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동국대 학생들을 우연한 기회에 만난 적이 있다. 교육을 상품화하는 학과 구조조정에 반대해 총장실 점거투쟁을 한 이들치곤 첫인상이 착하고 앳돼 보였다. 이리도 착한 학생들이 총장실 점거투쟁을 했다니 조금은 의아할 정도로 밝고 명랑했다. 학생들을 만난 이유는 총장실 점거 과정에서 학교 직원들에게 무수한 폭언과 폭력을 겪고 심각한 트라우마를 지녔기 때문이다. 정혜신 신경정신과 의사가 이들을 심리치유했고, 나와 쌍용차 노동자 몇몇이 치료 과정에 참관했다. 처음 학생들은 수줍어서인지 말을 빙빙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속내를 꺼내고 토해내며 얼굴은 일그러짐을 반복했고, 손과 발은 불안정하게 떨렸다. 저 분노와 불안의 떨림을 지니고 지금까지 태연한 척 살고 있었구나…, 쌍용차 노동자처럼.
폭력 권하는 사회의 폭력적 공권력
학생들은 교직원에 대한 분노가 치민다며 한편으론 이해된다는 두 갈래 마음을 얘기했다. “교직원들도 다 먹고살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느냐”는 말엔 충분히 공감되면서도 의문이 생겼다. 왜 늘 피해자만 가해자를 이해하려 드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속 편하기 때문인가. 압도적인 폭력을 경험한 이들의 공통점치곤 아팠다. 쌍용차 해고자들도 자주 반복하던 저런 말을 이해하면서도 부아가 치밀었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이런 마음을 눈치채지도 못하는데, 아니 이들의 고통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데 말이다.
일제강점기에 지주가 시켜 농장이나 소작지를 관리하던 사람을 ‘마름’이라 한다. 노동 현장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용어인 마름은 중간관리자 혹은 경영진의 충견 노릇을 하는 사람을 속칭한다. 이 마름들이 갈수록 흉포하게 변한 것을 넘어 최근 도를 넘었다. 고압적인 태도는 기본이며 폭력과 탄압을 위한 수단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자본의 충견으로 재벌의 곳간을 지키는 이 마름을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의 밥벌이 때문에 노동자를 탄압할 수밖에 없다고, 어쩔 수 없는 위치로만 이해한다면 한가할 소리일 뿐이다. ‘토사구팽’당할 것이라거나 ‘너네도 곧 당할 것이다’는 저주를 퍼부어도 그들의 심장엔 닿지 않는다. 이들은 왜 흉포해지는 길을 앞다퉈 개척하는 것인가. 정혜신 선생님은 이에 대해 “탄압의 당사자가 그것을 자기 신념으로 최면 걸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 최면에 스스로를 가두는 걸까. 이들도 파편화되는 신자유주의의 피해자일 뿐인가. 이것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들이 흉포해지는 것은 사회 전반에 걸친 폭력의 그림자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작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가 중요하다.
‘국가 공권력’이 폭력의 씨앗을 사회 곳곳에 뿌리고 부채질한다. 경찰청은 최근 3년간 모범 수사 사례를 발표하며 2009년 쌍용차 진압을 우수 사례로 선정했다. 노동자 21명이 죽고 1만여 명의 가족들에게 고통과 상흔의 고름으로 남은 쌍용차 진압을 우수 사례라 칭찬한 것이다. 이 자료가 일선 경찰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쯤 되면 경찰 수장의 문제만이 아닌 구조의 문제로 보인다. 이런 행태는 폭력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불감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기에 그친 것만 아니다. 우수 사례와 함께 발표된 잘못된 수사엔 ‘용산 학살’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무리한 공권력 진압으로 무고한 시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죽은 이 참극에 대한 경찰의 무반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곳곳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철거민·학생들에 대한 탄압 경쟁을 용인하는 신호가 아니고 무엇인가. 국가 공권력이 앞장서 폭력의 씨앗을 분양하는 마당에 노동 현장에서 마름들이 흉포해지는 것은 어쩌면 수미일관된 연쇄반응일지 모른다. 범죄인을 다루듯 노동자와 학생들을 대하는 중간관리자와 교직원의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름들이 보여주는 최대치, KEC
노동현장 탄압 사례는 널렸지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게 각인된 사업장이 하나 있다. 경북 구미에 있는 KEC라는 반도체공장이다. KEC 자본은 그동안 ‘인력 구조조정 로드맵’을 통해 극심한 노동탄압을 차근차근 진행해왔다. 또한 ‘관리자 처우 개선’이란 이름으로 파업 노동자를 내쫓은 대가로 생긴 돈을 활용해 임원과 관리자의 연봉을 인상했다. 노동자를 짓밟고 마름을 육성한다는 이 계획이야말로 마름이 흉포해지는 또 하나의 배경인 셈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KEC 자본이 파업 참여 정도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옷 색깔을 달리 입혀 정신교육을 한 사실이다( 2011년 7월7일치에 기고한 ‘나는 개다’ 참조). 역사의 박물관에나 있는 줄 알았던 홀로코스트가 2012년 대한민국 노동현장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이처럼 노동자를 대하는 저급한 인식과 살 떨리는 탄압이 지금도 독버섯처럼 소리 없이 자라며 번져가고 있다.
동국대 학생들은 심리치유 뒤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폭력을 휘두른 교직원들과 마주치더라도 그들의 심장은 안정감 있는 박동을 유지할까. 폭력의 깊은 상흔을 남긴 교직원들은 죄책감을 느끼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구미 KEC에서 옷 색깔을 달리 입혀 정신교육을 했던 그 관리자는 지금 또 어떤 계획서를 만들며 머리를 싸맬까. 완장 찬 마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본인들은 알고나 있을까.
학생 탄압이 존재 이유인 교직원과 노동자 탄압에 온 정열을 바치는 중간관리자라는 마름들은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앞으로 대학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 더 악랄한 교직원 마름이 필요할 것이다. 900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문제는 더 악랄한 마름을 요구할지 모른다. 정리해고로 10만3천 명이 길거리로 내몰린 구조조정의 늪에선 경륜 있는 마름이 더 절실할지 모른다. 노동자는 언제까지 피해자로서 용서와 이해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가.
앙상한 말보다 강한 법적 권리
‘시키는데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변명이다. 부당한 인권침해와 인간존엄 파괴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 통용된다면 마름은 사라지기보다 확대될 뿐이다. 내부고발자를 법적으로 보호하듯, 이 시대의 슬픈 마름들에게도 윗선의 지시를 거부할 권리가 부여돼야 하지 않을까.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는 앙상한 말보다 법적 거부권을 부여하는 편이 폭력에 찌든 현실을 훨씬 빠른 속도로 개선할 것이다. 부당한 공권력을 거부하는 경찰과, 학생 탄압을 몸으로 막는 교직원과, 경영진의 부당함을 거스르는 중간관리자들에게 분명한 거부권이 있어야 한다. 마름이라 조롱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슬프고 처연한 일이다. 영혼이 빠진 채 자본의 대리인으로, 권력의 충견으로 살아가는 마름들을 구원할 방법을 고민하는 이들 또한 피해자라는 사실이 더욱 슬픈 일이다.
쌍용자동차 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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