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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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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조차 못하는 의사들

연예인이 되고 싶던 18살 소녀는 성형수술 뒤 식물인간이 되고… ‘하얀 거탑’을 꺾는 승소 결과 받아들었지만, 고통의 진실조차 알 수 없는 의료분쟁 시스템 꼭 변화해야
등록 2015-02-13 13:43 수정 2020-05-03 04:27

2014년 10월 ‘마왕’ 신해철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움과 비탄에 빠뜨렸다. 무엇보다 신해철 같은 유명인이 의료사고로 사망한 것에 당황했고 어이없는 의료사고가 신해철을 쓰러뜨린 것에 대한 분노, 신해철 같은 유명인도 이렇게 허망하게 당하는데 일반인은 오죽하겠느냐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의료사고 피해자가 상당수 존재하고, 많은 피해자들이 제대로 구제받지 못해 그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건의 의료소송을 진행했지만 대부분 패소했고, 승소한 경우에도 정말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과정을 통한 것이었다.

사건을 마무리하기까지 6년의 시간

연예인을 꿈꾸던 18살 소녀가 있었다. 연예기획사의 권유로 소녀는 성형수술을 받기로 하고, 기획사가 소개한 성형외과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2000년 11월 어느 날 오후 3시 소녀는 마취를 하고 하악각(턱뼈) 및 관골(광대뼈) 축소술을 받았다. 오후 4시45분께 마취약 투여를 중단했음에도 소녀는 마취 상태에서 각성되지 못한 채, 저녁 7시50분께 왼쪽 동공이 확대되는 이상 징후를 보였다. 뒤늦게 소녀를 대학병원으로 이송했으나 밤 9시31분께 뇌단층촬영검사 결과 왼쪽 측두 두정엽 주위에 급성 경막외출혈, 왼쪽 전두, 측두 두정엽 부위에 전반적인 뇌경색과 뇌부종, 뇌종창 등이 관찰됐다. 소녀는 의료진으로부터 응급으로 감압개두술(두개골을 열어주는 수술) 및 혈종제거술을 받은 뒤 반혼수 상태에 있다가 최종적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신해철 의료사고 이후 그 같은 유명인사도 이렇게 허망하게 당하는구나 하는 탄식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의료소송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신해철 의료사고 이후 그 같은 유명인사도 이렇게 허망하게 당하는구나 하는 탄식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의료소송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사진공동취재단

의료사고 뒤 소녀의 부모는 의사로부터 제대로 된 (도의적) 사과조차 받지 못했고, 자신은 잘못이 없다, 불가항력이었다는 설명을 반복해 들어야 했다. 소녀의 부모는 변호사를 선임해 의사를 형사고소(업무상 과실치상)했으나, 결과는 무혐의였다. 소녀의 최종적인 상태가 의사의 과실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소녀가 의료과실의 피해자라 확신하고 사건을 맡았던 변호사는 무혐의 처분 이후 사임을 해버렸고, 소녀의 부모는 당시 내가 근무하던 법인을 찾아왔다. 변호사 착수금을 낼 돈은 물론 인지대 등의 소송비용도 낼 여력이 없었고, 소녀의 병원 치료비도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건을 맡은 우리는 소송비용도 법원의 소송구조를 받아 마련하고, 때론 사무실에서 부담하며 진행했다. 사건을 마무리하기까지 6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소녀 가족은 많은 것을 잃었다. 치료비로 집을 잃고 친척 집에 더부살이하며 근근이 살아가야 했다. 가장 가슴 아픈 사실은 물리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으면 상태가 호전될 수 있음에도 치료비가 없어 소녀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사소송은 소를 제기하는 쪽이 상대방의 잘못을 입증해야만 상대방으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 의료과실로 인한 소송도 마찬가지인데, 피해를 주장하는 쪽이 의사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의료사고에서 피해 입증은 의사의 진료기록지, 간호기록지에 대한 분석, 대한의사협회 같은 동료 집단인 의사에 의한 감정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래서 의사가 진료기록을 위조 또는 가공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진료기록을 확보하고, 누락된 기록 없이 전체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시 형사고소를 하고 압수수색으로 진료기록을 확보해야 하는데, 검찰은 의사의 임의제출을 선호해 이것도 쉽지 않다. 그 진료기록도 알지 못할 의학 용어가 즐비하다. 그 의미를 해석하려면 전직 의사, 간호사 등이 운영하는 의료기록 감정 사무실에 가서 번역해야 한다. 번역된 내용을 봐도 의사가 공인된 의학 지식에 따라 제대로 된 치료를 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대한의사협회 등에 진료기록을 보내 감정을 하는데, 같은 의사들로 구성된 대한의사협회에서 의사에게 과오가 있다는 답변을 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 신해철의 경우도 대한의사협회가 소장과 심낭의 천공을 의료과실로 단정할 수 없다는 감정 결과를 회신해 ‘가재는 게 편’이라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이처럼 의료소송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고도의 의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의사를 상대로 의학적 과실을 증명해야 하는 싸움. 그 증명마저 같은 집단인 의사의 힘을 빌려야 하는 싸움. 돈과 시간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싸움. 이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꽁꽁 숨겨진 골절 기록을 찾아내다

