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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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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살해는 사회적 참사다

올해 112 신고된 스토킹 범죄 1만6571건 중 검찰 기소 1%, 실형은 24건뿐
신당역에는 비통, 분노, 허탈한 추모글 가득… 성찰위원회 꾸려 근본 원인 차단해야
등록 2022-09-24 14:23 수정 2022-12-09 01:52
2022년 9월20일 서울지하철 신당역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한 시민이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2022년 9월20일 서울지하철 신당역에 마련된 추모공간에서 한 시민이 스토킹 살인 사건 피해자를 추모하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스토킹을 당하던 여성이 또다시 살해됐다. 스물여덟 살 지하철 역무원 ㄱ씨는 3년간 스토킹에 시달리던 끝에 직장 동료한테 살해당했다. 안정적인 직장인 공기업에 다니던 그는 지인과 동료에게조차 그 사실을 털어놓지 못한 채 11개월 동안 혼자 외롭게 법정 싸움을 벌였다. 그러다가 자신의 일터(서울지하철 신당역) 화장실에서 숨졌다. 그를 살해한 피의자 전주환(31)은 직장 동료였다. 전주환은 스토킹으로 수사받는 사실이 알려진 뒤 직장에서 직위해제됐지만 회사 내부전산망에서 ㄱ씨의 집 주소와 근무시간 등을 확인했다. 순찰하던 ㄱ씨를 화장실 앞에서 1시간가량 기다리다가 흉기를 휘둘렀다. 2022년 9월14일 밤 9시, 스토킹 혐의 등으로 기소된 전주환에 대한 법원 선고를 불과 10여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나아질 수 있을까 싶은 절망감. 아픔, 불안 모두 잊고 편히 쉬세요. 미안합니다. 정말…’(시민1)

ㄱ씨가 숨진 뒤 일주일이 지난 9월21일 오후 2시. 서울지하철 신당역 화장실 앞 두어 평 남짓한 벽면을 메모지가 빽빽하게 뒤덮고 있었다. 추모객들이 직접 쓴 메모에는 비통함, 미안함, 분노, 허탈함이 가득했다. ‘여성이 행복한 서울 여행(女幸) 화장실’이라는 팻말 위에는 ‘거짓말’ ‘반어법’ ‘여성은 여자화장실에서도 안전할 수 없다’ 등등의 내용이 적힌 날 선 메모지들이 붙어 있었다. 평일 낮에도 추모객 발길이 이어졌다.

이날 전주환은 살인 혐의가 적용돼 경찰에서 검찰로 넘겨졌다. 전주환과 피해자 ㄱ씨는 2018년 12월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했다. 전주환은 곧바로 ㄱ씨에게 ‘만나달라’며 스토킹하기 시작했다. 300차례 넘게 전화와 문자를 보냈고, 몰래 촬영한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 고통과 공포 속에 살아가던 ㄱ씨는 2021년 10월 불법촬영과 협박 혐의로 전주환을 경찰에 1차 고소했다. 경찰은 전주환을 긴급체포해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이 기각했다. ‘주거가 일정하고 증거인멸 및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였다.

그 뒤에도 전주환은 “합의해달라” “만나자”며 스토킹을 계속했다. 2021년 10월21일 스토킹처벌법(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다. 석 달 뒤인 2022년 1월 ㄱ씨는 스토킹처벌법 위반 혐의로 전주환을 2차 고소했다. 이번엔 영장 청구조차 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경찰은 최근 연 브리핑에서 “2차 고소 사건의 내용이 1차 고소보다 많이 확장된 것은 아니었다. 직접적·물리적 위험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법원과 검찰, 경찰의 명백한 오판이었다. 스토킹 사건의 가장 중요한 ‘증거’인 피해자 본인이 폭력적으로 ‘인멸’됐다. 스토킹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주환은 8월18일 열린 공판에서 검찰이 징역 9년의 중형을 구형하자 범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전주환은 경찰 조사에서 “ㄱ씨가 고소해 중형을 구형받아 원망에 사무쳐 범행을 계획했다”고 진술했다고 전해진다.

전주환의 범행 계획은 치밀했다. 범행 뒤에 머리카락이 떨어질까봐 일회용 샤워캡 등을 9월5일 사들였고, 자신의 현재 위치를 조작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까지 휴대전화에 설치했다. 8월18일, 9월3일과 14일 지하철 증산역과 구산역 등의 역무실을 찾아가 서울교통공사 내부전산망으로 ㄱ씨의 집 주소와 근무시간을 확인했다. 2021년 10월 이미 직위해제된 상태였지만, 내부전산망 접속 권한은 그대로였다. 전주환은 2018년 음란물 유포 혐의로 기소돼 벌금형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서울교통공사 인사 검증을 무사히 통과해 입사했다. 이렇게 얻은 정보를 근거로 전주환은 범행 당일인 9월14일 두 차례나 ㄱ씨 집 주변을 살피기도 했다.

