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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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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한 일은 없었다 [페미사이드 500건 분석]

페미사이드, 500건의 살해 기록… 가장 안전한 집에서
가장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비명 소리, 듣지도 보이지도 않는 죽음들
등록 2021-12-20 10:32 수정 2021-12-29 02:39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직후인 2016년 5월20일 살해된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집회에 모인 여성들이 참가자들의 말을 듣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직후인 2016년 5월20일 살해된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집회에 모인 여성들이 참가자들의 말을 듣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소녀들의 주검은 2021년 5월 충북 청주시의 아파트 단지 화단에서 발견됐다. 10대들은 용기 내어 성폭행 피해를 알리고 진실을 찾아가던 중이었다. 2021년 7월 서울 마포구의 오피스텔 건물에서 20대 여성이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끝내 숨졌다. 사회초년생인 그는 교제했던 남성의 폭행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 달 뒤인 8월에는 전자발찌를 끊고 달아난 범죄자가 여성 두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각각 40대·50대였던 그들은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러 나왔다가 살해됐다. 또 다른 50대 여성은 2021년 4월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살해당했다. 30년 동안 ‘아내폭력’(아내에 대한 폭력)의 공포에 떨다가 두 명의 소중한 자녀를 둔 그는 결국 남은 생의 자유마저 빼앗겼다.
나이와 지역, 계층을 가리지 않고 여성들이 죽어나간다. 남성들에 의해서. 이 죽음엔 코드가 있고 패턴(유형)이 있다. 특정한 범죄 패턴이 드러날 때 수사 당국은 그 범죄에 ‘이름’을 붙여 대중에게 경각심을 준다. 연쇄살인, 연속살인, 보이스피싱…. 별의별 범죄에 모두 이름이 붙는데, 국내에서만 한 해 100명 넘는 여성의 목숨을 빼앗는 이 범죄엔 아직 이름이 없다. 너무 오래돼 익숙한 죽음이 돼버린 탓이다.
현상은 제대로 붙여진 이름을 통해 실체를 얻는다. 여성이 겪는 이 가장 극단적인 폭력을 세계는 ‘페미사이드’(여성을 일컫는 라틴어 ‘femina’와 살인을 뜻하는 영어 ‘homicide’의 합성어)라 부른다. 국내에선 흩어져 있던 살해-공포와 분노가 2016년 ‘강남역 여성살인사건’ 이후 응집됐다. 페미사이드는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기 위한 ‘프레이밍’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폭력의 코드와 패턴을 알아내고, 중지시키기 위한 ‘방법론’이자 ‘구호’다.
<한겨레21>은 그 코드를 풀기 위해 언론보도와 판결문 검색 시스템을 통해 남성이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들을 추적했다. 2016년 1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1심 판결이 선고된 427건의 사건, 3500쪽의 판결문을 분석했다. 페미사이드는 아직 국내에서도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한 주제다. 파편화되고 개별화돼 있던 여성살해 범죄를 이렇게 종합적으로 취합해 기록하는 보도는 국내에선 첫 시도다. 국외에서도 영국 등 극히 일부 국가에서 민간 차원의 분석이 이뤄지고 있을 뿐이다. 판결문에 담긴 처참한 폭력의 기록을 독자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저널리즘 윤리를 깊이 고민했다. <한겨레21>은 폭력을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언론 상업주의를 지양한다. 그러나 ‘가정폭력’이란 이름으로, ‘데이트폭력’이란 이름으로 한없이 얕고 가벼워진 페미사이드의 폭력성을 전하는 것이 더욱 긴박한 책임이라고 봤다. 아울러 세계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페미사이드 규탄’ 시위 소식도 전한다. 사랑하는 딸과 엄마를 잃은 이들의 목소리도 법정 안팎에서 들었다. 다음호(제1394호)에 하편 보도가 이어진다. 막을 수 있었던 500개의 페미사이드. 이 기획은 그 범죄의 흔적을 좇은, 일종의 ‘역학조사 보고서’다._편집자주

“1층에 세 가구가 살고 있는데 방음이 잘되지 않았다. 경찰관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4~5일 전에 싸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욕설을 하면서 주먹인지 발인지 몰라도 여자를 때리는 소리가 ‘퍽, 퍽’ 났고 여자는 고함을 질렀다. 남자가 하루 종일 여자를 때렸다.” -참고인 ①

