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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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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와 성장 강박

등록 2013-05-05 14:20 수정 2020-05-03 04:27

소설가란 사람들은 학창 시절부터 글쓰기에 두각을 나타내는 줄 알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그도 나름이다. 내 경우에는 대체로 평범했다. 어떤 부분은 평범 이하이기도 했다. 특히 목적을 가지고 써야 하는 글에 약했다. 주제가 주어지는 백일장이 그러했고, 독서감상문은 한숨만 쉬다가 페이지가 끝났다.
글쓰기는 즐거웠다. 책을 읽는 건 더 좋았다. 독서가 내게는 유일한 쉼이자 낙이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감상을 적으라면 막막했다. 어느 TV 광고에 나오는 말처럼 좋은데, 좋기는 너무 좋은데, 어떻게 뭐가 좋은지, 아 좋다, 너무 좋다 하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글로 쓰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더구나 예전의 독서감상문에는 책을 읽게 된 계기와 간단한 줄거리, 책 읽은 소감을 덧붙여 쓰는 일종의 공식이 있었다. 나는 늘 계기에서부터 글이 막혔다. 산이 있어 산을 오르는 사람들처럼 책이 있어 읽었을 뿐인데 대체 무슨 계기를 쓰라는 건지 막막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아! 하는 감탄사 하나면 충분한 것을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나는 지금도 독서감상문을 포함한 일체의 독후활동에 대한 반감이 있다. 아이를 키우면서 이런저런 사교육을 경험해보는 동안에도 독서 활동 관련 사교육에는 가까이 가본 적이 없고, 독후활동을 지도해본 적도 없다. 책이 주는 감동이란 책을 읽는 중 부지불식중에 찾아오는 떨림과 설렘, 아! 하는 감탄사 하나와 떠나지 않고 맴도는 아련함이면 충분한 것이 아닌가. 더하여 책을 덮고 난 뒤에도 내내 지워지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몇 개의 문장을 얻는다면 책으로 얻을 수 있는 충만은 충분히 얻은 것이리라 생각한다. 그 느낌을 혼자 간직하기 어려워 자발적으로 다른 무언가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책을 읽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읽은 책을 가지고 뭔가 활동을 하는 건 아무래도 주객이 전도된 듯하다. 특히 책 내용으로 퀴즈를 내는 활동은 이해하기 어렵다. 독후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들은 그런 활동이 논리력을 키우고 창의성을 높여주고 사고가 넓어지며 지적으로 풍부해지는, 나아가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게 만들어준다는데, 책 한 권을 읽고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만 든다. 책을 향한, 독서를 향한 기대는 왜 이리 자꾸 전지전능해지는 건가. 감동마저 기필코 성장을 담보로 해야 한다는 건 어딘가 서글프다.

아직 방영도 되지 않은 KBS 독서 프로그램 으로 쏟아지는 우려와 논란은 바로 그 프로그램이 표방하는 형식이 앞서 언급한 전지전능을 기대하는 독서활동의 결정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이를 위해 특정 출판사의 특정 도서를 선정한 까닭에 이것이 과거 독서 장려를 표방한 프로그램 의 경우처럼 독서 인구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독서 취향을 획일화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은 피할 도리가 없다.

강제 필독도서가 된 권장도서

개인적으로 나는 각종 단체나 기관에서 권장이나 추천의 형식으로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만들어 발표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다. 잘 팔리는 책을 소개하는 베스트셀러라는 목록이 있고, 꾸준히 잘 팔리는 책을 소개하는 스테디셀러라는 목록이 있고, 새로 출간된 책을 소개하는 신간목록이 있고, 장르별 대상별로 찾아보기 쉽게 도서분류표까지 있는데 무슨 책을 또 따로 구분해서 알리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요즘의 권장도서는 독서인증이력제의 영향으로 단순 추천이 아니라 거의 강제 필독도서나 다름없다. 독서를 장려하기 위한 제도가 오히려 폭넓은 독서를 방해하는 꼴이다. 책과 절반은 운명을 같이하고 사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의 존재도 버겁지만, 목록에 오르지 못해 독자와 만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수많은 양서들의 운명을 생각하면 쓸쓸하고 또 쓸쓸하다. 며칠 있으면 석가탄신일인데 목록에 갇혀 있는 책, 목록 밖에서 잊힌 책을 한데 모아 방생이라도 해주고 싶다. 어디에서 놓아주면 책이 비로소 책으로 존재할 수 있으려나.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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