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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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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근로시간이 14시간 40분인 이유

수많은 예외 규정을 두어 편법 만들어내는 기간제법… 기간제
를 안 쓰도록 유인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애초의 단순한 셈
을 기억하는 게 그렇게 어렵나
등록 2015-01-31 13:26 수정 2020-05-03 04:27

보람찬 직업을 꿈꾸는 여학생. 응급구조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는 소방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경마장에서 주말 동안 응급구조사로 일을 시작한다. 경마장에는 전일제로 일하는 계약직 응급구조사와 그녀처럼 주말에 충원되는 ‘시간제’ 응급구조사가 있는데, 토요일·일요일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경마장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사고를 대비해 초긴장된 상태에서 일한다. 능력 있고 싹싹한 그녀는 5개월 만에 전일제 계약직으로 근무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소방공무원 시험 문제를 고민하게 된다. 마침 정부는 ‘공공기관 비정규직 대책’이라며 상시적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고, 실제 한국마사회에서도 몇몇을 ‘업무지원직’으로 전환해주었으므로, 꼭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공공기관의 정규직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공무원 시험 대신 전일제 계약직으로 계약서를 쓰게 된다. 기간제법에 정해진 2년이 지나면 선배들처럼 업무지원직으로 전환될 것을 기대하면서.

이 계약서의 비밀을 판사님이 모르실 리가

그렇게 2년을 기간제 응급구조사로 일하고 드디어 전환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갑자기 ‘기간제 응급구조사’를 신규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게 된다. 기간제법 때문에 2년 이상은 고용할 수 없어 그녀는 퇴사해야 하고 새로 뽑는다는 것이며, 업무지원직 전환은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 정책도 바뀌어 종전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은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마장에서 응급구조사로 일한 여학생의 계약서는 시급으로 계산하는 것도 아닌데 이례적으로 근로시간과 휴식시간이 명백히 나누어져 있었다. 기간제법 내의 예외 규정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한겨레 서보미 기자

경마장에서 응급구조사로 일한 여학생의 계약서는 시급으로 계산하는 것도 아닌데 이례적으로 근로시간과 휴식시간이 명백히 나누어져 있었다. 기간제법 내의 예외 규정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한겨레 서보미 기자

그런 그녀를 상담실에서 만나 이야기만 처음 들었을 때, 부끄럽지만 “2년6개월을 기간제로 일한 셈이니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된다”고 큰소리를 쳤다. 물론 계약서를 안 본 것은 아니다. 계약서상의 ‘근로시간’이 이상하긴 했다. 아침 9시30분에 출근해서 저녁 6시20분에 퇴근해 경마장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8시간50분인데, ‘휴게시간’이 아침 30분, 점심 60분으로 무려 1시간30분이나 돼서 ‘근로시간’으로 약속된 것은 7시간20분이고, 토요일·일요일을 합쳐도 14시간40분이다. 시급으로 계산하는 것도 아닌데 이례적으로 근로시간과 휴식시간이 명백히 나누어져 있는 어색함. 이게 왜 문제냐고? 바로 기간제법 때문이다.

원래 기간제법에서는 2년 이상을 기간제로 근로하면 기간의 정함이 없는 것으로 보는데, 시행령에 수많은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그중에 15시간 미만 일하는 사람은 기간제법이 적용되지 않고, 몇 년이고 기간을 정해서 고용하다가 기간 만료로 퇴직시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이에 따르면 그녀의 계약기간은 기간제법이 적용되는 2년과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는 6개월로 나뉘는 셈이었다. 이런 걸 알고 보면 그녀의 계약서에서 근로시간을 굳이 14시간40분으로 정한 조항의 비밀이 풀린다!

