나 훈련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이라고요. 카우프먼은 우아함이 어떻게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설득합니다. 부르디외는 그런 시도 자체가 하나의 은폐라고 볼 겁니다. 노력하면 누구나 될 수 있다는 말은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아하지 못한 것은 그 사람의 책임이 됩니다.
1528년 이탈리아의 외교관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는 어려운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듯한 우아함을 뜻하는 ‘스프레차투라’(sprezzatura)라는 말을 썼습니다. 애써 노력한 흔적을 감추고 마치 처음부터 쉬웠던 것처럼 행동하는 능력입니다. 버거킹 알바를 떠올립니다. 그의 우아함은 부르디외의 말처럼 계급의 표식도, 카우프먼의 말처럼 타인의 모방도 아니었습니다. 그 움직임은 반복된 동작이 몸에 새겨놓은 장인의 효율성에 가까웠습니다. 그는 ‘우아하라’는 요구를 받은 적도 없고 그런 척한 적도 없습니다. 관객 없는 곳에서 스스로 그 리듬에 도달했을 뿐입니다. 제가 그의 모습을 보고 “와, 저 사람 좀 보세요”라고 외쳤다면 그의 우아함은 순식간에 사라졌을지 모릅니다. 자신을 잊은 무아지경에서 나오는 우아함. 그것은 스프레차투라였습니다.
저자는 페더러 덕분에 모든 인간이 조금 더 좋아졌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날 버거킹 알바 덕분에 사람들이 조금 더 좋아졌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보여주려 하지 않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동안 저는 잠시 덜 조급해졌습니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자신이 머무는 자리의 공기를 조금 바꾸는 사람. 어쩌면 우아함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주식 팟캐스트 ‘발굴독서단’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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