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뎃잠을 자는 해고자에게 여름이 겨울보다 훨씬 낫다. 비를 피할 수 있고 전경보다 무섭다는 모기만 물리칠 수 있다면 어디서든 잠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느 때처럼 서울 대한문 분향소에서 잠을 자던 중 가위에 눌려 눈뜬 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22명의 영정이 모셔진 분향소는 밤에 혼자 있기 두려울 때가 있다. 그날도 둘이선가 늦게 잠을 청했는데 느닷없이 얼마 전 사망한 동기 녀석이 그야말로 꿈처럼 나타났다.
청문회가 끝나면 전화번호 지울 수 있을까
이른바 ‘산 자’로 분류돼 얼마 전까지 공장에서 일하는 줄 알았던 녀석이다. 사망 소식을 접하고 사정을 물어보니 1년 전부터 암 투병 중이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얼굴암에 걸렸고 1년간 병가를 냈는데 장기 요양이 필요해 연장을 요청했지만 회사는 거부했다. 결국 퇴사를 했고, 나 홀로 병마와 싸웠다는 사실을 사망한 이후에 알았다. 입사 동기 50명 가운데 죽은 이는 그 말고도 더 있다. 한 녀석이 희망퇴직 뒤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것이다. 산 자나 죽은 자나 온전하게 살아가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음은 매한가지다. 지난해 쌍용자동차 회사가 실시한 건강검진에서 암 판정을 받은 이가 10명이 넘었다고 한다. 멀쩡하던 자동차 공장에서 암이라니. 이것도 2009년 파업과 관련 있을까 의구심을 갖던 차에 아직 젊다고 해야 할 동기 녀석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이다. 쌍용차 문제는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보더라도 끔찍하지만 이제부터 드러날 부분 또한 앞선 고통에 비해 작을 것 같지 않다. 쌍용차 국회 청문회가 이런 속사정을 모두 파헤쳐 보여줄 수 있을까.
쌍용차 청문회가 9월20일 열린다. 열릴 것 같지 않던 청문회가 드디어 열리는 것이다. 기다렸던 청문회지만 정작 걱정이 앞선다. 하루 청문회로 3년간의 응어리가 다 풀릴 수 있을지. 동지 22명의 억울한 죽음이 조금이라도 신원될 수 있을지. 이런 생각에 잠을 설칠 때가 많은데 그런 다음날엔 어김없이 어깨가 무겁고 머리가 뜨거울 정도로 두통에 시달린다. 회사라면 이가 갈리지만 만남의 설렘도 있다. 3년 전보다 조금은 달라져 있지 않을까, 기대도 있다. 그래도 사람이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버릴 수 없다. 무엇보다 나와 내 동료와 죽어간 동지들의 운명이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해고되고 날품팔이 하청 떠돌이 인생으로 살아가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얼마인가. 철없던 시절 뭣 모르고 새긴 문신 감추듯, 쌍용차 출신임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또 얼마인가. 이들은 쌍용차 국회 청문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난번 상갓집에서 만난 회망퇴직자는 쌍용차 이야기가 나오면 텔레비전을 끈다고 했다. 이번 청문회를 지켜볼 수많은 시청자 가운데 쌍용차 해고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보고 싶지 않은 기억, 떠올리기 싫은 장면이 아프게 머리를 헤집을 테니까.
강원도에서 덤프 일을 하는 무급자 친구에게 전화 한 통을 걸었다. 안부가 궁금했고, 제수씨가 약하지만 우울 증세를 보이고 있어 걱정되던 참이었다. 잘 살고 있다는 힘없는 대답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청문회가 지닌 한계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까. 청문회를 통해 상황이 좀 나아질 수 있을 거란 얘긴 끝내 아무도 꺼내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발신 목록에 남아 있는 친구의 이름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22명의 사망 소식이 차곡차곡 쌓인 전화기. 사망한 이들의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전화기의 액정이 검게 변할 때까지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삭제하지 않은 번호가 아직 여럿 있는데 조금만 더 참아보기로 했다. 지우더라도 청문회를 끝낸 뒤에 하고 싶었다. 3년간이나 함께한 번호며 이름이 아니던가. 이 알량한 고집이 어디서 오는 건지 나 자신도 헤아릴 수 없지만 아무튼 남겨뒀다. 어쩌면 이들이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고 있다는 허튼 생각을 하며.
