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난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운동을 좋아했다. 2002년 월드컵 키드로 자라 축구를 몹시 좋아했다. 비록 시각장애로 인해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시합하진 못했지만 틈만 나면 놀이터나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놀았다.
그 시절, 공을 차는 것만큼이나 나를 전율케 한 건 새벽에 열리는 유럽 축구 경기를 생중계로 ‘듣는’ 것이었다. 흐릿한 텔레비전 화면과 영국 비비시(BBC) 라디오 중계를 오가며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듣고 있노라면 머나먼 유럽으로 시공간 여행을 떠나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 그곳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풋풋한 꿈을 꿨다.
나이 들고 새로운 관심사가 생기면서 축구에 대한 열정은 기억의 저편으로 물러났다. 그러던 올겨울, 유럽 전통의 강호 레알 마드리드 축구클럽의 홈구장에 갈 기회가 찾아왔다. 두 돌이 돼가는 아기와 함께 우리 가족의 첫 국외 여행을 스페인으로 떠난 것이다.
우리는 현지 가이드로 일하는 지인과 함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경기장에 도착했다. 2024년 대규모 리모델링을 마친 이곳은 흡사 놀이공원 같았다. 지인의 능숙한 안내로 관광하는 동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축구 세포가 서서히 깨어났다.
그런데 관광 중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입구에서부터 현장 스태프들이 마치 우리 일행을 경호하듯 서로 무전을 치며 동선을 파악하는 듯했다. 40분 정도 관광했을까, 그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이쪽에 시각장애인이 볼 수 있는 것이 조금 있는데, 함께 가시겠어요?”
우리는 얼떨결에 그 직원을 따라 작은 소품실 같은 방으로 안내됐다. 중년 여성 직원 두 명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줬다. “지금부터 레알 마드리드와 관련된 물건 몇 가지를 만지게 해줄 거예요.”
첫 번째 물건은 현역 골키퍼가 입는 유니폼이었다. 2m에 이르는 장신 선수라 위아래로 꽤 길쭉했다. 다음으로 선수 개인용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 뒤이어 발롱도르(한 시즌 동안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남자 축구 선수에게 주는 개인상) 트로피 모형, 2024년 챔피언스리그 우승 당시 축구공 등 다양한 소품이 차례로 나왔다. 이어서 2002년 월드컵에도 뛰었던 전설의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의 장갑을 손에 끼어보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대미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신었던 축구화였다. 축구화에는 양각으로 호날두를 상징하는 ‘CR7'이 새겨져 있었다.
지인도 여러 차례 가이드를 해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했다. 돌이켜보니 입구에서 흰 지팡이를 든 내 모습을 본 직원이 무전으로 연락했고, 우리 동선을 파악해 투어 막바지에 자연스럽게 안내한 것이 분명했다. 사전 예약도, 별도의 요청도 없었다. 이것이 준비된 프로그램인지, 매뉴얼에 따른 건지도 알 도리가 없었다. 형식적 느낌이 전혀 없어 그저 시각장애 관람객에 대한 자연스러운 배려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도 장애인 편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복잡한 사전 신청 절차를 요구하거나, 막상 현장에 가면 “담당자가 없어서”라는 말만 돌아올 때가 많다. 철두철미하게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움직이거나, 아예 없거나.
그날 레알 마드리드에서 받은 환대가 과연 잘 짜인 시스템의 결과인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점은, 그 즉흥에 가까운 경험이 눈물겹도록 반가웠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꿈꾸던 유럽 축구장에서 나는 경기를 직관하진 못했다. 하지만 손끝으로 전설을 만졌고, 무엇보다 한 명의 관람객으로서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잘 정돈된 서비스보다 사람 냄새 나는 그 환대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김헌용 신명중 교사·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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