“경찰이 오기 3~4일 전 피고인과 피해자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고, 여자가 ‘아야 아프다, 때리지 마라’라는 말을 한 것을 들었다.” -참고인 ②

“두 사람이 또 싸우는지 그날따라 쿵쿵하는 소리가 다른 날보다 크게 났고, 피해자가 우는 것도 힘이 없어 입안에서 맴도는 소리로 울었으며 피해자가 ‘제발 그만 좀 해라’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1시간 정도 그렇게 쿵쿵거리는 소리, 피해자의 우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갑자기 조용해졌다. 며칠 후 피해자 사망 소식을 들었다.” -참고인 ③

피해자, 이미 죽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아무도 그 죽음을 막지 않았다. 동거 중인 40대 여성을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한 혐의(상해치사)로 가해 남성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의 판결문(2016년 6월) 일부다. 가까이 사는 이웃 모두가 피해 여성의 울음과 비명, 호소는 물론 폭행의 현장음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피해자가 폭행 피해를 호소하며 112에 신고한 적도 많았다고 판결문엔 기록돼 있다. ‘다른 날보다 쿵쿵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고 기억할 만치 이웃에 잘 알려진 폭력이었지만, 구조의 마지막 기회는 층간소음 사이 어딘가에 묻혔다. 어떤 죽음은 누구에게나 들리지만 누구도 듣지 않았고,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누구도 보지 않았다.

아무도 그 ‘죽음들’을 막지 않았다. 경찰청 범죄통계를 보면, 살인·강간·강도·폭행 등 5대 강력범죄로 목숨을 빼앗기는 여성은 한 해 평균 300명 안팎이다. 우리 형사사법시스템에선 범죄 가해자와 피해자를 교차분석할 수 없어 ‘누가, 누구를, 어떤 맥락에서 죽이는지’ 파악할 수 없지만 <한겨레21>이 확보한 5년11개월치 판결문 427건과 언론보도된 73건의 ‘여성살해 후 가해자 자살’ 사건은 실제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사건의 총량에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해마다 한국여성의전화가 언론보도를 참고해 집계하는 ‘교제 또는 배우자 관계에서의 여성살해’ 살인기수(실제 사망에 이른 사건) 범죄 건수만 해도 연간 평균 89.3명(2009~2020년 기준)이다. 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의 한계, 암수범죄(발생했지만 수사기관에 인지되지 않거나 용의자 신상을 특정할 수 없어 묻힌 범죄)의 가능성을 두루 고려할 때 500건이라는 숫자엔 한계가 크다. 그러나 500번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다면 다가올 다른 죽음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때 들려오는 소리에 우리가 귀를 기울였더라면, 드러난 징후를 우리가 눈여겨봤더라면.

징후는 있었다. 교제관계와 부부관계 등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페미사이드 사건 347건의 판결문 가운데 36%(126건)에서 피해자를 상대로 한 가해자의 학대 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협박과 언어폭력, 감시 등 행동 제약, 물리적 폭력, 성폭력, 스토킹이 두루 수반됐다. 욕설이나 폭언,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서울북부지법 2020고합○○○), 위치추적 앱을 설치해 감시하기(울산지법 2018고합○○○), 골절까지 이르는 빈번한 폭행(서울북부지법 2019고합○○), 시속 140㎞로 달려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며 피해자를 위협하기(대전지법 논산지원 2019고합○○). 살해하기 두 달 전 이미 피해자의 목을 흉기로 찔러 집행유예를 받은 가해자(수원지법 안산지원 2017고합○○)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살해되기 전에 이미 매일의 죽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경찰에 폭력을 신고한 피해자들도 있었다. 347명 중 23명(6.6%). 적은 비율이지만 그들의 비명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 관악구의 30대 여성은 2018년 1월부터 4월까지 10차례에 걸쳐 사실혼 관계 남성을 112에 신고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흉기로 찌르고 뼈를 부러뜨릴 정도의 상해를 입혀 9차례 형사 입건됐지만, 결국 피해자는 2018년 5월 가해자의 흉기에 세상을 떠났다.(서울중앙지법 2018고합○○○) 살해 두 달 전 가해자가 구속될 처지에 놓였을 때 피해자는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탄원서를 썼다. ‘제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구조요청을 했는데도 세상은 듣지 않았고, 그의 ‘처벌불원’ 의사만을 경청했다. 전문가들이 ‘아내폭력 사건 처리 과정에서 처벌불원 의사 고려 비중을 낮춰야 한다’고 지적하는 이유다.

