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을 보며 생각했다. 명량은 어디일까. 더 물러설 수 없는 곳, 물러서봐야 결국 죽고 마는 곳, 설령 목숨을 부지해봐야 가치 없는 삶만 연명하게 되는 곳, 그곳이 명량이다. 이순신은 그것을 알았기에 도망칠 궁리보다 싸워 이길 궁리를 했고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 승리를 거둔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자신이 처한 명량에서 버티는 이들과 도망치는 이들로 세상은 나뉜다.
8월7일,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세월호 특별법을 13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야합’했다. 진상조사는 기존 특검법에 맡기고, 17인으로 구성되는 진상조사위원회에 유가족이 단지 3인의 위원을 추천한다는 내용이다. 유가족이 주장했던 ‘수사권·기소권’은 사라졌다. 언론에서는 ‘합의’라고 속보 경쟁을 했지만 세월호 사고의 직접적 당사자인 유가족들은 낙동강 오리알로 내쳐졌다. 특히 새정치연합은 도망쳐선 안 되는 ‘명량’에서 꼬리를 감추고 도망쳤다. 한 유가족은 새정치연합이 “가족들을 버렸다”고 탄식했다.
<font size="3">“새정치연합이 가족을 버렸다”</font>그 시각, 나는 서울 광화문에서 농성 중인 유가족들을 인터뷰하러 가는 중이었다. 가족들은 교황의 방한을 ‘선물’이라고 불렀다. 교황이 직접 무엇을 해줄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교황 방한이 가족들이 원하는 특별법 제정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정부·여당이 교황 앞에서 농성장을 강제 철거하긴 힘들 테고, 가능하면 보기 좋게 세월호 정국을 정리하길 원할 테니 조금은 전향적으로 나올 거라 봤다. 100일 넘게 서명받고 농성하고 단식하느라 가족들은 이미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래도 교황이 광화문 미사를 집전하는 8월16일까지 있는 힘을 다 짜낼 태세였다.
목적지 도착 직전에 나는 속보를 접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이하 가족대책위) 집행부인 한 유가족에게 조심스럽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그분도 지금 뉴스를 보고 알았다고 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박영선 원내대표는 이전의 언론 인터뷰에서 “세월호 특별법이 우선 통과되지 않으면 다른 입법에는 보이콧하겠다”고까지 밝혔다. 가족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표정이었다.
가족대책위 집행부와 몇몇 가족들, 국민대책회의 활동가들이 국회로 향했다. 나와 시민기록위원들도 동행했다. 광화문광장의 인파 속에서 가족들의 다급한 눈빛이 빠르게 움직였다. 국회에 모이자 새정치연합 전해철 의원이 찾아왔다. 세월호 특별법 태스크포스의 새정치연합 쪽 간사인 전해철 의원은 박영선 원내대표를 대신해 합의 배경을 설명했다. 결국은 “새누리당이 너무 완고해서 돌파구가 안 보이더라”는 이유였다. 수사권은 못 얻었지만 그래도 조사위원회에 가족 추천 조사위원의 수를 3명으로(여당은 2명을 주장했지만) 늘렸다고 했다. 가족들은 격앙됐다.
“어떻게 가족들과 논의도 없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오늘 결정을 안 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급하긴 여당이 더 급한데 왜 거기 합의를 해줍니까?”
“이런 특검은 이전과 똑같아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가족들이 화가 난 이유는, 첫째 가족들이 완전히 소외된 채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고, 둘째 이 합의로는 가족들이 물러설 수 없는 원칙인 ‘성역 없는 진상조사’가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수사권·기소권을 지닌 진상조사위원회’를 핵심으로 한 ‘4·16 특별법’을 주장해왔고, 그게 어렵다면 ‘그에 버금가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말해왔다. 즉, 특검을 할 경우에도 가족들이 추천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야 합의에 의하면 특검 추천에 가족들이 개입할 수 없고 특검 임명은 대통령이 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 청와대, 국가정보원도 모두 진상조사의 도마 위에 오를 수밖에 없다. 조사 대상이 임명하는 특검은 성역 없는 진상조사를 사실상 포기한다는 얘기다.
<font size="3">홀로 ‘명량’에 선 부모들</font>전해철 의원이 “그래도 가족들끼리 논의를 해보시라”며 물러간 뒤 가족들은 대책 마련에 바빴다. 저녁 뉴스가 여야 합의 소식으로 덮이기 전에 가족들의 입장을 밝히려고 부랴부랴 기자회견이 잡혔다. 기자회견에서 가족들은 여야 합의를 가족들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밀실 야합’이라고 비판했다. 21일간의 단식을 끝내고 온 유경근 대변인은 “박영선 원내대표가 새정치연합이 싸울 테니 단식을 끝내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가” 라며 울분을 토했다. 이어 유 대변인은 “이제부터 물과 소금도 먹지 않는 단식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나는 기가 막혀 주저앉았다. 1시간 전에 유 대변인이 “다시 단식해야겠으니 우선 배를 채워야겠다”고 했을 때 흘려들었던 것이다.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유가족의 참여는 유가족들에겐 ‘명량’이다. 여기서 물러선다는 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어째서 그토록 중요한지 이해하려면 4월16일로 돌아가야 한다. 전남 진도로 내려가는 부모들은 ‘전원 구조’가 오보가 아니길 빌고 또 빌었다. 기를 써서 침몰 현장까지 간 부모들은 정부와 언론의 말과 달리 아무런 구조 작업도 행해지고 있지 않음을 보았다. 진도로 내려가며 평생 그보다 더 열심히 기도해본 적이 없다는 정혜숙(고 박성호 학생의 어머니)씨는 구조 현장을 떠올리며 말을 잇지 못한다. “정말이지 그때의 배신감이란….”
자식들이 탄 배가 가라앉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감, 믿었던 대한민국이 무책임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걸 볼 때의 배신감은 부모들의 영혼 속에 시퍼런 칼처럼 박혔다. 어느 부모나 똑같이 말한다. 왜 구조를 안 했는지, 누가 구조를 못하게 했는지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단식이든 삭발이든 할 거라고, 10년이라도 싸우겠다고. 현장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기에, 부모들은 자신들을 배제한 진상조사는 의미 없다고 한다.
“이제 여당이고 야당이고 손을 끊고 시민세력과 같이 싸워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도 법을 여야가 만드는데 어떡하나?”
야당이 여당과 손잡고 세월호 정국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거라고 비판하면서도 부모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가족들의 뜻에 못 미치기는 야당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너무나 높은 정부·여당의 벽에 맞서려면 야당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오늘처럼 뒤통수를 맞았지만 야당과 관계를 완전히 끊기도 어렵다. 일단은 원내대표끼리의 합의를 깨야 한다. 가족대책위 집행부와 국민대책회의는 합의안이 새정치연합에서 통과되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8월13일로 예정된 본회의를 저지하는 데 힘을 쏟아붓기로 했다.
<font size="3">절박해진 시민들의 노란 물결 </font>이날 밤 경기도 안산 분향소 근처에서 긴급하게 가족 총회가 열렸다. 밤 10시에 200여 명의 부모들이 모였다. 합의안은 거부됐다. 항의하기 위해 아이들의 영정을 들고 국회로 가자는 안이 나왔는데, 반별로 토의한 결과 일단은 영정 없이 가서 농성하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국회에 도착한 부모들을 국회의장이 요청한 경찰 병력이 가로막았다. 새정치연합이 도망친 명량에서 부모들은 수백 척의 적선과 홀로 직면하고 있었다. 울돌목의 물살보다 센 시민들의 ‘노란 물결’이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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