삼척동자도 알 만한 이 계약서의 비밀을 판사님들이 모르실 리는 없다고 무모하게 믿으며 재판을 시작했다. 물론 이 근로시간이 유일한 쟁점은 아니었다. 근로계약의 갱신기대권이나 기간의 정함이 형해화됐다는 주장도 하고, 저 휴식시간이 사실은 대기시간이어서 아무 데도 못 가고 점심시간 1시간도 제대로 못 지킨다는 주장과 그 입증을 잊지도 않았다. 1심 재판부는 아무래도 계약서 생겨먹은 게 이상하다며 조정을 권고했다. 원고는 복직만 된다면 그동안 못 받은 임금은 다 포기할 수 있다며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마사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판결 결과는 원고 승소. 15시간 미만과 같이 예외 사유가 없는 기간만 넣어서 2년을 채우라고 한다면, 일부러 2년을 못 채우게 하려고 근로시간을 변경하는 편법을 쓸 수도 있고, 예외 사유 소멸 뒤 다시 2년을 고용했다는 것은 계속 채용할 뜻이 있다는 게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마사회가 항소를 했고, 항소심 법원부터는 예외 사유가 있는 기간은 기간제법의 2년 기준에 포함돼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 대법원에서도 그 결론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기간 짧으면 안 쓸 거라며 도입된 기간제

이것이 지난 연말 대법원 판결이 선고돼 나를 또다시 패소 단골 변호사로 낙인찍어버린 마사회 기간제 사건이다. 내용은 정말 허무할 정도로 짧았지만, 여기저기 많이 소개되는 바람에 원고 대리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지인들로부터 “어떻게 이런 소송을 지느냐”는 질책도 받았다.

무엇보다 힘든 기간을 보낸(해고 시점으로부터 근 4년 만에 받은 대법원 판결이었고, 이후 마사회가 소송 비용까지 청구해 경제적 부담까지 엄청났다) 그녀에게 면목이 없다. 진 주제에 뭐 잘했다고 구질구질한 ‘못 되면 법원 탓’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최근 정부의 비정규직 대책 때문이다.

2년을 4년으로 정하면 4년 동안 보호받을 비정규직이 더 많을 것이니, 이렇게 2년마다 잘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아니, 2년의 기간이 어떻게 법에 들어온 것인지 벌써 잊었단 말인가. 상시적·계속적인 일자리에는 아예 기간제를 못 쓰게 해야 한다는 ‘사용사유 제한’ 주장을 과도한 규제라고 거부하면서 “기간을 짧게 하면, 어차피 기업 입장에서는 웬만한 상용직에서는 기간제를 안 쓰게 된다”며 ‘기간 제한’으로 도입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짧게 정한 기간”을 이제 와서 다시 늘리겠다니. 2년마다 잘리는 사람과 2년은 너무 짧아 아예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는 사람을 비교해보니 2년마다 잘리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이 논리로, 4년으로 하면 적어도 4년마다 잘리겠으니 더 낫지 않겠느냐고 한다.

대체 그 4년은 누가 보장하는 기간인가. 4년으로 기간만 늘리면 모든 회사가 계약직 근무기간을 4년으로 늘려준다고 하던가. 불을 보듯 뻔하다. 4년은 상한일 뿐, 모든 계약은 지금처럼 1년 단위로 하고, 잘 보인 사람은 기껏해야 4번 계약을 갱신해주고 그나마 마음에 안 들면 2년이 아니라 1년만 지나고도 자를 수 있다. 정말 마음에 들어서 4년 이상 쓰고 싶은 사람은? 이 사건에서 그랬듯이 시행령에 준비된 여러 예외 조항 중 하나에 맞춰 한 6개월 쓰다가, 다시 4년 계약을 체결하면 그뿐이다. 법원은 예외 조항 소멸 전까지는 기간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다.

‘비정규직을 더 보호하는 법’이란 없다

회사에 항상 있는 일을 언제든지 ‘계약직’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완전히 신분처럼 돼버린 ‘비정규직’이라는 구분짓기로 얼마든지 써서 처리할 수 있다는 입장에 서는 한, “비정규직을 더 보호하는 법”이란 없다. 그저 사용자 입장에서 언제든 자를 수 있는 불안정한 지위의 기간만 2년으로 하는지 4년으로 하는지의 문제만 남을 뿐. 차라리 그 기간을 짧게 해서 일시적 필요가 아니면 기간제를 안 쓰도록 유인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단순한 셈, 바로 자기네들이 기간제법을 만들면서 주장했던 그 셈법을 기억하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렵나?

김진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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