피해자의 집을 둘러싼 ‘담장’은 살해라는 강력범죄의 현장을 가시영역에서 지워버린다. 범행이 ‘집’이라는 성역에서 일어나는 순간 구조신호는 간과된다. 427개의 페미사이드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67%(285건)의 페미사이드 사건은 집이 범행 장소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함께 살던 집(177건), 피해자의 집(68건), 가해자의 집(40건) 순인데, 전체 살인범죄의 47%만이 ‘주택’(아파트·연립·단독 모두 포함)(각주 1)에서 발생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난다. 친밀한 관계에서 가해자 남성은 그 담장 안의 법관이자 통치자다. 어린 자녀는 엄마인 피해자를 아빠가 폭행하고 살해(수원지법 2017고합○○)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145회 찔러 여성 살해한 남성

남성이 여성을 살해한 사건에서 범행 장소가 중요한 이유를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렇게 설명한다. “‘강남역 사건’을 우연이라고 말하는 남성은 있어도 ‘사소하다’고 말하는 남성은 없다.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의 원인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통제다. 사회는 남성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장소인 집 안에서의 폭력에 대해서는 관용한다. 하지만 공권력이 영향력을 미치는 길거리에서의 살인은 문제적이다. 남성 권력의 무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서 죽었는가’가 여성의 인권보다 중요한 이슈가 된다.”(각주 2)

범죄 현장으로서 집은 우발적 사고의 현장이 아니라 잔혹한 폭력사건이 매일 밤 다시 쓰이는 곳이다. 친밀한 관계의 남성 가해자 다수는 우발적으로 몇 대 때려서 파트너를 숨지게 한 게 아니다. 전체 사건 가운데 ​살인의 고의를 품은 ‘살인’ 혐의 사건이 342건, ‘상해치사’ 등의 혐의가 적용된 사건이 85건이다. (다만 치사 사건들도 판결문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골프채로 머리를 때리거나,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등 ‘살인의 고의가 없었다’고 보기 어려운 내용이 많다.) 특히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페미사이드 사건 31%(107건)에선 ‘잔혹한 범행 수법’이 가중 요소로 거론됐는데, 그중 81건이 교제살해와 아내살해에 쏠려 있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끊기 위한 것 이상의 폭력을 사용하는 ‘과잉살해’(Overkilling)는 페미사이드의 주된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를 살해한 여자들은 페미사이드를 저지른 남자들에 비해 과도한 폭력을 사용한 경우가 훨씬 적다.’(각주 3) 영국 내 민간 차원의 페미사이드 기록인 ‘페미사이드 센서스’ 보고서(2019년)는 페미사이드 가해 남성 40%에게서 과잉살해가 확인됐다고 밝힌다.

427개 판결문에서 확인한 남성 가해자의 범행 수법은 흉기(153건), 질식(124건), 폭행(82건), 둔기(45건), 방화(11건) 순이다. 일부 가해자는 목숨을 빼앗는 것 이상의 목적으로 여러 차례 공격하거나 여러 도구를 활용해 고통을 줬다. 2018년 서울 중구에선 한 남성이 헤어지자는 교제관계 여성을 흉기로 145회 찔러 살해(서울중앙지법 2018고합○○○)했다. 화학물질을 뿌려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는 엽기적 범행도 인도 등 제3세계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2016년 5월 부산에선 가출한 사실혼 관계 여성을 찾아간 남성이 여성을 흉기로 찌른 뒤 보온병에 준비한 화학물질을 뿌려 살해(부산지법 동부지원 2016고합○○)했다. 같은 해 11월 서울에서도 50대 남성이 연락을 피하는 교제관계 여성에게 화학물질을 뿌려 살해(서울서부지법 2016고합○○○)했다.

