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데리고 여름휴가를 떠났다. 벌써 4년이 넘은 얘기다. 처음엔 3살밖에 안 된 아이 걱정에 계곡으로의 여름휴가를 꺼렸지만 모처럼 가족 모두의 휴가여서 빠질 수 없었다. 누나들은 물 좋은 계곡에 자리를 예약해뒀고, 우리는 부랴부랴 물놀이 용품을 준비했다. 그런데 출발하기 2~3일 전 애가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미열이라 처음엔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점차 열은 올랐다. 아들 주강이의 열은 심장을 오그라들게 했고 잠을 훔쳐갔다. 열을 내리려고 젖은 수건으로 수시로 몸과 머리를 닦았다. 열이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이내 또 오르내리기를 꼬박 하루를 반복했다. 눈곱이 끼고 몸에 작은 반점이 생겼다. 한여름 찬물로 씻겨도 열은 내리지 않았다.
초등학교에서 단체교섭 교육하는 독일
이때까지 홍역은 의심하지 않았고 미련하게도 열이 있는 아이를 데리고 계곡으로 갔다. 1차 열꽃이 핀 다음이었다. 39.9도까지 오른 열과 온몸에 번진 반점을 본 뒤 어머니는 홍역이라 말했지만 가족끼리의 휴가를 포기하기 아쉬웠다.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나를 아내가 채근했다. 그때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우리 가족만 먼저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이틀간 휴식을 취하니 열은 차차 내렸고 반점은 사라졌다. 홍역은 태어나면서 반드시 예방접종을 맞아야 하는 기본 접종 질병이다. 접종을 하지 않으면 초등학교 입학도 거부당할 만큼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다. 평생 한 번은 겪게 된다는 홍역을 어린 주강이는 그렇게 보냈다. 그나마 예방접종을 맞은 덕분이 아닌가 싶다. 펄펄 끓는 아스팔트 위에서 머리띠 두른 노동자들을 보며 문득 홍역이 생각났다.
“더 나은 일자리를 제공한다.” 2007년 유럽연합(EU) 보고서는 국가가 해고노동자에게 해야 할 첫 번째 일을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이것을 적용한다면 어떨까. 아니 적용이라는 말을 갖다붙일 수나 있나. 해고는 사회적 낙인임과 동시에 격리며 구별인데 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인식의 지반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초등학교에서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 노동에 대한 혹은 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경험을 우리는 갖지 못했다. 성공회대 노동대학장인 하종강 선생은 이렇게 얘기한다. “독일에선 초등학교에서 단체교섭을 교육한다. 무리를 나눠 사용자 쪽과 노동자 쪽이 서로의 견해를 가지고 교섭을 벌인다. 이 수업을 한 번만 하지 않는다. 왜냐면 노사 교섭이라는 것이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과 달리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접종해야 할 노동에 대한 예방접종을 건너뛰고 있는 건 아닌가. 그 결과 전국에 해고와 비정규직, 노동에 대한 천박한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지만 제대로 된 대응이 없는 것은 아닌가. 노동자 머리에 펄펄 끓고 있는 이 열은 도대체 어떤 바이러스 때문일까.
노동 유연화라는 말이 있다. 유연화라는 말의 온화함과는 달리 노동은 짓밟히고 천대받는 지경인데도 잘도 사용된다. 대학 경쟁력과 청소노동자들의 처우가 어떤 상관관계길래 청소노동자들의 애끓는 사연은 끊이지 않는가. 비정규직의 삶으로 초대받는 83%의 대학 졸업자 앞에는 뼈마디가 녹아내릴 유연함의 미래만이 펼쳐져 있다. 시간당 받는 급료는 여전히 5천원 아래로 묶여 있고, 최저임금에 저당 잡혀 허덕이는 인생을 살아가는 이가 240만 명이나 된다. 지금의 88만원 세대와 달리 커나가는 중·고등학생은 어쩌면 선택마저 박탈당한 세대일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절망의 미래와 참혹한 통계조차 소 닭 보듯 하는 이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임에도 왜 노동의 문제가 이렇듯 다른 나라 얘기처럼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을까.
각별했던 다음 세대와의 만남
태어나면 맞게 되는 홍역 예방접종을 맞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평생 한 번 찾아오는 홍역이라 뒤로 미뤄두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의 노동 현실이 나와 내 자식은 관련 없다고 눈 한 번 찔끔 감으면 세상은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것인가. 잔혹하리만치 무서운 창살 같은 통계와 송곳 같은 수치는 운 좋게도 나와 내 가족만 비껴가는 기적이라도 일어나는 걸까.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는 노동자들은 지독히도 운 나쁜 사람들이란 말인가. 노동이 밀려난 그 공간만큼 자본의 하수구가 들어와 쉴 새 없이 비리와 불평등의 폐수를 방류한다. 오늘도 통제받지 않는 자본과 재벌의 하수구 공사엔 권력이 동원되고 무장한 공권력이 제복 입고 질서를 떠든다. 돈이 주인인 세상처럼 굴러갈수록 자본의 탐욕은 커져만 간다. 자본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있는가.
자본의 탄압과 멸시가 기승을 부릴수록 우리를 돌아봐야 하는 건 아닐까. 어느 편에 서고 어떤 주장에 편승하고 있는지 따져봐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한국 사회처럼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악랄한 탄압이 존재하는 나라도 드물다. 어쩌면 투쟁하는 이들만이 자본과 권력의 실체를 발가벗기기 때문은 아닐까. 제주도 강정마을 공동체를 파괴하며 동북아 평화를 주장하는 권력과 자본의 발파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4대강으로 평화는 끊임없이 유실되고, 경남 밀양 송전탑엔 감전된 평화의 해골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다. 정권과 자본이 주장하는 평화는 그들만의 평화이며 그네들의 안위였다.
지난주 수요일 울산의 한 고등학교에 갔었다. 선생님 몇 분께서 강연 요청을 해서인데, 고등학교 강연은 처음이라 조금 설레었다. 선생님과 시민 120명 정도의 청중 가운데 고등학생도 20여 명 앉아 있었다. 해고자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고 2시간 내내 주목하던 고등학생들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2008년 촛불소녀들이 대학생이 되어 반값 등록금과 노동자 연대를 이어간 것은 그들만의 세대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과 권력과 자본에 대한, 그리고 부당함에 대한 백신을 맞고 성장한 그들이 보여준 건 분명 가능성이었다. 너도나도 촛불을 얘기하고 앞다퉈 촛불을 분석했다. 그러나 정작 그다음 세대에게 줄 무언가는 준비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노동자를 만나고 노동조합을 경험하고 투쟁하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여전히 부족한 건 몇 사람의 게으름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사회적 질병 예방 접종이 필요해
커나가는 학생들에게 노동을 알게 하고 들려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전선의 저항값이 높아지면 전선이 붉게 달아오른다. 그러면 무슨 일인가 사람들이 보게 된다. 어떤 대책이라도 내놓게 된다.” “저항하지 않으면, 어쩌면 여러분들은 미래조차 선택할 수 없을지 모른다.” 고등학교 강당에서 나에게 이 얘기를 들은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세상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이라도 높아진 걸까. 불안정한 삶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노동은 그리고 노동조합은 어쩌면 반드시 맞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홍역 예방 접종인지 모른다. 강연을 마치고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머리에 약간의 미열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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