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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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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뻘짓에 따른 손해액을 ‘가구’가 받아낸다면

집단소송제 등 경제적 사법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제도 개선은
감감무소식, 기업들의 불공정한 거래로 생기는 피해를 ‘대표가
구’가 소송하는 ‘가구소송’은 어떤가
등록 2015-03-06 13:42 수정 2020-05-03 04:27

한동안 ‘가구소송’ 또는 ‘가계소송’이라는 것을 추진해보고 싶은 의욕에 불타던 때가 있었다. 이를 경제적 영역에서 사법정의의 바로미터 겸 제도 개선의 촉진제로 생각한 것인데, 실현할 엄두를 못 내서 머릿속 생각으로만 두고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가구소송이라니? 이건 집단소송이나 단체소송과 같은 정식 소송제도가 아니라 한국적 상황에 맞춰서 내가 혼자 궁리해서 지어본 이름이다. 좀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말하면 ‘가구소송’이란 ‘사회적 연대를 통해 제도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일종의 비제도적인 소송’이라고나 할까? 우리나라에서 집단소송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을 때마다 번번이 ‘시기상조’니 ‘소송 남발 우려’니 하는 해묵은 반대로 도입되지 못하고 있어서 그 돌파 수단으로 생각해본 것이다.
심리적·사회적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전형적인 몇 가구가 나머지 가구를 대표해서, 불공정한 경제행위로 인해 그 가구가 입은 손해에 대한 소송을 제기해서 사회적 관심과 연대를 촉발하고, 판결을 받을 경우 판결의 효력이 다른 가구에 법률적으로 미치지는 않지만, 불공정한 경제행위를 한 대기업을 압박하거나 제도 개선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찾아내는 것보다 골라내는 게 어려울 듯

내가 그려본 시나리오는 이랬다. 우선 소송 참가 의사를 지닌 대표성이 있는 몇 가구를 선정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월급소득자 가구, 식당이나 슈퍼를 운영하는 독립 자영업자 가구, 중소기업 경영자 가구,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운영하는 가구, 실직가구, 독립가구 등 10가구 정도면 대표성을 띨 것이다. 가구 구성원도 노인, 중년, 청년, 학생, 아이 등 대표성이 있도록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가구가 ‘어, 저 집은 우리 집이랑 비슷하네’라는 생각이 들면 성공적으로 선정한 것이다.

그다음 단계부터 치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대표가구들의 소득과 지출을 분석하고, 불공정한 경제행위로 인해 가구원이 입은 구조적인 손해를 찾아낸다. 주된 지출로는 주택·자동차·가구·TV·컴퓨터·휴대전화·냉장고 같은 내구재 구매, 교복·점퍼·화장품 등 소비재 구매, 통신비·교통비·연료비·학원비·주거비·보험료·의료비·식비 등이 있을 테니, 각 부문별로 불공정한 경제행위로 인해 입은 구조적 손해를 따져본다.

‘대표가구’가 기업들의 불공정한 경제행위로 인해 입은 구조적 손해를 따져보면 얼마나 될까. 라면·우유·커피 같은 소비재 등 공정거래위원회가 불공정하다고 적발한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그 액수는 엄청날 것이다.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대표가구’가 기업들의 불공정한 경제행위로 인해 입은 구조적 손해를 따져보면 얼마나 될까. 라면·우유·커피 같은 소비재 등 공정거래위원회가 불공정하다고 적발한 것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니 그 액수는 엄청날 것이다. 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는 사람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모든 분야에서 불공정한 경제행위가 만연하니 찾아내는 것보다 골라내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중소기업을 운영하거나 자영업,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하는 대표가구라면 대기업이나 프랜차이즈 본부의 불공정한 경제행위로 인한 손해가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중요한 불공정 경제행위를 가려내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판단이 내려진 사례 중 규모가 큰 것을 우선해서 선별한다. 그동안 공정거래위원회에서 적발한 것만 해도 철강·판유리·밀가루·포장지·플라스틱 등과 같은 생산재나 원료는 물론 컴퓨터·TV·휴대전화 등 가전제품, 가구·교복·라면·우유·커피 등 소비재, 통신에서 보험료나 대출이자 등 금융부문까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우리의 세금에서 지출되는 공공부문도 예외는 아니다. 도로·철도·지하철·댐·환경시설 등 공공건설 공사에서의 담합이나 의약품 가격 부풀리기, 의료비의 부당청구 등 부지기수다. 경제 규모로는 세계 15위의 선진국이라지만, 우리나라는 유난히 재벌의 경제력 집중도가 높고 주요 재벌의 계열사들이 시장을 주도하니, 담합이나 불공정한 거래가 만연할 토양이 되고 있는 셈이다.