어떤 관계에서나 살해당할 가능성

피해자의 몸에 불을 붙이거나, 갖은 둔기로 내리치고, 셀 수 없이 찌른 남성 가해자들. 제주도에서 전남편을 살해하고 주검을 훼손해 온 국민의 지탄을 받은 고유정씨의 경우와 유사한 잔혹범죄가 ‘페미사이드의 세계’에선 적어도 스무 날에 한 번은 일어났다. ‘일탈’이 아니라 ‘구조’라는 뜻이다. “강간과 마찬가지로 남편, 연인, 아버지, 지인, 낯선 타인에 의한 대부분의 여성살해는 설명할 수 없는 일탈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페미사이드, 곧 가장 극단적 형태의 성차별적 테러리즘이며, 그 동기는 여성에 대한 혐오, 경멸, 쾌락 또는 소유 의식이다.”(각주 4)

이런 성차별적 테러 피해는 특정 나이 구간의 여성에게만 쏠린 문제가 아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탄생에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생애주기 전체에 걸쳐서 나타난다.”(유엔여성기구) <한겨레21>이 분석한 판결문에서 살해된 여성들은 모든 연령대에 분포했는데, 교제·부부·타인 간 어떤 관계에서나 살해당할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피해가 집중된 40~50대 피해자는 216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절반 수준이다. 30대 이하 피해자는 전체 사건의 29.3%(125명). 60대가 43명으로 10.1%, 70대 이상이 37명으로 8.7%에 이르러 예상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고령층에선 배우자의 ‘간병살인’이 일부 확인됐지만 70대 이상 피해자에게서도 교제살해, 아내살해, 성폭행·강도 등 낯선 이에 의한 범죄 성격의 살해가 여러 건 확인됐다.

남성은 상대적으로 제압하기 쉬운 여성을 홀로 마주하기 위한 범행 장소로 사적 공간을 ‘선택’하기도 한다. 또 다른 사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피해자의 사업장(37건), 숙박업소 또는 유흥업소(30건), 차량 또는 주차장(16건) 등이다. 혼자 사는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사전 물색하기 때문이다. 교제살해와 아내살해를 제외한 18건의 사건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집에서 살해됐는데, 온라인 중고거래 카페에 글을 올린 여성이 혼자 사는 것으로 보이자 표적 삼아 강도살인(부산지법 2019고합○○○)하거나 성폭행을 목적으로 밤에 귀가하는 여성을 몰래 따라가 살해(창원지법 2015고합○○○)한 경우다.

이런 표적범죄는 성적인 동기가 아니어도 여성을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다수다. 뉴스통신사에서 성별 정보 없이 ‘귀가 강도 살해’를 검색하면 최근 3년 새 50대 여성(전남 해남)·60대 여성(광주)·20대 여성(부산)·30대 여성(제주)이 피해를 입은 사건만 확인된다. 여성들의 공포에는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이 공포야말로 젠더폭력의 악영향이고, 가부장적 질서가 얻는 부수 이익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젠더폭력의 가장 위중한 효과는 바로 ‘공포’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공포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여성’이라는 조건을 바꿀 수 없고, 따라서 범죄를 미리 예방하는 데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각주 5) 이런 사회에서 여성은 “공포를 내면화”하고 “물리적, 심리적 활동을 제한”하게 된다.

‘앙심’ ‘무시’ ‘질투’ 등 남성들의 기분

페미사이드 범죄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남성들의 ‘기분’이다. 판결문 427건 중 300건(70%)에서 피고인의 감정적 동기가 드러나는데 ‘앙심’ ‘무시당했다는 기분’ ‘질투’ 같은 감정들이다. 가해 남성들은 ‘놀면서 돈도 안 벌어온다고 무시해서’(광주지법 2016고합○○○), ‘술 취해 귀가한 피해자에게 반말을 듣자 화가 나서’(대구지법 김천지원 2018고합○○), ‘성관계 시도 중 성기능을 비하하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대구지법 2017고합○○○) 피해자를 살해했다.

