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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상처가 된 밤, 서로 위로해요

분향소 옆 ‘마음안심 버스’·전화 1577-0199 등 마련돼 있어
등록 2022-11-06 17:21 수정 2022-12-07 06:57
서울 녹사평역 근처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옆에 차려진 심리지원상담소. 상담전화(1577-0199)를 통해서도 도움받을 수 있다.

서울 녹사평역 근처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옆에 차려진 심리지원상담소. 상담전화(1577-0199)를 통해서도 도움받을 수 있다.

2022년 11월1일, 서울 용산구 녹사평역 인근에 마련된 이태원 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 옆에 하얀 천막이 하나 더 세워졌다. 재난 심리지원 상담을 위해 서울시통합심리지원단이 마련한 장소다. 천막 뒤에는 국가적 재난이 일어났을 때 현장에 투입되는 국가트라우마센터의 이동형 상담버스인 ‘마음안심 버스’가 주차돼 있다.

분향소에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조문을 마친 이 중 한두 명이 이따금 이곳을 찾았다. 이미 눈이 빨갛게 충혈돼 있거나, 혼자 몸을 가누기 어려워 지인에게 몸을 기댄 이들이 한참 동안 천막 또는 버스 안에 앉아서 상담을 받았다.

망설이고 후회된다면

이날 30여 분간 상담을 마치고 나온 이석희(50·가명)씨는 대학 신입생인 아들 친구가 이번 참사로 숨졌다고 했다. 전날 장례식장에 간다고 나선 아들은 술을 많이 마시고 새벽 4시가 돼서야 들어왔다. 소식을 들은 뒤 부부도 덩달아 잠을 못 잤다. 아들의 슬픔을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도 막막했다. “아들이 발인에 가면 감정이 폭발할 텐데 아무래도 걱정이 많이 되죠.” 아들을 발인에 보내야 할지 망설였던 이씨는 상담 끝에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저희도 가서 문상하고, 아들이 발인날 가서 감정을 풀어낼 수 있도록 든든하게 지원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주점을 운영하는 이가영(31·가명)씨는 10월29일 밤, 참사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녹사평역 쪽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10년 가까이 간호사로 일했던 그는 자영업자로서 새 출발을 준비하던 터였다. 이날은 정식 개업에 앞서 임시로 가게를 열고 운영방법을 지인에게 배우던 중이었다. 손님들도 왔다. 가게를 방문한 친오빠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영상을 보여줘 참사 소식을 알게 됐다. 여럿이 심폐소생술(CPR)을 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이 30여 분 전 SNS에 올라와 있었다.

“(간호사 때) 응급실 근무 경험이 있어 당장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손님이 있고 함께 운영을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혼자만 달려나갈 수 없었어요.” 마음이 계속 무거웠다. 20여 분 뒤인 11시30분께 마지막 손님 자리가 정리되자마자 그는 영상 속에서 봤던 옷가게 이름을 지도에서 찾아 참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이 길에 누워 있었어요. 일반 시민들이 CPR를 하고 계셨죠. 내가 조금만 빨리 갔으면 한 명이라도 더 살았을 수 있는데, 하다못해 다른 시민들에게 CPR 하는 방법이라도 가르쳐줄 수 있었을 텐데 왜 빨리 안 나갔을까 계속 후회돼요.”

그 뒤로 며칠이 지났지만 이씨는 일상생활이 어렵다고 했다. 당시 현장의 소리가 계속 떠오르고 죄책감과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는 상담받고 나서야 “그래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향성이 좀 잡힌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이가 많다. 참사 현장의 생존자와 목격자, 구조에 참여한 경찰과 소방관, 희생자와 부상자의 가족·친구, 그리고 SNS와 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사건 현장을 지켜본 이들까지 모두 고통을 털어놓는다. “모든 사람이 즐기려고 갔던 곳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나 자칫하면 국민 모두가 마음의 상처를 가질 수 있는 상황”(김은지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아동청소년위원장)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일수록 함께 위로하고 연대하는 ‘사회적 지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 스쿨닥터였던 김은지 위원장은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위해서 노력하고 도움을 줬다는 점이 (참사) 이후 살아가는 데 굉장히 중요한 자원이 됐다’고 말한다”며 “충분히 서로를 위로, 지지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당일 현장에 있던 이들이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고 치료받을 수 있도록 “(이태원에) 왜 갔냐”며 탓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안전한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고 (이태원의) 그 길이 안전하지 않다고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다.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으면 한다.”

서로 지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중요

전진용 울산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외상후스트레스 증상으로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놀라거나 사람들의 비명이 떠오르는 등 당시 상황을 다시 경험하기도 한다. 사고 현장이 연상될 수 있는 밀집된 공간을 피하거나, 왜곡된 방향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하는 등 부정적 감정이 나타날 수 있다”며 “트라우마 이후에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금 당장 불안한 경우 호흡법 등 이완·안정화 요법을 시도해볼 수 있지만 근본적인 안정을 위해선 상담, 치료 등도 권한다”고 덧붙였다.

보건복지부는 이태원 참사 이후 유가족, 부상자·동행자, 목격자 등의 심리지원을 위해 국가트라우마센터 내 심리지원단을 설치했다. 심리적 도움이 필요할 경우 위기상담전화(1577-0199)를 이용하면 된다. 서울시는 225개 정신의료전문기관에서 전 시민을 대상으로 우울, 불안검사 등 특별심리지원 서비스를 한다. 자세한 내용은 25개 구 보건소에서 안내한다. 사단법인 한국심리학회도 전화 심리상담(1670-5724)과 농인·청각장애인을 위한 메타버스 무료 심리상담을 제공한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학생 피해자가 많은 점을 고려해 사상자가 있는 학교를 대상으로 심리치료와 정서 상담을 하고 학생을 위한 안전교육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글·사진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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