‘내 또래 여성이 이렇게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가야만 하나. (중략) 범죄자 인권 그만 챙겨라. 사법부가 가해다.’(시민2)

ㄱ씨의 죽음을 사전에 막을 수는 없었을까.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스토킹 피해 여성의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이기에 여러 번 기회를 날려버리고 가해자를 풀어줬다. 징역 9년을 구형할 정도로 사안을 심각하게 봤음에도 ㄱ씨에 대한 아무런 보호조치도 하지 않았다”며 “피해자 ㄱ씨에게 잘못이 있다면 대한민국 사법부와 수사기관을 믿었던 일이다. 피해자가 다치기 전에 보호하자는 게 스토킹처벌법의 취지인데 피해자가 죽고 나서야 구속하고 신상을 공개하고 난리를 친다. 이건 법의 완벽한 실패다”라고 말했다. 그는 “국가가 이번 살인에 협조한 셈”이라고 덧붙였다.

스토킹 범죄에 대한 검찰과 경찰의 처리 관행에도 문제가 있다. 한 현직 검사의 말이다. “사실 스토킹 사건은 피해자가 죽고 언론에 보도돼야 비로소 관심을 갖는 사건이다. 판사는 피해자의 공포나 재범 위험성을 봐야 하는데, 기록만 보고 불구속 재판이 원칙이라면서 심각하게 생각 안 한다. 검찰도 ‘죽으면 살인 사건이지만 (스토킹 범죄로) 죽지 않았잖아’라는 식으로 숱한 사건 중 하나로만 본다.”

이런 수사기관의 인식은 스토킹 사건 처리 통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의 연구 결과를 보면 2022년 1∼7월 스토킹처벌법으로 112에 신고된 사건 1만6571건 가운데 1%인 161건만 재판에 넘겨졌다. 기소된 사건 가운데 36%(58건)는 공소 기각됐고, 14.9%(24건)만 실형을 선고받았다. 추가 범죄 없이 스토킹 범죄만으로 실형이 선고된 사례는 2건(1.2%)에 그친다.

한민경 교수는 “스토킹처벌법은 국회 입법 과정에서 ‘반의사불벌죄’로 규정됐다. 피해자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이 때문에 가해자가 피해자나 그 가족까지 무차별적으로 접근해 합의를 종용하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된 이후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이 알려진 것만 5건에 이른다. 2021년 11월 헤어진 연인을 스토킹하다 법원에서 ‘접근 근지 잠정조치’ 통보를 받았음에도 피해자의 집을 찾아가 살해한 ‘김병찬 사건’이 있었고, 12월 스토킹 피해로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의 가족을 살해한 ‘이석준 사건’이 발생했다. 또 2022년 2월엔 스토킹으로 신변보호를 받던 여성이 경찰에서 받은 스마트워치로 신고했음에도 살해당한 ‘구로구 스토킹 살인 사건’이, 6월엔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는 피해자가 또다시 무력하게 죽임을 당한 ‘안산 스토킹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최근 법무부는 뒤늦게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규정 폐지를 추진하는 등 대책을 내놨다.

서울교통공사노조가 서울지하철 신당역 스토킹 범죄 피해자 추모 주간을 선포하고 2022년 9월20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스토킹 범죄의 재발 방지와 안전대책 수립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서울교통공사노조가 서울지하철 신당역 스토킹 범죄 피해자 추모 주간을 선포하고 2022년 9월20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스토킹 범죄의 재발 방지와 안전대책 수립을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혜윤 기자

‘당신의 용기와 세상을 떠나며 만들어낸 울림 절대 잊지 않고 더 나은 세상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시민3)

하지만 이번 사건 이후 나온 정치인과 관료 등의 발언은 스토킹 살인 사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하면,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상담과 보호조치를 받았다면 비극적인 사건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며 사건의 책임이 ㄱ씨에게 있다는 듯이 말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이상훈 서울시의원은 “좋아하는데 안 받아주니 가해자가 폭력적 대응을 했다”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자문위원은 “스토킹 사건에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여성혐오가 내재해 있다. ‘너만 고소를 취하했으면 내가 피해를 안 봤는데’라는 식의 ‘내가 피해자’라는 태도가 가해자에게 보인다”고 말했다. 특히 임 자문위원은 “반복되는 스토킹 범죄, 젠더 폭력은 세월호 참사 같은 사회적 참사”라며 “다시는 이런 사회적 비극이 벌어지지 않도록 성찰위원회를 꾸려서 판사가, 서울교통공사가 뭘 잘못했는지 등등 흩어진 문제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문제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상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절대 합의해주지 않고 버틴 피해자의 용기는 정말 대단한 거죠. 그런데 왜 어렵고 힘들었을 피해자가 가족, 동료들에게 알리는 것을 주저하고 조용히 사법체계를 통해 대응하려 했을까요. 노동조합도 있고 노동자 보호제도가 비교적 잘 갖춰진 공기업에서조차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 부분이 너무 마음 아픕니다.”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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