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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이 곧 나의 시선

등록 2026-04-10 13:39 수정 2026-04-12 15:55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벚꽃이 떨어지는 계절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사랑하는 아기도 이 계절에 태어났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날 밤, 우리 부부는 동네 벚꽃길을 걸으며 어느새 다가온 미래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다렸다. 아이가 태어나 포대기에 싸인 채 내 손에 건네졌을 때 비로소 나는 그 미래를 온몸으로 실감하며 한껏 끌어안았다. 초음파 사진은 내 망막에 와닿지 못했다. 아기의 심장박동 소리도 멀게만 들렸다. 하지만 배 아래로 움틀거리던 태동, 그리고 역사적인 그날 마침내 내 살갗에 닿은 아기의 따스한 피부는 새 생명이 품은 경이로움을 더할 나위 없이 오롯이 전하고 있었다.

촉감은 이렇듯 존재를 증언한다. 시각은 속기 일쑤이며, 청각도 어렴풋하다. 이에 비해 촉각으로 경험한 세상은 실제적이며 직접적이다.

 

꽃비, 그 보드라운 증언

 

하지만 촉감도 아주 섬세하진 않다. 벚꽃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여볼까. 나는 벚꽃이 아름다운 걸 잘 모른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갔던 서울 여의도는 사방이 하얀 빛깔이었다. 하늘에도 땅에도 온통 흰 빛이 일렁였다. 그 기억만큼은 선명하다. 그런데 벚꽃이 흩날리는 장면은 뇌리에 없다. 다른 여러 잎들이 떨어지던 기억으로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그렇게 지난 40여 년을 살아왔다.

그러다가 벚꽃이 만개한 지난 주말, 장지천 언저리로 나들이를 갔다. 바람이 휘휘 불자, 함께 간 지인 가족과 아내가 탄성을 내질렀다. 연신 꽃비가 내린다며 감격에 겨워했다. 바로 그때 내 팔에도 뭔가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손끝으로 만져보려 했으나 잘 만져지지 않았다. 눈보다 더 가벼웠고, 잎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았다. 그런 작은 보드라운 것들이 피부에 살며시 닿았다가 사라졌다.

‘아, 이런 게 꽃비로구나!’ 나는 그제야 벚꽃의 존재를 감각했다. 이런 것이 수없이 바람에 날린다면 퍽 아름다울 듯싶었다. 비록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섬세하게 감상하진 못할지언정, 흩날리는 벚꽃을 입체적으로 상상할 순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올봄은 내게 진정 벚꽃의 계절이 된 셈이다. 내 생애 처음 촉감으로 느낀 벚꽃의 계절.

영어에 ‘hands-on experience'라는 표현이 있다. 직접 체험한다는 뜻인데, 글자 그대로 풀면 ‘손을 올려놓는 경험’이다. 나는 이 표현을 만날 때마다 괜히 반갑다. 세상 사람들이 비유로 쓰는 이 말이 나에겐 일상이니까. 점자를 읽을 때도, 새로운 사람과 악수할 때도, 낯선 길을 더듬을 때도 손끝이 곧 나의 시선이다. 그리고 그 시선은 때로 나를 아주 먼 곳까지 데려간다.

 

닿는 것이 있다

 

올 초, 스페인의 발렌시아 해변에 갔다. 고운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발에 채는 돌멩이도 한 개 없이 탁 트인 그곳에서 바닷바람이 내 뺨을 스쳤다. 나는 아기를 안고 달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더 세게 뺨에 와 부딪혔고, 귓가에는 아기의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메아리쳤다. 아기는 “아빠, 달려!”라고 서툰 발음으로 외쳤다. 그래서 난 더 달렸다. 달릴 수 있는 마지막 날처럼 달렸다.

서울로 돌아와 며칠이 지난 뒤에도 신발에서는 발렌시아의 모래가 조금씩 나왔다. 어찌나 고운지 좀처럼 털어지지 않았다. 애써 없애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겐 그 모래가 여행의 추억을 소환해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였으므로.

쏟아지는 뉴스와 쉴 새 없는 말의 전쟁 속에서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건 오히려 그런 작은 모래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니라,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꽃잎 한 장, 볼을 비비는 갓 태어난 아기의 뽀얀 피부 같은 것들. 있는 듯 없는 듯 한없이 가벼운 그런 것들이다. 잠시 어지러울 땐, 가만히 손끝을 세상에 내밀어보시라. 닿는 것이 있을 것이다.

 

김헌용 신명중 교사·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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