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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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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이 석방되길 기다리며

평화주의 신념 따른 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옥중 연애편지
등록 2021-07-17 15:04 수정 2021-07-20 21:58
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로 2019년 8월~2021년 4월 수감생활을 한 루민씨. 김진수 선임기자

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로 2019년 8월~2021년 4월 수감생활을 한 루민씨. 김진수 선임기자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더 이상 처벌받지 않는다.’ 이 말은 절반만 맞다. 2018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됐고 대체복무가 도입됐다. 그러나 가짜 양심과 진짜 양심을 판별한다는 재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수감된 양심적 병역거부자 루민(32·활동명)은 감옥에 가둬도 가둬지지 않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여자친구에게 보냈다. 루민은 출소해 그때 주고받은 편지 120통을 묶은 책 <어느 평화수감자의 연애편지>를 출간한다.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그 편지를 <한겨레21>이 일부 먼저 공개한다. _편집자

루민(32·활동명)은 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병역거부로 2019년 8월 수감 생활을 시작해 의정부교도소→ 안양교도소→ 여주교도소에서 생활했다.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 직업군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 그는 이런 말을 수시로 들었다. 2008년 10월 국군의 날, 양심적 병역거부자 강의석씨의 퍼포먼스를 접하고 병역거부라는 선택지를 알게 됐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반전과 평화의 신념을 표현하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모든 걸 감수하고 감옥에 갈 가치가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여자친구 루나(가명)에게 말했다. “병역거부를 할 수 있는데 안 한다면 나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 살게 될 것 같아.”

낯선 동굴 속에서
밤에도 환한 불

이곳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 되었어! 오늘은 드디어 펜과 종이가 생겨서 기분이 좋은 날이야. 바로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쓸 도구가 없어서 이제야 첫 편지를 띄우네.

내가 지내는 방은 가로 4m, 세로 7m 정도 되는 공간이야. 여기에서 8명이 붙어서 생활해. 일주일이 지났다고 이제 좁은 방에서 식사하는 것도, 양동이로 찬물 샤워하는 것도 다 익숙해진 것 같아. 보통 사람들이 감옥에서 콩밥 먹는다고 하잖아? 그런데 여기에는 콩밥이 없어. 처음 들어와서는 밥도 제대로 못 먹을 것 같았는데, 어느새 이것에도 적응했어.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은 점들도 있어. 여기서는 24시간 내내 불을 켜둬. 밤에도 엘이디(LED) 조명을 사방에 켜둬서 낮과 다름없는 느낌이야. 물론 조도를 조금 낮추긴 하지만 그래도 자꾸 깨더라고. 또 다른 한 가지는 화장실 문이 투명해. 감옥이니 당연히 여러 제약을 감수하고 왔지만 감시체계가 몸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들어올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느낌은 소화하기 쉽지만은 않은 경험이네. 나는 그런대로 잘 지내고 있어. 자기한테는 한없이 미안해. 밤하늘 아래를 같이 걷던 시간이 벌써 그립다!2019년 8월22일

재활용 전문가

여기서는 개인마다 사용할 수 있는 사물함이 한 개씩 주어지는데 이 안에 옷, 편지, 책, 재판 관련 자료 등 모든 물건을 보관해. 시간이 지나면서 수납공간이 점점 부족해지는데 그럼 과자 상자 같은 거로 수납함을 만들어서 벽에 붙여서 써. 이런 수납함을 여기서는 제비집이라고 불러. 구매할 수 있는 물품도 한정됐으니 재활용 전문가가 되는 것 같아.

