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자동차 이창근씨의 ‘해고 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그는 쌍용차 해고자로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을 맡았고, 희망버스 기획단 대변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지금은 쌍용차 해고자 가족의 심리치료 프로젝트 ‘와락’의 기획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19명을 가슴에 묻은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내밀한 시선으로 때로는 솔직하게, 가끔은 담담하게 하려고 합니다. 첫 글은 영하 10℃의 추위도 녹이는 연대의 열기가 뜨거운 경기도 평택 쌍용차 희망텐트에서 시작합니다. 이 연재가 쌍용차 노동자들이 서로를 껴안는 ‘와락 일기’, 쌍용차만큼 힘겨운 장기 투쟁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담은 ‘와락 일기’, 복직으로 이어지는 ‘희망 일기’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_편집자
#장면1
2000년 인천 부평 대우자동차 공장 정문. 끝없이 눈 내리는 대우차 공장 안. 김일섭 대우자동차 노조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하며 연신 회견문에 쌓인 눈을 턴다. 눈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1761명의 정리해고 반대를 분명히 했다. 이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부평 산곡성당을 중심으로 투쟁을 이어갔고, 결국 순차적으로 공장 복귀를 이뤄냈다. 당시 노조는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명징한 구호를 걸고 싸웠으며 사회적 공감과 반향을 일으켰다.
#장면2
12년이 흐른 2011년 12월23일 당시 위원장이던 김일섭은 쌍용차 정문에 있었다. 밤늦은 시간, 12년 전처럼 눈은 폭우처럼 쏟아졌다. 마음이 아파서일까. 술에 취한 김 전 위원장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이내 풀썩 주저앉는다. 그리고 잠이 든다. 눈과 함께 온몸이 차갑게 식어간다. 김 전 위원장의 동생은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 김남섭이다. 형제는 그렇게 변화된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은 눈을 맞고 있었다.
숫자만큼 구구절절 기막힌 사연들
형제자매, 처남·매부, 부모 등 쌍용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는 말 그대로 ‘있을 수 있는 경우의 수의 더할 수 없는 파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리해고 159명, 징계해고 44명, 징계자 72명, 비정규직 노동자 19명, 그리고 무급휴직자 461명이라는 숫자가 있지 아니한가. 여기에 희망퇴직이란 이름으로 2405명이 유령처럼 존재한다.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왕래 않는 가족들, 숨죽이며 집 밖을 나오지 않는 조합원들, 학교에서 직장에서 쌍용차 트라우마는 아직 살아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제야 비로소 트라우마의 실체를 조금씩 확인하고 알아간다는 정도일 것이다. 변화된 것은 구매력의 일시적 중단일 뿐인데, 전방위적으로 삶과 생활이 파괴되고 복구의 시간도 더디게 간다. 우리는 우리 삶을 가꿀 수 없는 것일까. 우리끼리 새로운 관계를 맺어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건 불가능한 것인가. 아니, 공동체적 삶에 대해 우리가 교육한 기억은 존재하는 것인가를 묻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
긴병에 효자 없고, 장기 투쟁에 동지 없다?
장기 투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동지들 간의 다툼과 이견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전망이 불투명할수록 주변 동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곱게 보일 리 없다. 특히 생존권 다툼을 하는 마당에는 더욱 그렇다. 작은 차이는 어느 순간 결정적 이견으로, 가벼운 논의는 때론 치열한 논쟁으로 비화되기 일쑤다. 결국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 것인가를 가끔 잊게 되고 현실에 집착해, 그것을 핑곗거리 삼아 투쟁대오에서 멀어진다. 이런 과정은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고 지금도 여전하다. 그래서 떨어져나간 동료는 결국 우리 편으로 남은 것일까? 아니, 우리에게 호의는 있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투쟁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동지를 만드는가, 적을 만드는가. 머리속에 옹이처럼 박혀 있는 생각이다. 부속이 빠진 채 힘없이 굴러가는 수레바퀴로는 전진을 약속할 수 없지 않은가.