친밀한 관계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여성은 단지 남성의 ‘기분’을 건드려서 살해당했다. 직장 선배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고 비꼬듯 대꾸했다가 피살(서울서부지법 2016고합○○○)되고, 세입자 남성에게 채무 문제로 잔소리했다가 살해(대구지법 2021고합○○)된다. 자신(피고인)보다 젊은 여성이 상급자의 지시를 받아 지시를 내리고 말을 함부로 한다며 여성의 몸에 시너를 뿌려 불을 지른 경우(수원지법 2015고합○○○)도 있었다.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215건(62%)의 살해사건은 범행 동기가 결별·외도 의심 등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운 가해자의 소유욕과 직결돼 있었다. 다만 가장 확실한 트리거(방아쇠)는 있다. 친밀한 관계의 살해 피해자 98명(29%)은 가해자에게 결별을 통보하거나, 이혼·별거 등으로 이미 결별한 뒤 재결합 요구를 거절한 경우 범행을 당했다. 교제살해 사건 142건의 판결문을 살펴보면, 피해자와 가해자의 교제 기간은 놀라울 정도로 짧았다. 정식 교제를 시작한 지 1개월 이내에 피해자를 살해한 남성은 6명(4.2%)이다. 범위를 6개월까지 넓히면 살해사건은 37명(26%)으로 늘어난다. 가해자와 교제한 지 2년 이내에 살해당한 여성은 142명 중 96명, 70%에 이른다. 피해 여성들이 교제 초기부터 가해자의 통제 성향을 파악하고 관계를 끝내거나 개선하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막지 못한 죽음 끝에는 피해자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추가 피해(44건·10%)도 있었다. 2019년 7월 경남 창원에서는 한 남성이 아내와 딸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흉기로 두 사람 모두를 살해했다.(창원지법 마산지원 2019고합○○) 또 다른 남성들은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자 격분 끝에 자녀와 아내를 모두 살해(창원지법 진주지원 2020고합○○○)하거나 아내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말리는 의붓아들까지 살해(광주지법 목포지원 2018고합○○○)했다. 교제관계를 끝낸 피해자를 찾아갔다가 피해자의 가족까지 살해 또는 살해시도(수원지법 안양지원 2020고합○○)한 사건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온당한 죗값을 치렀을까. 평균형량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가중·감경 요소 없는 살인범죄 단일범 57명의 1심 형량은 14.4년이다. 2019년 대법원 산하 양형위원회가 발간한 연간보고서에서 같은 기준으로 전체 살인범죄 형량을 보면, 평균 14.8년으로 엇비슷하다.

다만 가중·감경 사유를 반영한 아내살해 사건의 살인범죄 단일범 평균형량은 12.8년, 가중·감경 사유를 반영한 전체 살인범죄의 단일범 평균형량은 14.4년으로, 차이가 벌어진다. 아내살해 범죄의 경우 ‘피해자 유족의 처벌불원’ 등의 사유가 크게 작동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체 427개 사건에서 처벌불원이 감경 요소로 작용한 경우는 39건으로 9%에 지나지 않지만, 아내살해 사건에선 처벌불원이 감경 요소로 작용한 판결이 205건 중 36건으로 17%에 해당한다.

국제사회는 여성에 대한 젠더폭력에 관용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2019년 유엔여성기구가 여성을 향한 차별 철폐와 권익 신장을 위해 만든 광고 시리즈의 한 장면. 유엔여성기구 누리집

국제사회는 여성에 대한 젠더폭력에 관용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2019년 유엔여성기구가 여성을 향한 차별 철폐와 권익 신장을 위해 만든 광고 시리즈의 한 장면. 유엔여성기구 누리집

살해범의 집행유예 이유 ‘피해자를 보살펴왔다’

상대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집행유예 선고도 있었다. ‘아내를 여러 차례 밟고 다시 넘어뜨려’ 살해했지만 ‘아내의 부정행위를 의심해서 우발적으로’ 벌인 일임이 참작되고 ‘자녀들이 부모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이’라는 점이 고려돼 집행유예(수원지법 평택지원 2016 고합○○○)를 받거나 ‘캠핑을 데려가달라며 억지를 부린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간이 파열되도록 폭행해 살해(부산지법 서부지원 2020고합○○)했으나 ‘암투병 중인 어머니가 있다’거나 ‘평소 과음하는 피해자를 보살펴왔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은 사건이다. 그 사건들은 거기에서 피해자의 죽음과 함께 ‘중지’되는 것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동거 중인 여성을 폭행해 살해한 남성은 경찰이 출동할 때마다 무사히 순간을 넘겨 피해자를 다시 폭행했다. 9차례 경찰에 입건된 또 다른 남성은 구속을 모면하자 피해 여성을 결국 살해했다. 피해자의 장기가 파열되도록 폭행한 남성은 ‘피해자를 잘 돌봐왔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아무도 막지 않았던 500번의 살해가 지나갔다. 여성들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비명을 지른다. 누구나 들을 수 있었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이정규 기자 jk@hani.co.kr
자료정리 김민지 신민경  