여기서도 커피와 라면을 살 수 있는데 가스레인지나 전자레인지, 전기포트처럼 뜨거운 물을 끓일 수 있는 시설이 없어. 이유는 역시 사고 예방. 그래서 하루에 두 번씩 뜨거운 물을 담은 물통을 가져다줘. 4~8ℓ 정도를 각 방에 넣어주는데, 재빨리 그 물을 병에 담아서 그 병을 이불로 돌돌 말아서 보관하고는 해. 그러면 하루 종일 따뜻해서 원할 때 따뜻한 물을 쓸 수 있어. 기상천외한 풍경이 아직 놀랍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씩 익숙해지고 있으니 이곳에 적응해나간다는 의미겠지?2019년 8월27일

‘진짜’ 양심

오늘 신문에 특집 기사로 얼마 전 병역거부로 유죄판결을 받은 한 활동가의 인터뷰가 실렸어. 대체복무제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에도 종교적 신념이 아닌 평화주의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부분이 유죄판결을 받고 있는데, 헌재의 결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심적 역할을 했던 이런 분마저 유죄를 선고받았어. 이 사안을 위해 오랜 시간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해온 사람도 ‘진정한 양심’이 증명되지 않는다며 실형을 선고받고 있으니, 나 같은 사람은 할 말이 없다. 정말 감옥 갈 각오로 선택한 결정이고, 출소 뒤에도 여러 제약이 있다는 걸 감수한 결정인데 그보다 더 어떻게 뭘 증명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

몇 살 때 생긴 신념이 진짜 신념일까? 어떤 ‘생각’이 신념이 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은 ‘유동적이고 가변적’일 수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병역거부에 따른 여러 결과를 감수하고도 선택한 최종 결정이 신념에 조금은 더 가까운 게 아닐까? 아무리 병역거부에 확신이 있더라도 징역을 감수해야 하고, 현실적인 상황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당연히 마음은 여러 가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과정에서 그 모든 흔들림이 있었더라도, 징역형을 감수하고라도 이르게 된 최종적인 결정이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모습으로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쉬워.

아무튼, 여기서는 요즘 장기가 유행이야. 나는 장기판들 사이에서 신문도 보고 책도 읽는데, 신문은 네 번 접어서 보고 책은 양반다리로 딱 앉아서 봐야 옆 사람과 부대끼지 않고 볼 수 있어. 공간이 너무 좁아서 신경이 곤두설 만도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평화롭게 지내고 있어.2019년 10월12일

병무청에 전화해 병역을 거부하겠다고 말한 뒤 몇 주 지나지 않아 대체복무제를 마련하지 않은 병역법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경찰은 그를 수차례 소환해 비꼬듯이 물었다. “병역 기피하려는 거잖아요.” “여자친구가 병역거부를 반대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법원에 평화주의 단체 활동 내역을 제출했다. 그의 오랜 고민을 아는 주변인들에게서 탄원서도 받았다. 타인에게 나를 설명해달라고 부탁하는 게 괴로워 그 자체로 이미 벌을 받는 듯했다. 무대영상 제작 사업을 하며 빚을 졌다. 병역법 위반에 사기 혐의까지 더해졌다. 유죄가 확정됐다.

은둔과 적응을 거치며
과자 괴물 행자

나는 아직도 아침에 눈뜨면 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분주하게 자리를 정리하고 청소하다보면 그런 생각이 날아가버리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밖에 나가서 자기를 볼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거든.

가끔은 나름의 ‘징역 음식’이라는 걸 해먹기도 해. 참기름과 무말랭이, 참치 같은 것은 따로 팔거든. 이런 재료를 사서 그날의 밥 그리고 반찬과 이리저리 조합해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보고 있어. 처음에는 그렇게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는 게 신기했는데, 이제 할 수 있는 조합은 다 해본 것 같아. 다음에는 야채타임 과자를 먹고 그 안에 있는 케첩을 모아서 빵이랑 야채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어보려고.

과자 괴물 행자 같아 보이지만 나름 나만의 처방전이야. 그렇게 해야 마음이 조금은 여유로워지는 것 같거든. 여기서는 떡국에 떡 개수가 적다는 이유로, 우유를 누가 하나 먹은 것 같다는 이유로 싸우는 곳이니 마음이 좁아지지 않도록 계속 노력해야 해.2019년 10월28일

처벌 vs 교화

오늘은 동복과 겨울이불을 드디어 받았어. 여기 들어올 때 이불 한 장을 주는데, 이걸로는 겨울을 날 수가 없거든. 그랬다가는 추워서 얼어죽을 거야. 그래서 다들 이불을 별도 구매해서 사용해. 이제 그나마 춥지 않게 잠잘 수 있을 것 같다!