소외되고 말 못하는 사람들, 희망퇴직자
희망버스로 대표되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이 일정한 성과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타결 소식이 임박해오면서 나는 또 다른 걱정거리 하나가 생겼다. 바로 희망퇴직자들에 대한 고민이다. 일찍이 투쟁을 포기하고 대열에서 이탈한 사람들, 어떤 이는 비겁자라는 낙인을 찍고 또 어떤 이는 ‘떠날 사람 떠났다’고 말하는 이들. 희망퇴직자는 어느 편에도 설 수 없는, 정리해고 투쟁에서 철저히 경계인의 위치에서, 쏟아지는 비난과 냉대의 스트레스 폭우를 감당해야 했다. 19명이 자살하거나 돌연사한 쌍용차 노동자 가운데 자살은 대부분 희망퇴직자들의 몫이었다는 끔찍한 현실은 이들에 대한 대책이 시급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희망퇴직자들은 한겨울 응달에서 아직도 녹지 않은 눈처럼 한곳에 소복이 쌓여 있다.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유효한가!
이야기를 돌려보자.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는 여전히 유효한가. 이 구호에 뭔가 빠진 것은 없는가. 지불 능력이 있는 회사로의 복귀, 회사적 안전망이 존재하는 공장 담벼락 안으로의 귀환이라는 좁은 의미라면, 이는 한참 잘못된 건 아닌가. 해고가 일상인 사회에서, 청년실업으로 자살이 줄을 잇는 대한민국에서 ‘함께 살자’는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공장으로 복귀하자는 것은 자신의 생존권만의 의미인 건 아닌가. 물론 이해되고 절박하다. 부당한 정리해고, 폭력과 구속, 삶을 옥죄는 손해배상·가압류와 함께 이어진 고통의 시간, 돌이킬 수 없는 해고의 기간을 생각하면 공장으로의 복귀만으로도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가. 그러나 해고는 사회적으로 순환되고 있으며 세계경제 불황의 늪은 단기간 고용의 안정적 일자리를 회복할 수 없음이 여러 지표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지역과 내 삶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닌가. 매번 해고 투쟁을 반복할 순 없지 않은가. 해고는 살인임과 동시에 일상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지향하는 실험, 희망텐트촌
쌍용차 희망텐트촌은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다. 함께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아무런 관련 없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삶과 투쟁의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시각이어야 한다.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회사의 지불 능력에 따라 생활의 윤택함이 달라지는 노동자들의 처지가 여전히 결정되는 구조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벼랑 끝에서 삶을 즐기는 위험천만함과 무엇이 다른가. 토대를 바꾸고 기반공사를 다시 해야 한다. 그것이 해고 기간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사회적 숙제는 아닐는지.
풍부화된 인간으로 공장으로 돌아가자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6월의 어느 날, 동지들의 숙소인 한진중공업 생활관에 들어간 적이 있다. 쌍용차에서도 경험한 바 있지만 투쟁의 경과에 따라 노동자들의 분노 ‘게이지’도 올라가는 법, 웬만한 벽엔 구호와 욕설이 그림처럼 새겨져 있었다. 욕설이 주를 이룬 벽을 한참 동안 보면서, 우리의 분노가 욕설로밖에 표현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최고경영자에 대한 육두문자는 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론 허전했고 답답했다. 치명적인 욕은 없는 것일까, 자본의 본질을 폭로하고 공감으로 이끄는 욕설과 구호는 과연 없는 것일까. 우리 노동자들은 언어를 벼리는 것과는 별개로 투쟁만 하면 되는 것일까. 또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투쟁하는 동지들에겐 무리인가, 하는 생각을 가졌다.
노동자, 인문학과 만나야 한다
투쟁하는 노동자는 자본의 치부와 비밀을 가장 많이 아는 학자이며, 니체의 말처럼 철학은 망치로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철학자다. 이 학자와 철학자가 만약 인문학을 만난다면 훨씬 풍부한 인간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직시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늘 가진다. 공부와 투쟁을 병행하는 노동자, 이것만이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동운동, 나아가 사회운동에서의 노동자들의 자기 역할일 것이다. 매번 안쓰럽고 연대 대상이 아닌 사회의 주역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해고노동자들의 절박한 자기 역할이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해고노동자인 우리, 게으를 권리, 공부할 권리, 놀 권리를 주장하기엔 삶과 생활이 너무 팍팍한 것인가.
이창근 전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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