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통해 나오는 뉴스는 의심의 여지 없는 진리였다. 그만큼 방송의 힘은 대단했고, 기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전두환을 텔레비전을 통해 처음 봤으며, 광주 5·18 살육을 ‘정의사회’ 구현이라 믿었던 것도 방송을 통해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 북의 조정을 받은 좌경세력이 암약한 결과란 방송 보도는, 여물지 않은 내 생각을 편향으로 더욱 굳게 만들었다. 어디 이런 것이 나뿐이겠는가. 수백 번, 수천 번 길거리에서 외치는 것보다 방송 한 번 타는 것이 훨씬 파급력이 큰 문제가 우리 주변에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 막강한 방송과 언론이 파업을 벌이고 있다. 3월8일 현재, 문화방송은 한 달이 넘었으며 한국방송은 이틀이 넘었고, YTN과 마저 파업에 함께할 태세다. 이명박 정부 들어 벌어진 MB 아바타들의 거침없는 낙하산쇼를 방송과 언론 노동자들이 더는 못 견딘 결과다. 파업이 장기화되자 주요 방송이 결방하는 것을 비롯해 크고 작은 방송 사고까지 잇따르고 있다. 그러나 파업에 대한 반대 여론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몰상식이 반대 여론의 근거를 무색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방송사 파업이 승리로 끝나면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은 왜곡되지 않은 채 온전하게 방송을 타게 될까? 그런 방송을 우리는 볼 수 있을까?
‘왜’를 묻지 않고 ‘왜 하필 지금’을 물었다
방송노동자들의 파업은 반가움과 부러움, 그리고 애증으로 다가온다. 방송을 통해 익히 보던 기자와 아나운서가 거리에서 노동조합 조합원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같아서 우선 반갑다. 우리가 외치던 구호와 팔뚝질, 그리고 8박자 구호를 외치는 입가의 미소는 생경하면서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시민들의 열띤 호응이 일반 파업에선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상승할 땐 한없이 부럽다. 이런 분위기가 몇 번의 참신한 기획력이나 유명인들의 등장으로 조성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방송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시민적 요구가 저변에 넓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는 정권(어떤 성향의 정권이든)의 입맛에 맞는 방송을 해선 안 된다는 따가운 회초리일 것이다. 방송은 그동안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룰 때마다 그들이 ‘왜’ 파업을 하는지 묻지 않았다. 개념도 모호한 국민적 ‘피해’와 부풀려진 ‘경제적 손실’을 먼저 다뤘으며 ‘왜 하필 지금이냐’는 푸념을 먼저 뱉었다. 지금 방송사 파업을 지지하는 여론은 방송사들의 지난 시기를 철저하게 돌아봐야 한다는 준엄한 호응이며 경고의 응원일 것이다.
노동자들의 외침은 방송에선 늘 짠한 다큐로만 존재했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경찰과 부딪치는 단신으로만 다뤄졌다. 결국 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는 철저하게 누락된 기사가 반복 생산된다. 이러한 파업에 대한 보도 행태는 알맹이 없는 깡마른 외형만으로 국민에게 주입됐다. 철도와 지하철이 파업하건, 자동차와 조선소가 파업하건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는 ‘국가적 손실’과 ‘시민 불편’이었다. 청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와 학생들의 반값 등록금 요구는 또 어떤가. 사회의 주요한 이슈로 다뤄지고 심층 취재로 보도된 적이 많이 있던가. 이는 단순히 기자들만의 문제도, 데스크만의 문제도 아니다. 방송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구성원의 인식에서 시작된 건 아닌지 되물어야 한다. 방송이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그 관심이 어떤 표현의 형태를 띨지는 오직 방송노동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방송에 목마른 노동자의 목을 죄다
쌍용자동차 파업은 2009년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노동탄압이 극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쌍용차 파업을 극렬 진압했다. 투쟁 초·중반 방송사들은 앞다퉈 쌍용차 파업 소식을 전했다. 많은 다큐와 취재가 이어졌다. 그러나 중반을 넘어서며 방송의 태도는 전반적으로 바뀐다. ‘조·중·동’을 위시한 찌라시들의 공격과 별반 다르지 않은 편파·왜곡 보도를 했고, 파업이 마무리된 이후엔 철저한 ‘외면’으로 쌍용차 파업을 다뤘다. 상하이 먹튀 자본의 기술 유출과 3천 명이 넘는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선 쌍용차 노동자 투쟁의 본질은 온데간데없고, 경찰의 보도자료대로, 한국경영자총협회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의견대로 방송은 노동자들의 주장을 묵살했다. 방송이 조금 더 쌍용차 문제를 본질적으로 다뤘다면, 지금도 가슴속 응어리로 남은 노동자들의 ‘고통의 한’이 조금이라도 줄지 않았을까. 노동자들은 방송에 목말라 하는데, 외려 방송은 노동자들의 목을 죈 적이 너무나 많았다.
쌍용차 파업 당시 대변인의 인연으로 지금도 기자들과 공적으로 연락하는 일을 맡고 있다. 희망버스로, 희망뚜벅이로, 희망광장으로, 그리고 여전히 쌍용차 문제로. 내가 구속된 상황에서 주고받은 편지를 자신의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는 기자의 얘기는 큰 용기를 줬다. 특히 지난여름 희망버스가 아직 사회성을 득하지 못했을 때의 일이다. 저녁 7시대 정보 방송에 쌍용차와 한진 문제를 묶은 방송이 나온 적 있다. 누가 봐도 의아한 구성이었다. 맛집을 소개하는 내용이 주류인 방송에서 말이다. 방송을 만든 이는 2009년 인연을 맺은 기자였다. 그다지 친분이 있지는 않았는데, 애써 기사를 만든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현장에서 만나는 기자들이 토로하는 방송의 현실, 그리고 문자로 보내오는 그들의 자괴감이 오롯이 진심으로 다가왔다.
더 많은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다리며
불의의 사고로 지금은 고인이 된 문화방송 노동조합 여성부장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한다. 한진 김주익 열사의 사연을 새벽녘 담담하고 나지막하게 읽어 내려가던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 방송이 정권에 장악되고 개인의 생각이 여과 없이 방송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에선 더욱 그 목소리가 그립다. 방송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생각과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번 방송 파업을 보며 절실하게 느낀다. 탄압받고 아파하는 곳에 귀와 눈과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이 갖춰질 때 방송 언론은 사회의 공기로서 작동하지 않겠는가.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 노동자들의 소리를 듣는 것은 어쩌면 당연함에도 아직 여기엔 못 미친다. 몇몇 개인의 선하고 양심 있는 소신으로 방송을 채워낼 순 없다. 이번 방송사 파업이 방송노동자들의 소신을 지킬 수 있음은 물론 그 소신과 양심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는 파업이길 진심으로 바란다. 방송사 노조 파업을 격하게 지지한다!
쌍용자동차 해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