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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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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걸 다른 사람이 먼저 써 표절이 되다니!

법원 판결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지는 ‘저작권’ 논쟁… 영악하게 표절
기준을 악용하는 저작권자도 있으니 법원이 편안한 판
결만 계속해선 안 돼
등록 2015-01-18 14:55 수정 2020-05-03 04:27

우리나라 저작권법은 보호 대상으로 삼고 있는 저작물에 대해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이라 규정한다. 이에 따라 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 되려면 ‘창작성’과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의 표현’이라는 두 가지 요건을 모두 구비해야 한다.

1심, 2심, 3심, 계속 뒤집힌 결과

드라마 〈선덕여왕〉이 뮤지컬 〈무궁화의 여왕, 선덕〉을 표절했는지를 가리는 판결은 1심, 2심, 3심에서 계속 뒤집어졌다. MBC 제공

드라마 〈선덕여왕〉이 뮤지컬 〈무궁화의 여왕, 선덕〉을 표절했는지를 가리는 판결은 1심, 2심, 3심에서 계속 뒤집어졌다. MBC 제공

생각이나 감정의 단순한 표출을 모두 권리로 보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어느 정도의 창작성이 필요한 것도 당연하고, 특히나 외부적·객관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내면의 사상이나 감정 그 자체를 보호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이를 ‘아이디어와 표현의 이분법’이라고 한다. 만일 이러한 규범적 제한 없이 저작물성을 인정하게 된다면 누구나 쉽게 저작권자가 될 수 있고 결국 우열과 승패를 가릴 수 없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 사회로 진입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저작물이나 저작권의 개념 자체가 추상적 규범성을 띠다보니 만인 대 만인 정도는 아니지만 분쟁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다. 잦은 발생 빈도에 비춰 사적 자치의 영역에서 스스로 해결되는 분쟁이 거의 없고 최종적인 규범적 해석기관인 법원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지는 듯하다.

그런데 최근의 저작권 분쟁, 특히 표절을 둘러싼 분쟁을 보면 이러한 규범적 제한과 이에 따른 법원의 해석 등에 대한 학습을 통해 이를 교묘히 피해나갈 여지가 생기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주제와 소재, 주인공, 사건 등 아이디어는 차용하되 표현만 바꾸는 방법으로 말이다.

몇 달 전에 MBC 드라마 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 드라마 이 방영 이전에 창작된 뮤지컬 대본 을 표절했는지를 가리는 사건이었다. 우선 이 사건의 판결이 눈길을 끄는 점은 동일한 사안을 두고 1심, 2심, 3심의 결과가 계속 뒤집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항소심에서는 1심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의거관계를 인정하고 전체적 줄거리, 등장인물의 구체적 성격과 역할,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 구체적 줄거리와 사건 전개 과정에서의 실질적 유사성을 인정해 드라마 의 저작권 침해를 인정했으나, 3심인 대법원에서는 의거관계는 물론 실질적 유사성을 모두 부인했던 것이다.

드라마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 직전에 필자와 동료 변호사가 1심을 담당했던 유사 사건에 대해 대법원의 저작권침해 부인 판결도 있었다. 사실관계는 다르지만 어문저작물로서 장르를 달리하는 표절 시비였다는 점, 부분적 문언적 유사성보다도 포괄적 비문언적 유사성 인정 여부가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만 드라마 사건과 달리 이 사건은 1심에서부터 상고심에 이르기까지 원고 쪽이 모두 패소했다.

필자 등이 대리했던 이 사건의 원고는 현직 교사이자 두 권의 장편 역사소설을 출간한 소설가이며 석굴암 연구자로서 다년간의 연구 성과를 집약해 이라는 책을 1999년에 출간했는데, 이 서적은 석굴암이 신라 왕실의 호국 사찰이 아니라 삼국 통일 뒤 백제 유민에 대한 살육 등을 참회하는 김대성의 개인 원찰로 창건된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담고 있어 출간 당시 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일반적인 학술서나 연구서와는 달리 김대성의 석굴암 창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인물·사건·배경을 연결해 서술하는 구성 방식이었다. 특히 저자는 이 저술을 기반으로 석굴암 창건자인 김대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집필할 예정이었다.

‘김대성 개인 원찰’이라는 중요 모티브 비슷

그런데 장편소설 1권을 출간한 적이 있는 어느 소설가가 김대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2011년에 출간했다. 소설은 앞서 출간된 원고 저술의 특징적인 해석을 그대로 차용해 소설로 구성했을 뿐만 아니라 소설 ‘일러두기’에서도 원고의 글이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표시까지 했다. 변론에서도 소설을 쓰기 전에 원고의 글을 접한 사실을 인정했다. 한마디로 나중에 출간된 소설은 앞서 출간된 을 적어도 어떤 식으로든 참고한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출간된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1심 법원에서는 나중에 출간된 소설이 앞서 출간된 에 의거해서 작성된 것으로는 판단했으나, 역사적인 사실 및 김대성 설화에 대한 독창적 해석은 대부분 아이디어에 불과하고 일부 주관적 묘사나 설명은 통상적 표현으로 창작성이 없으며, 일부 창작성이 있는 표현은 다르게 표현돼 결국 실질적 유사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결과가 이렇게 됨으로써 이 사건의 원고는 아이러니하게도 석굴암 창건과 김대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의 집필이 사실상 불가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칫 같은 소재와 주제로 소설을 썼다가는 오히려 자신의 저작물을 참고해 작성된 소설의 저작권을 다시 자신이 침해할 수도 있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음악저작물 분야에서는 이러한 ‘참고’와 ‘차용’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난다. 어문저작물은 표현 자체가 외부적·객관적으로 표시되므로 표절 시비를 피해가자면 ‘지난한’ 노력이 드는 반면, 음악저작물은 곡을 구성하는 요소(가락·리듬·화성·템포·박자·비트 등)가 많고 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해졌기에 훨씬 더 많은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멜로디로만 판단한다는 걸 아는 차용자들

음악저작물의 침해 기준에 대한 우리 법원의 판단이 나온 지도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침해를 판단할 때 곡의 구성 요소 중 가락(멜로디)을 가장 중심에 놓고 판단한다. 그런데 가락의 유사성을 중심에 놓고 침해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영악한 차용자들은 당초부터 창작성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리듬이나 화성, 템포, 박자 등을 그대로 차용하고 가락만 변조하는 신종 기법을 사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곡의 분위기는 비슷하다 못해 같은 곡이라 느껴질 정도인데, 누가 노래를 잘못 불러(아니 잘 불러) 약간씩 다른 음정을 사용하는 느낌이랄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실을 무시한 채 법원이 법적 안정성에만 방점을 두고 보수적이고 편안한 판결만을 반복하게 된다면 그 위로 뛰고 나는 권리 침해자들을 양산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은 이처럼 저작권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남상철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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