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레이션 슬로우어스
야구를 직관하는 사람들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여럿이서 온 사람과 혼자 온 사람, 먹을 것을 ‘구븨구븨’ 펴놓은 사람과 별다른 걸 먹지 않는 사람, 목 놓아 응원하는 사람과 그라운드만 노려보는 사람, 승산 없는 경기에 일찍 자리를 뜨는 사람과 오래오래 욕하며 보는 사람…. 말하자면 나는 줄곧 후자다. 이들은 대체로 멀티태스킹이 잘 안 되며, 매사에 요령부득이라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전자나 후자나 자신만의 리듬대로 야구를 즐기는 것임은 틀림없다.
야구 시즌이 돌아왔다. 2026년 3월21일 열린 케이비오(KBO) 리그 시범경기는 전국적으로 역대 최다 관중을 기록했다. 나는 그날 야구장을 찾은 8만여 명 중 한 명이었다. 경남 창원 출신인 나는 엔씨(NC) 팬으로서, 수원 케이티(KT) 위즈파크에서 열린 케이티 위즈와 엔씨 다이노스의 경기를 보러 갔다. 원정팀 더그아웃이 있는 3루 응원석에 홀로 앉아 예의 그 그라운드를 쏘아봤다.
시즌 개막 직전 테스트 성격을 갖는 시범경기는 특유의 소박함이 있다. 본디는 사운드가 웅장한 가요의 어쿠스틱 버전 같달까. 홈팀인 케이티 응원석에서야 빵빵한 앰프에서 응원가가 터져 나오지만, 응원단도 앰프도 없는 원정팀 팬들의 3루 언저리는 가만가만하다. 바로 그 점 때문에 태생이 ‘I’(엠비티아이(MBTI)상 ‘내향형’)인 나는 시범경기를 더욱 사랑한다. 조용한 가운데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경기장 면면이 더욱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베이스 근처에서 팔을 풍차처럼 돌리는 주루코치와 쉴 새 없이 볼을 주워 나르는 볼보이의 움직임 같은 것들. 이날 경기에선 딱 한 번 에이비에스(ABS·자동투구판정시스템)가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주심이 볼을 직접 판독하기도 했다. 아, 맞다. 야구장엔 심판도 있었지.
얼마 전 읽은 김유원의 소설 ‘심판이라는 돌’에는 ‘돌’이 되어버린 야구 심판 홍식이 나온다. 가을야구에 앞서 순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경기에서 홍식은 정강이에 공을 맞고 쓰러진다. 홍식의 아픔에는 아랑곳없이 주자는 달리고, 야구장이 떠나갈 듯한 환호가 터져 나온다. 야구 규칙상 내야수를 지난 위치에서 타구가 심판의 몸에 맞은 경우, 심판을 일종의 기물로 취급해 경기는 그대로 진행된다. 되레 몸에 맞아 굴절된 공 때문에 패배한 팀의 팬들은 홍식에게 야유를 퍼붓는다.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심판으로서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돌’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심판 홍식은 ABS와의 대결에 기꺼이 참전한다.
ABS 시대에 돌이 되어버린 홍식을 되새기며, 인공지능(AI)과 로봇으로 대체한 야구장을 상상해본다. 이날 멋진 슬라이딩 캐치를 선보였던 엔씨 중견수 최정원은 바로 다음 이닝에서 팀의 첫 안타를 쳤다. 시종일관 케이티에 끌려가던 엔씨에는 ‘가뭄의 단비’이자 ‘호수비 뒤 안타’라는 야구 공식에 걸맞은 안타였다. 그러나 그는, 곧 무리하게 도루를 시도하다 주루사했다. 호수비 뒤 안타 뒤 주루사. 이것이 바로 야구의 희로애락이자 새옹지마이다. 그런데 만약 그게 로봇의 일이라 해도 관중은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을까. 애당초 ‘희로애락’이란 말 자체가 인간의 감정을 함축한 것이 아니었던가.
뭇사람은 야구팬들이 승패에만 집착하는 줄 안다. 엄밀히 말하면 승패에 집착하는 것은 맞지만, 승패에만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땡볕 아래서도, 점수 차가 일찌감치 벌어진 경기에서 질 줄 알면서도 목 놓아 응원가를 부르고 두고두고 욕하며 앉아 있는 것이다. 이날은 케이티 안현민의 인플레이 타구를 볼보이가 잡아버리는 바람에 2루타로 기록되기도 했는데, 심판이 파울 선언을 했다가 번복하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인간적으로’ 이해했다. ‘시범’경기여서 넉넉한 마음이었던 것도 맞지만, 그보다는 야구가 만드는 인간적인 분위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분위기에 집착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영역이라 하면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생각일까.
이슬기 칼럼니스트·‘우리는 우리가 놀랍지 않다’ 저자
*여성의 눈으로 세상의 행간을 읽고 쓰는 일에 관심이 많은 기자 출신 이슬기 칼럼니스트가 ‘노 땡큐!’ 필진으로 합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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