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메기로 유명한 경북 포항 구룡포의 석병리 마을에는 4∼5대에 걸쳐 사는 분이 많다. 처음 만난 할아버지가 “여기서 500년 살았어”라고 할 때 현실감이 없었는데, 만나는 분들마다 300년, 400년 살았다고 하신다.
바닷가를 끼고 있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이 마을도 1950년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인근에 빨치산이 많다는 이유로 마을 청년들을 죄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키더니, 전쟁이 발발하자 경찰들이 한날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마을 청년 9명을 잡아갔다. 마을 이곳저곳에서 부모·형제들이 마당에 쓰러져 울며 끌려간 사람들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지만, 끝내 이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들은 주검이라도 찾고 싶었으나 끌려간 사람들이 배 위에서 줄줄이 엮여 돌에 묶인 채 한 사람씩 수장됐다는 소식만 들렸다. 도대체 우리 아들이, 우리 형이 왜 죽어야 했는지, 그리고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물을 수도 없었다.
5·16 뒤 민간인 학살 유족은 용공분자로4·19 혁명이 일어나고 국회에서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진상조사를 한다며 피해 신고를 받았다. 포항에서도 피해 신고를 접수받았다. 이제야 억울한 죽음을 밝힐 수 있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5·16 군사쿠데타 세력은 진상 규명을 위해 활동한 전국양민피학살유족회를 ‘용공분자’라고 체포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제사법위원장이던 이석제 회고록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은 미국이 박정희와 김종필의 배경을 뒷조사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에 반공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보도연맹원 등 좌익사상범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전쟁 때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민간인 희생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한 유족들은 용공분자가 되었다. 실제 유족회 활동을 한 유족들이 사형이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유족들은 다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십 년이 흘러 2005년 정부 차원에서 과거사 청산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설립됐다. 진실화해위원회는 4년여의 진실 규명 작업 끝에 한국전쟁 직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부대(CIC)와 경찰, 헌병, 해군정보참모실, 공군정보처 소속 군인과 우익 청년 단원들이 보도연맹원 등을 집단학살 했다고 발표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보도연맹 집단학살 사건을 규명하면서 국가에 사과와 위령사업 지원, 역사 기록, 배·보상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유족들은 늦게나마 진실이 규명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한 대로 국가가 억울한 죽음과 유족들의 고통에 사과하고 법적으로 책임지기를 기대했다.
민간인 학살 유족들을 처음 만난 건 2008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과연 법원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할지 회의적이었다. 그 전에 경남 거창과 전남 함평의 유족들이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모두 소멸시효로 패소했다. 학살이 일어난 지 5년(1955년) 안에 소송을 제기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 역사상 처음으로 민간인 학살의 위법성을 인정하고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서울중앙지방법원이 2009년 2월10일에 선고한 울산보도연맹 사건이다. 그러나 울산보도연맹 사건도 1심에서 국가배상 판결이 난 지 6개월 만인 2009년 8월18일 항소심에서 뒤집어져 유족들이 패소했다. 그러다가 2011년 6월30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대법원이 국가의 법적 책임을 최종 인정했다. 그러니 유족들로서는 2011년 6월30일 전까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더라도 이길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고, 오히려 거창·함평의 재판을 보고 포기한 분도 많았다.
소멸시효 부당 대법 판결 뒤 전략 바꾼 국가그러나 2008년에 만난 유족들은 국가가 진상 규명을 했으니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하지 않느냐며 소송 준비를 했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인데, 소심한 변호사는 ‘소멸시효’만 이야기하며 주춤거렸다. 유족들이 소멸시효라는 거대한 장벽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전에 거창과 함평에서 유족들이 왜 졌는지, 소멸시효가 뭔지 다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국가가 진상 규명을 했으니 그에 대해 책임을 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후두암 말기 환자이면서 누구보다 열심히 소송을 준비한 한 유족은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전 이 소송, 반드시 이길 거라 믿어요.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소심한 변호사를 격려해주었다.
2008년부터 소송을 준비해 2009년에 시작했는데, 대법원이 울산보도연맹에서 국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기 전까지 국가는 소송에서 소멸시효를 주장했다. 국가배상 청구를 하기 위해서는 사건이 발생한 지 5년(1955년) 내에 소송을 제기해야 하는데, 이미 기간이 지났으니 더 이상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족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우고 유족회를 용공분자로 처벌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빨리 소송을 하지 않았느냐며 유족들을 탓하고 국가의 책임을 부인하니, 이게 무슨 국가인가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다행히 대법원이 울산보도연맹 사건에서 처음으로 국가의 소멸시효 항변이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민간인 학살에 대한 국가의 법적 책임을 인정했다. 이로써 다른 지역의 민간인 학살 유족들도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묻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가는 소송 전략을 바꿔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을 부인하기 시작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기간이 짧은데 조사 건수는 많아서 충실한 조사가 이뤄지지 못했으므로 결과를 신뢰할 수 없으니, 유족들이 다시 입증하라는 것이다.
희생자들이 어디로 끌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지 못해 50년 이상 애만 태우다가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겨우 죽음의 진상을 알게 된 유족들에게, 이제 와서 다시 희생자의 죽음을 입증하라고 하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이야기인가
석병리 마을 노인회관에 가서 할아버지들을 만나 전쟁 당시의 상황을 여쭤보았다. 하기 싫은 이야기인데 왜 자꾸 묻느냐면서도, 그날 끌려가 돌아오진 못한 9명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주검이라도 찾으면 좋으련만 석병리 마을의 희생자들은 수장돼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경남 진주 명석면 용산리 용산고개 인근에 가면 야산 밑에 커다란 컨테이너가 있다. 컨테이너를 열어보면 노란 플라스틱통이 꽉 들어차 있다. 그 통 안에는 경남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한 진주 지역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골 163구가 빼곡히 들어 있다. 안치 장소가 없어 임시로 그곳에 보관돼 있다. 컨테이너 옆에는 용산고개에서 학살당하고 버려진 유해들이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국가가 민간인을 학살하고 버린 만큼 당연히 국가가 유해를 발굴하고 그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당연한 일인데도, 국가는 유해를 발굴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에 귀를 닫고 있다.
국가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민간인 학살은 1950년에 일어난 과거만의 사건이 아니다. 국가가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고 피해자 구제나 유해 발굴을 위해 어떠한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학살은 지금도 유효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민간인 학살은 국가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자 국가의 존립에 관한 문제다. 그러기에 국가는 이 문제를 겸허히 들여다봐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살해했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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