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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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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는 총을 들 수 없는 사람이구나”

6주 훈련만 받으면 군의관이 될 이
도, 형이 감옥에 있는 쌍둥이 동생도
선택한 감옥행… 1년차부터 변호해
온 ‘양심적 병역거부자들’ 그리고 나
의 선택
등록 2013-10-16 14:28 수정 2020-05-03 04:27
2001년 5월 경기도 용인 군사법원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 거부 재판은 국선변호인이 아닌 민선변호사가 참여한 첫 재판이었다. 나의 첫 양심적 병역거부 재판이기도 하다.

2001년 5월 경기도 용인 군사법원에서 열린 양심적 병역 거부 재판은 국선변호인이 아닌 민선변호사가 참여한 첫 재판이었다. 나의 첫 양심적 병역거부 재판이기도 하다.

얼마 전 17년 만에 반가운 친구들을 만났다. 친구 중 한 명이 미국에서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오랜만에 모이게 되었다. 내게 이 친구들은 특별한 경험과 아픈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귀한 존재들이다. 고백하자면 대학 시절 나는 열혈 운동권이었다. 각자 다른 학교에 다녔고 전혀 모르는 사이였던 우리는 한 장소에 모여 함께 사고를 치고 구속됐다. 우리는 이른바 ‘시국사범’이었다. 대부분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그들을 알게 되고 그들과 친분을 쌓게 된 건 그 이후였다. 구속 당시 경찰은 계속해서 일종의 준법서약서인 반성문을 쓰도록 종용했는데, 우리 학교 쪽 지휘부는 우리에게 빨리 반성문을 쓰고 나와서 투쟁에 합류하라는 방침을 세웠다. 잠깐 고민 끝에 반성문을 썼다. 한 번 쓰고 나니 구속 기간 내내 매일 반성문을 쓰게 했고, 나는 매일 준법을 약속해야 했다. 그 결과 집행유예로 석방될 수 있었다. 종이 한 장에 기록된 나의 반성과 준법 약속은 점점 바윗덩이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그 일로 나는 꽤 오랫동안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고, 별거 아니라고 했던 선배들과도 화해하지 못한 채 틈만 나면 트집을 잡고 싸웠다. 그때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며 함께 아파해준 이들이 바로 그 친구들이었다. 사면복권이 되고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17년 만에 만나서도 우리는 아직 그때의 일을 아프게 이야기했다. 우리가 평생토록 해야 할 이야기.

<font size="4"><font color="#C21A8D">총을 든 뒤에야 알게 된 사실 </font></font>

내가 굳이 나의 부끄러운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은, 이 부끄러운 경험이 이끌어준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변론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하면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지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0년 남짓이다. 나는 변호사 1년차 시절부터 지금까지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변론해왔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위해 힘을 보태왔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2001년 처음으로 지면에서 다뤄지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나는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던 임종인 변호사의 권유로 변론에 뛰어들게 되었다. 양심을 지키려는 자를 돕는 일은, 좀 과장하자면 나에겐 운명이었다.

첫 변론은 군사법원에서였다. 지금은 모두 입대를 거부한 상태에서 병역법 위반으로 민간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당시는 입대한 상태에서 집총을 거부해 군사법원에서 항명죄로 처벌받던 시절이었다. 항명죄로 재판을 받으면 어떤 사정도 참작되지 않고 무조건 3년형을 선고받았다. 집총을 거부한 청년들은 대부분 여호와의 증인 신자로서 종교적 양심에 따라 그리 행동한 것이다. 저마다 사연이 있었지만 단 한 명의 사연도 양형에 참작되지 못하고 기계로 찍어내듯 무조건 관행처럼 3년형이 선고됐다. 집총 거부자의 군사재판에 우리 같은 변호사가 변호하러 온 것도 거의 처음인 듯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법정에서 자신이 왜 총을 들 수 없는지에 대해 자기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집총을 거부하던 청년들은 모두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사연은 다양했다. 한 청년은 군에 입대한 뒤 총을 들고 군사훈련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그로 인해 그의 집총 거부는 훈련이 힘들어 벌인 해프닝쯤으로 취급됐는데, 청년은 총을 들어보고서야 자신이 총을 들 수 없는 사람임을 알았다고 고백했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였지만 조금은 어설픈 신자였던 청년은 3년 동안 감옥에 있을 자신이 없었다. 청년은 자신이 총을 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제대할 때까지만 잘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입대해 집총훈련을 받은 이후부터 그는 자책에 시달렸다. 자신의 내면에 형성된 기독교적 양심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훈련 때마다 죽을 듯한 고통에 시달리며 자신의 양심을 인정하고 집총 거부를 선택하게 되었다.

