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재판정에서 문득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비정규직 노동자의 불법 파견에 관련된 재판이었는데, 제가 증인으로 나갔거든요. 증언을 준비하려고 입사한 때부터 지금까지 지난 시간을 기억해내고 장면들을 떠올려야 했어요. 재판정 증언대에서 선서를 한 뒤 답변을 하다 보니 제 기억과 실제 기록 사이에 차이가 있더군요. 해고된 지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러면 어떡하나 싶었네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었어요. 연도가 정확하지 않아 한참 동안 곰곰이 돌이켜보았는데, 형이 5월까지 두꺼운 겨울 작업복을 입고 다녔던 모습이 떠오른 거예요. 왜 그렇게 미련하게 더운 작업복을 입느냐는 제 말에 야간에는 춥다고 대답하며 계면쩍게 웃던 형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지요. 그래요, 형은 왜 그렇게 두꺼운 작업복을 5월까지 입고 일했을까, 정말 궁금해졌어요. 지금도 그 작업복을 입고 계신지도 궁금하군요. 그래서 형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지금 쌍용차 노조를 보며 떠올리는 형의 쓴소리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지도 벌써 3년이 지났네요. 아, 미안해요. 계산이 철저한 형이었죠? 3년하고도 석 달이 정확하겠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형수님 건강하시고 아이들은 잘 크고 있는지 궁금해요. 한번 찾아뵙는다면서도 여태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치고는 3년이란 시간이 꽤 길었네요. 형도 알다시피 저는 계속 노조 일을 하며 살아요. 4살이던 주강이도 벌써 7살이고요. 아내는 계속 요가를 합니다. 형이 매번 제수씨라 부르던 아내는 흰머리가 많이 늘었어요. 형수님은 어떠신가요. 여전히 아름다우시죠. 늘 형수님 자랑을 하던 형 얼굴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납니다. 팔불출이란 소리를 들으면서도 형은 끝까지 형수님 자랑을 했죠. 처음엔 늦장가 가서 그런가 싶기도 했는데 형수님 대하는 걸 보니 많이 사랑하셨던 것 같아요. 고된 야간일을 마치고 아이 데리고 병원 가는 일부터 콩나물·두부 사고 설거지와 밥까지 하는 모습은 저와 많이 비교됐던 것 같아요. 지금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제가 노조 간부가 됐을 때 축하해주던 형이 생각나요. 형이 추궁했었지요? 중국 상하이자동차가 쌍용차를 인수하며 약속했던 투자를 차일피일 미룰 때 노조는 도대체 뭣들 하느냐고. 노조 간부들 하는 짓을 보면 조합비가 아까울 때가 많다고도 했고요. 전 그 때 형처럼 조합원이었지만 뜨끔했어요. 이른바 노동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이었기 때문이죠. 저라고 당시 노조에 대해 답답한 구석이 왜 없었겠어요. 그래도 형이랑 맞장구치며 누워 침 뱉을 순 없어서 이런저런 사정이 있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형 말이 맞았네요. 형 같은 현장 노동자의 쓴 목소리가 노동조합에 직접 닿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쌍용차 공장 안에 어용노조가 생긴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가 2009년 쌍용차 공장 점거 파업을 한 이유는 회계 조작에 이은 강제적 정리해고를 막아내고 조합원의 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해서였죠. 그건 노동조합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지금 공장 안 어용노조는 회사와 한통속이 돼 조합원들을 기만하고 노동강도를 부추기는 마름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잖아요. 노조의 이름을 팔며 노조의 존재 이유를 배반하고 있다고나 할까요? 노조를 향한 형의 질책이 필요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 그 역할을 하고 계시죠? 그러실 거라 믿어요.