소녀의 경우도 대한의사협회 등의 진료기록 감정 결과는 의사의 잘못이 아닌 원인 불명 또는 소녀의 혈관이 선천성 기형일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경막외출혈의 주된 원인은 외부 충격에 의한 것으로 뇌골절, 출혈 이런 경로를 거치는데, 소녀에게서는 기록상 뇌골절(외부 충격의 결정적 증거)이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소녀에게 선천적 혈관 기형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 1심 판결이 선고됐다. 2심 재판에서 고심 끝에 소녀를 치료한 다른 병원, 소녀가 승소하면 승소금으로 치료비를 받기로 한 병원을 움직여보기로 했다. 밀린 치료비를 받아야 했던 병원은 소녀가 패소할 이유가 없다면서 비공식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했고, 병원을 다시 찾아가 함께 기록을 뒤졌다. 분명히 뇌골절 관련 기록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우리는 병원을 뒤져 꽁꽁 숨겨져 있던 골절 기록을 찾아냈다. 그 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의사를 형사고소했고, 6년 만에 우리는 승소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하얀 거탑’을 무너뜨리는 환호의 순간이었으나, 6년 동안 환자와 그 가족이 겪은 고통, 앞으로 겪을 고통에 비하면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승소였다.

의료소송 과정에서 환자들의 억울함을 접하면서도 나는 균형 잡힌 생각을 하고 싶었다. 의사의 진료대 위에서 발생한 사고라고 하여 모두 의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의사라는 직업은 그 자체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죽음도 항상 가까이 있다. 모든 의학적 노력을 다했으나 의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불가해한 사고도 많을 것이다. 그 모든 책임을 의사에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의 문제는 환자가 의료 과정, 또는 사고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채, 환자가 모든 증명의 책임까지 떠안고 그 증명조차 믿을 수 없는 의사의 권위에 기대야 하는 불공정한 시스템에 있다. 룰이 공정해야 승복하고 납득할 수 있는데 지금의 룰은 억울한 사람만을 양산하고, 극소수의 성공한 사람조차 충분한 피해 배상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의료분쟁조정제도 활성화돼야

심지어 사과조차 하기 어렵게 만드는 시스템이다. 의사는 자신의 사과가 바로 과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비칠까 도의적인 사과조차 하지 못한다. 환자와 그 가족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위로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다. 과실 없음에 대한 입증 책임을 의사에게 부여하고(입증 책임의 전환), 의료과실에 대한 배상보험제도(교통사고 관련 책임보험처럼)를 활성화(또는 의무화)해 의료사고가 나는 경우에도 의사들이 과도한 배상의 짐을 벗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제도가 마련되고 효율적으로 운영되면 의료분쟁조정제도도 활성화되리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불공정한 룰에서는 의료분쟁조정제도는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다.

소녀의 가족에게 가장 큰 고통은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거였다. 왜 죽었는지, 왜 식물인간이 되었는지, 진실만이 가장 큰 위로요 배상이다. 이것이 의료분쟁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다.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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