유럽, ‘가구들이 피해회복 받아야 한다’

그럼 이제 중요도에 따라서 손해배상을 받아낼 불공정행위를 선별한다. 이 과정을 거치면 모두 수십 건의 소송이 될 것이다. 소송의 피고는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될 것이다.

소송이 시작되면 할 일은 더 많다. 우리 대표가구들의 구매내역이나 거래내역을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각 불공정 경제행위별로 손해를 입증해야 하는데, 전문가의 감정이 필요하다. 문제는 우리의 대표가구들이 감정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국가가 소송구조를 통해 비용 보조를 해준다면 좋겠지만, 나의 불길한 예감으로는 국가가 감정비를 보조해주지 않으려고 할 것 같다. 공정거래위원회라면 도와주지 않을까? 글쎄, 제도도 미비하고, 도와주지 않을 것 같다. 유럽이나 일본, 미국 등에서는 국가나 공정거래위원회 같은 기관이 손해액 입증에 도움을 주거나, 국가나 지방정부가 소송을 제기하거나, 집단소송을 통해 효과적으로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 있다. 우리나라와 격차가 너무 크다. 특히 유럽은 최근 가구들이 효과적으로 피해 회복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에서 도와야 한다는 것을 거듭 천명하며 입법화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돈이 없어서 전문가 감정을 신청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법정에서는 ‘기업들이 담합을 했지만 소비자는 손해를 입지 않았다’는 대기업 쪽 변호사들의 궤변과, ‘손해액을 입증하지 못하면 청구를 기각해야 한다’는 주장과, 무책임한 소송이라는 재판부의 따가운 질책에 시달릴 것이다. 설마 변호사가 ‘담합을 했어도 손해가 없다’고 주장할까 싶지만, 내가 수행한 모든 담합 사건에서 기업 쪽 변호사들은 이구동성으로 그 주장을 했다. 돈이 없어서 감정을 못하면? 재판부로부터는 줄줄이 싸늘한 패소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걸 생각하면, 전문가의 감정을 제시할 수 없다면 가구소송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실제 소송을 못하더라도 가구 손해에 대한 연구만으로도 의미 있을 것이다. 불공정행위로 인한 가구당 손해액을 추정하고, 가구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계산해보면 불법적 수익이전이라는 중요한 지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계산은 아니지만(전문적인 계산이 꼭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구소득에서 불공정행위로 인한 손해 비율이 10%는 족히 넘을 것 같다. 그만큼 가구들의 가처분소득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배상되는 금액은 0원에 가깝고, 배상비율도 0%에 가깝다.

우리나라가 가구들의 손해비율이 높을 것이라고는 짐작되지만 배상비율은 그에 비해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소송제도의 불비와 법원의 엄격한 입증 요구, 이런 유형의 소송을 지원하기는커녕 백안시하는 국가의 비협조적인 태도 때문이다. 가구 손해의 회수에 대한 제도적 지원 여부를 경제적 영역에서 사법정의의 바로미터로 볼 수 있을 텐데, 그 점에서 우리나라는 아주 열악한 상태다. 손해비율은 3% 정도로 낮추고, 회수비율은 현재의 0%에서 50%는 넘도록 제도가 개선되어야 한다.

손해비율은 3%, 회수비율은 50%는 되도록

대기업만 살찌고 가구들의 가처분소득이 줄어서 점점 더 장기 불황의 깊은 늪에 빠지고 있는 한국 경제에 경제민주화는 절박한 과제다. 부자 증세나 고용 안정, 복지지출 증대 등 중요한 구조 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그러나 그 전에 불공정한 행위로 가구들로부터 부당하게 가져간 대기업들의 수익이 가구들에게 효과적으로 반환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것. 이것은 논란이 있을 수 없는 가장 기본적인 과제다.

오늘도 집단소송제 등 경제적 영역에서 사법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제도 개선은 소식 없이 늦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를 대표하는 대표가구들의 가구소송을 추진해보는 것도 분명 의미가 있으리라. 조금 더 힘을 모은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으리라.

이은우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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