‘와락’부터 국회 모임까지 이어진 연대
해고자 문제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고요. 형이 잘 알고 있듯이 우리는 4월5일부터 서울 대한문과 공장 앞, 그리고 평택역에 천막을 치고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한 농성을 이어가고 있어요. 지난 7월10일엔 쌍용차 회계 조작과 그것에 빌미를 둔 정리해고 문제가 KBS 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다뤄졌어요. 3년 동안 줄기차게 외쳤던 우리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공중파를 탄 것이죠. 상세하게 다루지 않아 아쉬웠지만 조금씩 진실이 밝혀지고 있어요. 형이 답답하게 생각하던 부분이 이제 조금씩 풀려나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공지영 작가라고 아시죠. 왜 형이 틈틈이 읽던 소설을 쓴 작가 말이에요. 예, 그분이 쌍용차 사태의 진실을 알리는 최초의 르포 라는 책을 발간해요. 에 담긴 뜻을 짐작하시겠어요? 의자가 하나씩 줄어들어 앉을 의자가 없는 사람이 하나씩 쫓겨나는…. 책이 8월6일 나오는데 형에게 제일 먼저 선물할게요. 아이들이 많이 컸을 테니 가족과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합니다. 국회에서도 작은 변화가 있어요. ‘쌍용차 문제해결을 위한 의원단모임’이 구성돼 활동하고 있어요. 그런데 환경노동위원회 쌍용차 소위 구성을 새누리당이 반대하는 바람에 난항을 겪고 있어요. 집권 여당과 이명박 정부가 쌍용차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그래도 우리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아요. 쌍용차 문제 해결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연대하기 때문이에요.
아이들 ‘와락’에 한번 데리고 놀러오세요. 많은 매체에서 다뤄서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쌍용차 ‘와락’이란 곳이 있어요. 어른들 심리치유는 물론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도 좋은 곳이에요. 부담 갖지 마시고 형수님과 함께 와요. ‘와락’은 해고자나 무급자, 희망퇴직자, 공장 안 근무자까지 누구나 올 수 있어요. 참, 형 이가 안 좋았죠. 이참에 치과 치료 한번 해요. ‘와락’에서 매월 한 번씩 건강치과의사협회 분들이 와서 정기 진료를 해주고 있어요. 형도 치료받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엔 ‘와락’에서 영수를 만났어요. 3년 만이었죠. 사는 게 무척 힘들어 보였어요.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나누다 보니 형 생각도 나데요. 해고자들 어찌 사나 싶겠지만 서로 서로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 너무 짠하게만 보지 말아요.
상균이 형 이제 나옵니다. ‘벌써 3년이 지났구나’ 생각하시겠죠. 밖에 있는 시간과 감옥 안의 시간은 흘러가는 속도가 다른 것 같아요. 저도 6개월 동안 감옥에서 살다 나왔지만 3년은 너무 가혹합니다. 태어나면서 각자의 지게는 타고난다지만 한 사람에게 너무 큰 지게를 지운 것 같아요. 한상균 지부장이 구속된 뒤 면회 한번 못 갔다고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한 지부장은 형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8월4일 밤 12시에 화성교도소에서 출소하는데 그 자리에 함께 못하는 사정도 이해해요.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은 형의 마음을 우리는 알고 있어요. 이참에 형이 있는 그곳으로 우리가 못 가는 마음도 조금은 이해해줘요. 형에게 처음 쓰는 편지여서 좀 어색하네요. 마음속으로는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글로 옮기려니 무척 어렵네요. 어떻게 마무리 인사를 해야 할지도 엄두가 나지 않고요.
울지 않고 싸울게요, 형
저녁이면 별빛 되어 찾아오고 아침이면 사라지는 형을 보며 오늘도 살아갑니다. 사람이 죽어 별이 된다는 말을 언젠가부터 믿기 시작했어요. 대한문 앞에서 검은 얼굴로 늘 제 곁에 있어주는 형을 통해 힘을 내고 싸울 용기를 얻어요. 형의 온전한 하나의 세계를 지켜주지 못해 너무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 이제는 하지 않을게요. 쌍용차 노동자들이 2009년부터 겪고 있는 탄압과 수모를 오롯이 되돌려주는 날까지 울지 않고 싸우렵니다. 언젠가부터 익명화된 형을 보며 마음에 돌덩이 하나 매달고 살아가요. 이 사회가 쌍용차 스물두 분에 대해 기록하고 기억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그때 그곳에 있었음을, 형이 그곳에 함께했음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겁니다.
마침 밤하늘에 인섭 별이 빛나고 있네요. 아직도 두꺼운 겨울 작업복은 입고 있나요. 이제는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어요. 더운 여름이잖아요. 잘 있어요, 형.
쌍용차 두 번째 희생자 엄인섭을 사랑하는 동생 창근이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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