방에서 사람이 나갔으면 좋겠고, 추가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으면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 한 공간에서 함께하는 사람의 수와 마음의 공간은 반비례하나봐. 법적으로 모든 수감자가 독거실을 사용하는 게 원칙이더라고. 독거실이 부족하거나, 정서적 안정과 교화를 위해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한방에 8명이나 9명, 그보다 더 많은 경우도 있어. 이렇게 좁은 방에 있다보면 사람을 멀리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2019년 11월6일

사회의 거울

조금 슬픈 소식이 있어. 이제부터 외부에서 보내주는 책 반입이 금지된다고 해. 그래서 동생이 책을 10권이나 들고 왔어. 물론 여기서 영치금으로 구매해서 받아볼 수는 있는데, 그래도 가족과 친구들의 손을 통해 전달된 책과는 다른 느낌일 거야. 여기서는 책이 정말 제일 소중한데, 갑자기 갑갑한 마음이 들어.

여기서는 생각보다 구매해서 써야 하는 물품이 많아서 돈이 없으면 무척 불편해져. 외부에 있는 가족이 영치금을 보내줄 능력이나 상황이 되지 않는 수용자는 조금 민망해지기도 해.

이 안에서 ‘법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 ‘법무부의 자식’을 줄여서 표현한 건데, 이렇게 외부에서 영치금을 받을 통로가 아예 없는 사람들은 법무부에서 한 달에 2만원씩 지원해줘. 그 2만원으로 한 달 동안 혼자 마실 물 정도만 살 수 있어. 그런데 그 외에 필요한 물품이 많잖아?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 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빨래, 청소, 설거지를 모두 해주겠으니 공용 물품을 같이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선언해.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이미 가장 취약한 계층인데, 여기에 들어와서도 그게 반복된다는 게 너무 슬프지 않아? 2019년 11월11일

아픈 수감자

오늘은 옆 사람이 의견서 제출하는 작업도 도와줬어. 이 사람은 미결수로 이곳에서 8개월째 재판하는 동안 몸무게가 20㎏ 빠지고 배에 혹이 2개가 생겼는데 이곳에 있는 의료시설로는 원인조차 파악이 안 돼서 외부 병원의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거든. 여기 있는 의료 담당자도 외부 병원 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데, 계호 인력 부족으로 한 달 이상 대기해야 한대. 암 조직일 수도 있어서 조직검사가 필요하다고 이곳 의료시설에서 이야기하는데도 말이야. 그래서 판사에게 의견서를 제출해서 보석으로 병원 치료를 하게 해달라는 방법을 써보자고 했어. 여기서는 정말 아프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할 것 같아. 2019년 12월15일

새해맞이

2019년의 끝자락에 두 가지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야. 2주에 한 번씩 하는 종교집회에 안 빠지고 꾸준히 나가는데, 며칠 전에 크리스마스 미사를 갔거든. 뭔가 특별한 따뜻함, 고요한 기쁨 같은 게 전달되는 기분이었어. 집회 끝나고 방에 들어왔는데 병역법 개정안이 통과됐다는 뉴스를 봤어. 필리버스터니, 국회에서 여야가 서로 법안 통과로 싸우는 사이에 그냥 유야무야되는구나 싶었거든.

물론 그 진정한 양심을 갈음하는 기준이 과연 얼마나 달라질까 싶지만 어쨌든 대체복무제를 인정하는 법안이 통과됐다는 자체가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 같아. 그렇게 전혀 변할 것 같지 않은 상황도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게 신기해.2020년 1월1일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되다보니, 달력보다는 식단표를 보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가늠했다. 세상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으나 감옥의 시간은 거꾸로 갔다. 2018년 헌재 결정과 대법원 판결로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좁지만 새로운 길이 열렸다. 병역법이 개정됐고 대체복무제가 도입됐다. 2019년 11월 법무부는 교정시설 수용자에게 우송·차입 방식의 도서 반입을 금지하고 영치금을 통한 도서 구매만 허용했다. 유해간행물 반입을 방지하기 위한 조처라고 설명했다. 2020년 12월 도서 반입이 다시 허용됐다.

