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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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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의 고민도 ‘음란물’이던 그때

2002년 시작되어 2007년 대법원 패소로 끝난 ‘엑스존’ 재판… ‘차별금지법 철회’에 다시 원점에서 싸움을 시작할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등록 2013-05-11 18:12 수정 2020-05-03 04:27

얼마 전 한 기사를 읽고 황망한 생각이 들었다. 지난 4월18일 차별금지 법안을 발의한 민주통합당 김한길·최원식 의원이 법안을 철회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는 것이다. 보수 기독교계의 반대로 차별금지 법안이 철회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설마 철회까지 할까 생각했다. 동성애자들의 힘겨운 투쟁으로 국가인권위원회법이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평등권 침해의 하나로 보게 되었고, 오늘 소개할 ‘엑스존’ 사건이나 퀴어영화 사건에서 법원이 동성애라는 이유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동성애 문제가 인권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해결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수 기독교계의 반대가 있다 하여 어찌 이리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우리의 인권 수준이 그리도 낮은 것인지(우리의 인권 의식이 그리도 빈약한 것인지) 당황스러웠다.
그 순간 다시 원점에서부터 ‘동성애 차별 반대’를 외치며 싸움을 시작해야 할 친구들이 생각났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0년 8월25일, 현재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비슷한 기능을 하던 정보통신윤리위위원회가 국내에서 최초로 개설된 게이 웹사이트 엑스존을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결정한 사건이 벌어졌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2000년 9월20일 엑스존에 ‘청소년유해매체물’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하지만 어느 기관도 엑스존 운영자에게 이 결정을 알리지 않았고, 운영자는 1년이 지나서야 우연한 기회에 엑스존이 청소년유해매체물임을 알게 되었다.

2001년 7월 동성애자 차별반대 공동행동 발족식에서 탤런트 홍석천씨가 인터넷 등급제 폐지 등의 내용을 담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2001년 7월 동성애자 차별반대 공동행동 발족식에서 탤런트 홍석천씨가 인터넷 등급제 폐지 등의 내용을 담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위원장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고민과 삶을 나누는 생활 가이드

엑스존은 동성애자를 위한 생활 가이드이자, 고민과 삶을 나누는 동성애 커뮤니티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음란 사이트와는 거리가 먼, 보통의 동호회 사이트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운영자가 자신의 사이트가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결정된 사실을 확인하고 정보통신윤리위원회와 청소년보호위원회에 그 이유를 확인해보니,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제7조 때문이란다. 당시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제7조에서 청소년유해매체물의 기준을 정했는데, ‘수간을 묘사하거나 혼음, 근친상간, 동성애, 가학·피학성음란증 등 변태성행위, 매춘행위, 기타 사회 통념상 허용되지 아니한 성관계를 조장하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동성애를 사회 통념상 허용되지 아니한 성관계로 보고, 동성애 커뮤니티인 엑스존을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결정한 것이다. 그즈음 청소년보호법 시행령의 심의 기준을 근거로 생겨난 음란물 차단 프로그램에 의해 한 동성애자 인권단체 사이트가 PC방에서 차단당하는 일도 있었다.

동성애자이기도 한 운영자는 제도와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누구보다 그들의 고통을 잘 알기에 온라인에서나마 자유로운 소통을 위해 커뮤니티를 만든 그였지만, 소송을 결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 혼자 남아 싸워야 하는 지난한 과정이 될 것이고,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외부 노출까지 고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성적 지향’을 차별의 기준으로 명시하기 위해 투쟁해온 활동가들과 인터넷 검열 반대운동을 펼친 인권단체들의 지지가 그에게 큰 힘이 되어 어렵지만 역사적인 결단을 할 수 있었다. 엑스존 사건은 동성애 차별뿐만 아니라 인터넷상 표현의 자유와도 직접 관련됐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를 위해 활동해온 단체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는 동성애 차별에 따른 인권침해를 의식해서인지, 소송 제기 전에 유해매체물 결정을 취소해달라는 운영자의 요청에, 동성애 관련 정보 외에 음란성 정보가 일부 포함돼 있어 어렵다는 답변을 보냈다. 새롭게 ‘음란성’을 추가했다. 그러나 소송에서 막상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음란성을 문제 삼은 내용을 보면, ‘구강성교로 에이즈에 걸릴 수 있습니다’ ‘내가 게이인 건 운명이 아니었을까’ 등과 같이 구체적인 성행위나 음란한 내용과는 무관하고 오히려 동성애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나 고민이 대부분이었다.

2004년 4월 유해매체물에서 ‘동성애’ 삭제

처음부터 이 사건의 핵심은 ‘동성애’ 정보가 청소년에게 유해한지 여부였다. 소송 진행 중에 운영자와 동성애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동성애가 개인적·사회적으로 질병이 아니고 유해한 것도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세계보건기구·미국정신의학회·유엔인권기구가 작성한 보고서나 통계 편람 등을 증거로 제출하며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준비서면 가득히 ‘당신은 유해하지 않습니다’라는 취지의 서면을 작성하고 운영자에게 검토를 요청할 때는, 그의 상처를 다시 한번 헤집는 것 같아 미안했다.

운영자가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다른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자 차별반대 공동행동’ 연대모임을 꾸리고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개정운동을 펼쳤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아우팅될 것을 우려해 마스크를 끼고 나온 친구들도 있었지만, 길거리와 관련 정부기관 앞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로 ‘동성애 차별 반대’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개정’을 외쳤다.

판사에게 ‘고등학교 시절 동성애자는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줄 알았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19년의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 10대 동성애자의 삶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러나 2002년에 시작된 재판은 2007년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로 끝났다. 엑스존 사건을 심리한 서울고등법원은 ‘동성애를 조장하는 것’을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 기준에 포함하는 것은 위헌 또는 위법이라고 하면서도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이 무효라고 볼 만큼 위법성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소송 진행 중에 국가인권위원회는 청소년보호위원회가 청소년유해매체물의 심의 기준으로 동성애를 명시한 조항이 행복추구권, 평등권,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므로 동성애 조항을 삭제할 것을 권고했다. 청소년보호위원회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 마침내 2004년 4월 동성애 조항을 삭제했다. 소송과 인권단체들의 지원 투쟁으로 거두게 된 작지만 소중한 성과였다.

“당신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 뒤에도 동성애 논쟁은 끊임없이 일어났다. 동성애를 그린 영화 가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고,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할 때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금지 규정이 동성애 혐오주의자들과 보수 기독교계의 극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동성애 차별은 이념이나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였기에, 힘든 투쟁의 시간을 거치기는 했음에도 당연하게도 모두 인권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재판을 통해 의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은 취소됐고,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금지 규정이 담긴 서울시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됐다.

성별, 나이, 용모, 지역, 학력, 정치적 성향…. 이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차별의 구조가 깊이 뿌리내린 사회에서 차별을 감수하며 자신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대신해 차별에 맞서 싸우는 모든 동성애자 친구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하겠다는 나의 소박한 마음을 담아 이 말을 건네고 싶다. “당신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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