각주 1. <범죄분석>, 대검찰청, 2020

각주 2. <그 일은 전혀 사소하지 않습니다>, 한국여성의전화 엮음, 2017

각주 3. <페미사이드>, 다이애나 러셀 편저, 2018

각주 4. 위의 책

각주 5.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로서의 ‘여성’은 누구인가?’, 허민숙, 2017

‘치사’까지 포함해 ‘살해’로 포괄

분석 대상 4개 유형 427건 판결문

‘우한폐렴’이 ‘코로나19’로 정정됐듯 정확한 이름 붙이기는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다. <한겨레21>은 국내 독자에게 다소 생소하더라도 여성살해·여성살인 대신 페미사이드(여성을 일컫는 라틴어 ‘femina’와 살인을 뜻하는 영어 ‘homicide’의 합성어)를 ‘페미사이드’ 그 자체로 호명하기로 했다. 살인이라는 가치중립의 사법적 명명을 넘어,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이자 가장 극단적인 젠더폭력이라는 취지를 살린 사회적 명명이 필요하다고 봤다.

페미사이드는 급조된 언어가 아니다. 1976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여성 대상 범죄 국제법정’에서 여성운동가이자 <페미사이드>(책세상)의 저자인 다이애나 러셀이 “여성들이 살해당할 때, 그들이 여성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는 취지에서 페미사이드를 공론장에 처음 끌어낸 뒤 이 이름은 다양한 방식으로 살해된 여자들의 기억을 한데 모을 유일한 깃발 구실을 해왔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UNODC)의 공식 보고서에서도 ‘여성을 상대로 한 젠더 기반 살인’을 페미사이드로 명시한다.

다만 여전히 어디까지를 페미사이드로 볼 것인지는 명시적으로 합의되지 않았다. 광의의 페미사이드에선 가부장적 권력구조 때문에 일어난 살인인 경우 여성이 가해자여도 페미사이드로 볼 수 있다. 이번 기획에선 여성을 포함한 가해자 여럿이 연루된 사건은 가급적 분석대상에서 배제했다. 애초에 ‘폭력의 대물림’ 구조를 보기 위해 남성 가해자의 모친·조모 존속살해 사건도 검토했으나 판결문이라는 자료의 특성상 관계의 전말을 살피기가 어려워 일괄 배제했다.

427개의 판결문 속 페미사이드는 4개 유형으로 나눠 살펴봤다. 먼저 사실혼 관계를 포함한 전·현 배우자 살해, 아내살해(205건)다. 가정폭력이라는 용어는 아동학대나 노인학대 등 가정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폭력을 포괄하고, 부부폭력이라는 표현은 가정폭력의 성별 권력 문제를 흐린다. 이런 취지에서 <한겨레21>은 관련 범죄들을 ‘아내폭력’ ‘아내살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아내살해에 이어 다음으로 많이 취합된 범죄는 교제살해(142건)다. 페미사이드는 물리적·심리적·성적 폭력을 수반하므로 ‘사람을 해치어 죽임’의 의미를 담아 살인 대신 ‘살해’로 이름 붙였다. 법률용어인 ‘살인’과 구별해 치사 사건까지 포괄하려는 목적도 있다. 아내살해와 교제살해는 큰 범주에서 ‘친밀한 관계에서의 페미사이드’로 묶는다. 판결문을 확보한 페미사이드 사건 10건 중 8건은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졌다.

친밀한 관계 밖에서의 페미사이드는 더 복잡하고 중첩적이다. 이번 기사에서는 ‘성매매 여성 살해’(49건·중복 범주)도 중요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들이야말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젠더폭력과 착취구조의 최대 피해자인 까닭이다. 성매매 여성은 친밀한 관계가 아닌 성구매 남성뿐 아니라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도 살해당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쉽게 강도·강간 그리고 ‘분풀이용’ 혐오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여성이어서’ 낯선 이에게 살해된 사건(51건)도 살폈다.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한겨레21 페미사이드 특별웹페이지 stop-femicid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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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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