수면 위로 올라와
코로나

요즘 밖은 코로나 때문에 난리인가봐. 여기서는 소식만 듣고 있으니 그 구체적인 분위기를 체감하지 못했는데 이제 여기서 일하는 교도관들도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더라. 밖에선 코로나로 난리지만 여기서는 감기가 유행하면서 아주 난리가 난 상황이야. 감기가 시설 전체에 다 퍼져서 다들 감기약을 달고 살거든. 나이 든 분들은 따로 격리됐는데, 지금은 그 격리가 거의 의미 없을 만큼 상황이 나빠졌어. 아무래도 작은 방에서 여러 사람이 지내다보니 감기가 한번 유행하면 급속도로 퍼져. 방이 더러우면 더 아플까 염려돼서 그런지 요즘 우리 방 사람들은 하루에 거의 일곱 번 정도 청소해. 엄청나지?2020년 2월5일

접견 금지

일기예보에서 이제 추운 날은 끝났다고 해. 정말 봄이 오려나봐. 나에게 따뜻한 날씨가 기쁜 건 찬물 샤워가 좀 덜 고통스러워지리라는 사실!

날씨와 달리 코로나 때문에 바깥세상은 정말 난리 난리인데 자기가 지내는 곳은 어떨지 싶다. 여기도 요즘 코로나 상황 때문에 여러 변화가 있어. 앞으로 접견을 모두 금지하고 심지어 2주간 법원도 휴정에 들어간대.

여기서 30년 동안 근무한 교도관도 이런 사태는 처음 경험해본다고 하더라고. 갑자기 복도도 소독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러 준비를 하고 있나봐. 그래서 조금 더 답답해진 느낌은 있어. 농담으로 차라리 이곳이 안전하다는 이야기도 나누었거든. 그런데 청송이며 경북에 있는 교정시설에서 코로나가 퍼지는 걸 보니 이곳은 과밀시설이라 한번 퍼지면 더 위험한 곳이겠구나 싶어. 다들 이런 사태는 생전 처음 본다고 하고 매일 새로 접하는 뉴스에 당혹스럽기도 하다.

그리고 접견이 금지돼서 수용자들의 ‘외부접근권’에 따라 전화를 쓸 수 있도록 한다고 해. 6개월 동안 전화를 써보지 못했는데 전화라니!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시간은 딱 3분만 준다는데…. 그래도 그게 뭐라고 엄청 설레네. 2020년 2월26일

사회적 격리 체험

여기 있는 교도관들도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고 얘기했잖아? 하지만 수용자는 돈을 주고도 마스크를 살 수 없어. 수급되는 공장에서 원료가 없어 생산을 못한다고 해. 밖에서도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는 판이니 여기서는 언제쯤 마스크를 구비할 수 있을지 전혀 예측이 안 되네. 설사 마스크를 구할 수 있게 되더라도 여러 명이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는 상황에서 마스크를 밤낮으로 착용하는 것도 잘 상상이 안 되긴 해.2020년 3월9일

그는 한방에서 최대 17명과 지낸 적이 있다. 1인용 담요도 반으로 접어야 할 정도로 좁았다. 옆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옆으로 누워 잘 때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나는 서핑보드 위에 누워서 자는 거다.’ 서울동부구치소 사태로 교도소 과밀 수용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밀폐된 공간에서 다수의 사용자가 밀집해 일상적으로 밀접한 생활을 이어가는 집단수용 시설은 코로나19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마주할 때
‘교화’

구치소에서 몇 달을 지내보니 이제 우리나라의 온갖 범죄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훤히 알게 된 기분이야. 여러 사람과 한방에서 지내다보니 불법 쓰레기 매립, 마약상 운영 방식, 주가조작 등 각종 범죄 유형과 방법, 수익에 자연스레 노출되더라. 범죄를 통한 수익 대비 형량으로 일종의 가성비를 서로서로 빗대보며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어.