혼자 1년 싸운 친구, 네 아이의 아버지
정신병원에서 2년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다. 파업 중간에 회사의 회유로 공장을 나선 이후 급격히 상태가 나빠졌고 결국 정신병원까지 가는 사달이 벌어진 것이다. 이 친구는 파업 과정에서 발생한 이혼으로 삶에 금이 갔고 결국 금은 점점 더 벌어져 삶을 두 동강 냈다. 파업 이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고 나 홀로 파업을 수행한 사람. 노트북과 망원경으로 밖을 감시하고 식량을 쟁여두고 살았다. 경찰병력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회사의 움직임도 꼼꼼하게 살폈다. 쌍용차 진압 장면을 수도 없이 보며 다시 전술을 세우고 전략을 짰다. 계획을 세우는 일이 어려웠기 때문일까. 밥을 밥 먹듯 굶었다. 아무도 모른 채 갇힌 공간에서 1년 동안 싸움과 파업을 진행한 것이다. 그의 형은 지금 해고에 맞선 투쟁을 하고 있고, 팔순 노모는 두 아들의 뒷바라지로 기우뚱한 삶을 헛헛하게 살아간다.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것을 두고 의지 박약이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공권력의 맹렬한 탄압과 스티로폼을 녹인 최루액의 지독함이 회사의 회유와 협박에는 없었다고 누가 주장할 수 있을까.
네 아이의 아빠인 해고자도 있다. 오랫동안 격투기 운동을 한 사람으로 보일 만큼 다부진 체구와 강단진 말투의 소유자다. 그는 설움의 비정규직 투쟁을 이끌고 있는 비정규직 투쟁 3년차의 노동자다. 쌍용차 투쟁을 이른바 ‘77일 투쟁’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기록이다. ‘86일 투쟁’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 쌍용차 공장의 굴뚝 농성은 파업하기 전에 시작된다. 정규직·비정규직 공동 투쟁의 상징으로 쌍용차 굴뚝 농성은 자리잡았다. 그러나 파업이 끝난 현재 함께 굴뚝에 올랐던 정규직 노동자 둘은 투쟁하지 않고, 유일하게 투쟁을 계속하는 이가 비정규직 노동자다. 얼마 전 쌍용차 심리치유센터 ‘와락’에선 재능기부로 노후된 집을 리모델링한 바 있다. 당시 이 비정규직 노동자 집의 리모델링을 담당한 이는 방문 뒤 “도저히 리모델링이 불가능하다”는 1차 판정을 내렸다. 결국 어찌어찌해 깨끗하게 리모델링을 했지만 여전히 집안 형편은 옹색하다. 그럼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직 복직은 물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오늘도 우직하게 투쟁을 이어간다. 언제나 쌍용차 정규직 노동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러나 2008년 말 숱한 어려움을 헤치고 비정규직 노조를 결성했던 당시의 의지는 오늘도 변함없다. 아이가 넷이란 건 의지의 낙관이 아닐까. 현실이 아닌 미래를 보고 싸우는 삶의 밝음이 아닐까. 이들의 문제는 청문회에서 어떻게 다뤄질 것인가.
희망 번데기는 부화돼 날고 싶다
쌍용차 청문회에서 밝혀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회계 조작에 의한 강제적 정리해고를 규명하고 회계 조작에 가담한 회계 법인과 경영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살인적 진압을 지휘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도 처벌해야 한다. 쌍용차 희생자 22명의 명예회복과 그 대책도 빼놓을 수 없다. 사회 안전망이 없는 한국에서 해고는 살인임이 이미 증명되지 않았는가. 해고의 바다에서 지난 3년간 조난 신호를 보낸 이들에게 한국 사회와 국회는 어떤 구조의 손길과 대책을 만들고 내놓을 것인가. 한겨울 침낭 속에서 희망을 꿈꿨던 희망 번데기들은 아직 부화돼 날지 못하고 있다.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길어도 인간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결 좋은 해고 나이테를 만들어가는 해고자들에게 청문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청문회를 넘어 국정조사로 나아가야 쌍용차 본질과 조우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러나 오히려 현실은 반대로 흐르는 편이다. 청문회를 바라보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은 또 다른 희망고문을 당하며 속이 바싹바싹 타들어간다.
쌍용차 해고자·트위터 @nomadchang*‘이창근의 해고 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