상식적으로 군사훈련이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피하기 위해 3년의 감옥행이라는 뻔한 선택을 하진 않는다. 3년의 감옥행을 택한 청년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준법 서약을 한 뒤에야 내가 나의 양심을 버린 사실을 깨달았고,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감옥을 가게 되더라도, 죽더라도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 얼마나 많이 곱씹어봤던가. 한 청년은 자신들은 손가락이 없는 육체적 장애로 총을 들 수 없는 사람과도 같다며 총을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유수의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탄탄대로의 앞날이 열려 있던 청년도, 6주간의 군사훈련만 받으면 군의관이 될 수 있던 의사 선생도, 쌍둥이 형이 이미 감옥에 수감 중이던 동생도 모두 똑같이 총을 들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병역 마치고 종교를 가진 예비군 훈련 거부자</font></font>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에 빠져 판단 능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벌인 일이라거나, 여호와의 증인 신자인 부모가 어릴 때부터 세뇌를 한 결과라는 편견도 상당히 많았다. 이 때문에 재판장은 청년들에게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벌을 면해주겠다며 손을 들어보라는 등 법정에서 양심을 바꿀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우리(변호인단)는 이에 항의하며 변론을 중지하고 법정에서 퇴정한 일도 있었다. 민간 법정에서도 재판 중에 피고인에게 ‘네 부모가 시킨 게 분명하다’며 방청객 중 그의 부모를 일으켜세워 모욕을 주기도 했다.

나는 예비군 훈련 거부자도 변호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들에 대한 처벌이 더 가혹했다. 한 청년은 이미 병역을 마친 상태에서 종교를 갖게 돼 예비군 훈련을 거부하게 됐는데, 예비군 훈련 때마다 훈련을 거부해 수십 차례 기소됐고 그때마다 선고받은 벌금만 해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훈련 거부가 계속되니 벌금형이 아닌 징역형이 선고돼 1년이나 징역살이했고, 징역살이 뒤에도 예비군 훈련 거부는 계속되니 또다시 벌금형이 반복됐다. 재판부조차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답이 없는 재판의 답답함에 나는 그분에게 차라리 망명을 하라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양심적 병역거부 변론을 하면서 ‘병역거부자의 양심만 양심이냐, 군에 가는 사람은 뭐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 때문에 나오는 오해인데, ‘나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라고 하면 더 정확한 용어일 것이다.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사람의 양심도 물론 소중하고, 그 양심으로 인해 처벌을 감내해야 한다면 나는 그 양심을 위해서도 변론할 것이다. 분단국가에서 병역거부 인정은 시기상조라는 말도 많이 듣는데, 그들의 수가 아주 적어 군의 존재를 위협할 정도가 아니라거나, 군사력 비교 등 이런 이야기보다, 병역거부의 역사에 대해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병역거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꽃과도 같다. 미국의 남북전쟁, 제2차 세계대전 등 전쟁에서 병역을 거부한 많은 이들이 학살당했고, 전쟁 이후 사람들은 전쟁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게 되었다. 독일(당시 서독)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상황이었음에도 아예 헌법에 이를 명문으로 새겨넣었다. 전쟁의 위협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평화의 교훈이었던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C21A8D">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까지 관용하게 된다면</font></font>

아직까지 대체복무제가 도입되지 않고 병역거부자는 여전히 감옥에 가고 있지만, 처음 변론을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이해와 관용의 소리가 많이 들린다. 여호와의 증인뿐 아니라 평화와 전쟁 반대의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의 등장으로 더 이상 한 종교집단만의 문제로 치부되지 않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까지 관용하고 포용하게 된다면 우리 사회의 인권 수준은 한 차원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변론을 하며 그들을 질투하고, 부러워했다. 그리고 상처도 많이 아물어 이렇게 글로 쓸 정도가 되었다. 이제는 정말 100% 패소의 오명에서 벗어나 승소로 보답하고 싶다.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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