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사찰이 광범위하게 이뤄진다는 보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카카오톡을 탈퇴했다. 정부의 사이버 검열 논란 이후 일주일 만에 모바일 메신저 이용자 수가 100만 명 이상 줄었다고 한다. 나 역시 늦은 밤 사이버 망명을 선택하면서 성가시고 불쾌한 공권력의 감시와 참견에 짜증을 느꼈다. 머릿속 한켠에는 공권력의 부당한 감시를 받으면서도 나처럼 망명도 못하고 고통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국가보안법·보안관찰법 철폐 주장했더니
잊을 만하면 경찰이 전화로 어떻게 지내냐며 공개적으로 사찰을 하고, 3개월에 한 번씩 경찰서에 가서 그동안 누구를 만났고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으며 무엇을 했는지 신고해야 한다면 얼마나 불쾌하고 짜증이 날까? 경찰이 이미 내 이름과 성별은 물론 연락처와 집주소까지 알고 있어 수시로 전화하고 반갑지 않음에도 굳이 집까지 찾아온다. 이름과 성별, 주소와 연락처를 신고하지 않았다고 하여 형사처벌까지 받아야 한다면 얼마나 황당할까? 더욱이 국가가 증거를 조작해 누명을 씌우고도 또다시 같은 죄를 저지를지 모른다는 이유로 경찰이 수시로 찾아와 사찰하고 3개월에 한 번씩 경찰에게 근황을 신고해야 한다면 그 억울함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일상이 전자발찌에 묶인 것처럼 국가의 감시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A씨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독수리 눈매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가진 그분께서 14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사신 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세 차례나 일본으로 밀항했다가 추방을 당하셨다고 하니 보통 분은 아닌 듯했다. 일본을 왔다갔다 하면서 한국에 있을 때는 기술을 익히고 자격증을 따며 미래를 준비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일본에서 추방당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일하던 어느 날 보안부대에 끌려간 뒤 ‘간첩’이 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가석방될 때까지 14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출소한 뒤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다시 간첩이 될 위험이 있다면서 법무부 장관이 보안관찰처분을 한 것이다. 보안관찰처분을 받으면 3개월마다 꼬박꼬박 경찰에 자신의 근황을 알려야 하고 이사를 가거나 국내여행이라도 가려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보안관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황당한 일은 이뿐만이 아니다.
B씨는 한국전쟁 때 이산가족이 되어 북한에 살고 있는 누나를 만나기 위해 1960년대에 북한에 다녀온 일이 있다. 그 뒤 특별한 일이 없이 20여 년간 자기 사업을 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던 B씨는 보안사령부에 연행되더니 북한을 위해 활동한 간첩으로 조작됐다. 12년간 교도소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출소했는데, 법무부는 이분에게도 다시 간첩이 될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며 보안관찰처분을 했다.
무슨 근거로 이분에게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본 것일까? 내가 모르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 기록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범행을 부인하고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의 철폐를 주장했기 때문에 또다시 간첩이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처의 수입에 의존, 인터넷 사용을 잘해서?지금 중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C씨는 한때 보안관찰 때문에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다. 수감 중에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의 폐지를 주장하고 결혼하지 않았으며 고정된 직업이나 수입이 없다는 이유로 보안관찰처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재판을 통해 보안관찰의 굴레에서 벗어난 D씨 역시 평소 보안관찰법의 폐지를 주장하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과거부터 알고 지내던 선후배들을 지속적으로 만난다는 이유로 보안관찰처분을 받았다. 2007년부터 시작된 보안관찰처분은 올해 법원에서 취소 판결을 받기까지 8년간 계속됐다. 법에서는 처분 기간을 2년으로 한정하고 있지만, 갱신 횟수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보니 D씨처럼 법무부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죽을 때까지 국가의 상시적인 감시 아래 있어야 한다. 내가 맡은 사건들만 유독 특이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을 터이다.
2002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 보고서에는 보안관찰처분의 이유들이 나오는데, 경찰에 출소 신고를 하지 않은 점, 행형 성적이 좋지 않은 점, 범죄 혐의를 부인한 점,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의 폐지를 주장한 점, 수감 중 교도소 접견 시간의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을 한 점, 수감 중 자서전을 발간한 점, 이혼 뒤 재혼하지 않은 점, 보안관찰처분 대상자들과 함께 살고 있는 점, 일정한 직업이 없어 생활이 불안정한 점, 처의 수입에 의존해 사는 점, 인터넷 사용을 잘하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들이다. 생존 자체를 재범의 위험성으로 들고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일 정도다.
국가의 사찰과 감시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보안관찰의 법적 정당성은 ‘재범의 위험성’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처럼 ‘재범의 위험성’은 허구의 개념이고 처음부터 인정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국가는 이렇게 허구의 개념을 동원해 보안관찰처분을 하고 상시적이고 노골적으로 사찰과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처분 대상자였던 어떤 분은 이를 ‘국가의 저강도 길들이기’라고 표현했다. 더욱이 밖으로 표출된 구체적인 위험이 아니라 법, 특히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에 적대적인지가 처분의 결정적 근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보안관찰처분은 또 하나의 사상 통제법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안관찰법은 사회안전법의 대체 법안으로 탄생했다. 비전향장기수를 2년마다 심사해 전향을 강요하고 이에 응하지 않으면 감옥에 가둬두던 것이 사회안전법인데, 인권침해 논란으로 1989년에 폐지되면서 구금을 대신해 상시적으로 사찰이 가능한 보안관찰법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런데 사회안전법도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사상범에 대한 ‘보호관찰령’의 보호관찰제도와 치안유지법의 예방구금제도를 고스란히 승계해 규정한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5년 5월 유신체제 강화를 위해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하고 두 달 뒤인 7월 국회 회기 만료 직전인 새벽 3시에 여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날치기로 통과시킨 법이다. 이렇게 보안관찰법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 식민지 통치와 유신체제에 맞닿아 있다.
“결백을 입증하지 않아도 되는 시민…”
경찰서에 신고하는 것이 뭐가 어려운 일이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여행을 하든 이사를 하든 일거수일투족을 신고해야 하고 경찰의 상시적인 감시를 받으며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일은 창살 없는 감옥에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얼마 전 재판을 통해 보안관찰의 굴레에서 벗어난 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저는 거창한 이념도 목표도 갖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일 뿐입니다. 저의 요구는 소박합니다. 제가 굳이 저의 ‘결백’을 입증하지 않아도 그전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 대해주는 것입니다.”
최근 문제가 된 사이버 사찰에 대한 논쟁이 무고한 시민 또는 우리 사회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매일 발가벗겨진 삶을 강요하는 보안처분의 문제도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이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이마 위로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상상해본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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