4천원 때문에 구속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1조원 넘는 재산 관련 범죄로 온 사람도 있었어. 그런데 (1조원 재산 관련 범죄로 들어온) 이 사람들이 선임한 변호사는 변호사인지 집사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여러 심부름을 하는 모습이고, 교도관마저 그들을 특별히 예우해주는 느낌이야. 그럼 정말 빈곤한 상황에 내몰려서 이곳까지 온 생계형 범죄나 음주운전, 사업 실패, 사고 현장 관리책임처럼 순간의 실수로 온 사람들도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오히려 다른 환상을 품으며 ‘교화’되는 일도 발생해. 지금 같은 형태의 교정시설은 그 존재 자체로 부도덕을 더 빠르게 양산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2020년 5월4일

사소한 것

세상을 바꿔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지만, 내가 속한 작은 세상 하나 바꾸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끼고 있어. 좁은 방 안에서 온종일 생활해야 하는 이곳에선 화장실 10분 더 쓰는 것, 밥 먹을 때 김치를 조금 더 받는 것, 잠잘 때 자리를 10㎝ 더 확보하는 것 같은 먹고 자고 싸는 아주 원초적이고 사소한 일로 계속 부딪치게 돼.

이런 작은 것에 집착하게 하고, 아주 작은 것을 큰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 교도소 시스템이 정말 싫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결국 우리 일상에서도 아주 사소한 것이 큰 분쟁으로 이어지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더라. 무한한 크기를 지닌 인간이지만 그저 ‘김치’나 ‘화장실 10분’ 따위에 집착하는 작은 존재이기도 한 인간.

2020년 7월30일

반가운 소식

대체복무 심의위원회가 구성되고 병무청이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 결정을 내렸다고 해. 2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변화라는 건 서서히 오는 게 아니라 갑자기 터지듯 오는 것 같아. 내 재판과는 별개로 사회는 또 이렇게 바뀌어가고 있으니 반가운 소식이야. 인권과 제도가 개선되는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랜 시간,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력이 쌓인 뒤에야 이뤄지는 건지 실감하게 된다.

2020년 8월10일

교도소와 권력

그동안 엄청난 양의 비가 내리더니 지금은 거짓말처럼 뚝 그치고 폭염이 시작됐어. 그래도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틈만 나면 샤워하느라 화장실은 비어 있을 새가 없을 정도고, 모두들 입버릇처럼 덥다는 말을 계속하고 있어. 지금 지내는 시설에서는 만성적인 물 부족을 겪어. 1300명 정도가 동일한 시간에 밥 먹고 자고 하다보니 동일한 시간에 설거지하거나 씻게 되잖아. 그렇게 물을 사용하는 시간이 겹치다보니 물이 항상 졸졸졸 나와. 밥 먹고 나서 1300명이 동시에 설거지할 때면 아주 물전쟁이야. 좁은 방, 물 부족, 더위까지 쉽지 않지만 그렇게 또 적응하며 살고 있다. 2020년 8월19일

새로운 시작

어느덧 12월도 절반을 향해 가고 있어. 정말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끝나가는 거지. 나름 기쁜 소식도 있어! 지난달 말에 종교가 아닌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한 사람이 처음으로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나봐. 헌재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린 지 2년이 지나서 나온 첫 사례야. 한국 사회에 찾아온 작지만 무척 의미 있는 변화일 거야.

오늘도 여전히 요가·명상·채식을 하며 공부와 기도로 하루를 채우고 있는, 어쩌면 한 달 전, 6개월 전, 1년 전과 비슷비슷해 보이는 하루지만 분명 또 다른 시절로 접어든 거잖아. 기다림의 법칙. 감옥에서 그걸 배운 것 같아. 많이 보고 싶다.2020년 12월14일

2021년 4월 그는 출소했다. 양심을 지키기 위해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는 그 마음들이 쌓여 법과 제도는 바뀌었다. 그러나 증명되고 납득되지 못한 마음들이 아직도 감옥에 간다. 가둬둔 마음들이 보내온 과거의 편지는 여전히 미래의 답장을 기다린다.

정리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루민·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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