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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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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향을 피운 바자회

기쁨의 기운이 슬픔의 마음을 밀어내던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바자회
살 것, 팔 것이 없어도 서성이며 마음의 보따리 풀어놓은 사람들
등록 2012-05-24 14:36 수정 2020-05-03 04:26

솔방울을 줍고 따는 일로 산골 농부 아버지의 겨울 준비는 시작된다. 사과농사와 논농사를 마치고 나면 겨울에 할 뻥튀기 장사를 위한 채비다. ‘갈비’라 부르는 마른 소나무 잎도 잔뜩 끌어 모아둬야 한다. 뻥튀기의 땔감 연료로 사용되는 솔방울과 갈비를 많이 준비할수록 그해 겨울은 따뜻하기 마련이다. 아버지에겐 뻥튀기 기계 한 대가 있었다. 숟가락 2개로 시작한 가난한 신혼살림이 마음에 걸렸던지 대구 외할아버지께서 마련해주셨다고 한다.

동네 바자회가 열렸던 집 마당

주전부리가 없던 시절이라 옥수수와 쌀로 튀긴 튀밥은 긴 겨울 좋은 먹거리였다. 뻥튀기 기계는 우리 집 마당으로 마을 사람들은 물론 인근에 사는 사람까지 불러모았다. 이들은 순서를 기다리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했고, 돈이 없으면 콩이나 쌀로 물물교환도 했다. 어릴 땐 겨울 한철 뻥튀기 장사가 창피했다. 창피함에도 면역력은 있는 법. 불똥 튄 바지 구멍 사이로 겨울바람이 들어가던 아버지의 머리에도 하얀 서리가 내리자, 난 사람 사는 것 같은 우리 마당이 좋아졌다. 뻥튀기 기계가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흰머리처럼 하얀 세월의 먼지를 쓴 채 시골집 한 귀퉁이에 주인을 잃고 얌전히 앉아 세월을 보내고 있다. 돌아보면 옷가지가 교환되고 먹거리도 나눴던 것 같다. 뻥튀기 기계의 ‘뻥’ 하는 소리는 볼거리임과 동시에 답답한 산속 생활에 시원한 마음 구멍을 내줬다. 우리 집 마당은 동네의 유일한 바자회 장소였다.

지난 5월11일 서울 대한문 쌍용자동차 분향소 주변에선 쌍용차 해고노동자 돕기 바자회와 <악> 콘서트가 열렸다. 본래 바자회는 ‘자선사업이나 사회사업 등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 벌이는 일종의 시장’이다. 시민사회나 아파트 중심으로 열리던 바자회가 최근엔 노동운동 쪽에서도 많이 열리고 있다. 연대운동이 늘어난 것도 있겠지만 노동운동의 문턱이 조금 낮아진 것도 이유다. 다르게 보면 노동운동이 독야청청하기엔 너무 가혹한 시련기를 맞고 있는 면도 있다. 전국이 후원과 지원 바자회로 넘쳐나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만큼 투쟁하는 이들의 고통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서 마냥 좋지만은 않다. 쌍용차 해고자를 위한 바자회가 올해만 벌써 세 번째다. 그런데 지난 5월11일의 바자회는 이전과 사뭇 달랐다. 기쁨의 기운이 슬픔의 마음을 여지없이 밀어냈던, 이상할 정도로 흥분된 바자회였다.

사람의 질서가 판치던 장터, 콘서트

그날 오후 4시에 시작한 쌍용차 해고노동자 돕기 대한문 바자회는 흐린 날씨 탓에 준비하는 이들이 처음부터 마음을 졸였다. 기증품은 충분했지만, 행사 때마다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한 터라 습관적으로 하늘을 쳐다본다. 오후 4시가 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쪼그려앉아 핀과 머리띠 등 액세서리에 먼저 눈길을 줬다. 몇 번의 만지작거림, 드디어 하나를 집는다. 맘에 들지 않는 눈치인데도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물건을 산 기쁨 때문인지, 팔아준 보람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웃음꽃에 파는 이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지나가는 아가씨가 느닷없이 물건을 판다고 자리에 앉는다. 판매하는 이들의 웃음이 좋아서일까, 행사의 취지에 공감해서일까. 1시간을 열정적으로 옷이며 액세서리를 팔더니 가던 길을 간다. 이들이 사고판 건 단순한 물건이 아니지 않았을까. 그동안 줄 곳 몰라 서성이던 마음의 터를 대한문에서 발견한 건 아닐까. 어둡고 무거운 대한문 분향소 옆에서 끝없이 웃음과 마음을 분향했던 이들이야말로 바자회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이들이다.

1천원짜리 티셔츠 한 장 팔려고 30분을 노력하는 이들, 3천원짜리 옷가지 하나 사려고 1시간 넘게 고르는 사람들 사이엔 마음의 시간이 공존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이어졌고, 웃음과 행복이 넘쳐났다. 1분 또는 5분이면 사고팔기에 충분한 시간인데 이들은 왜 그곳에서 시간을 기쁘게 낭비하고 있었을까. 대한문 분향소가 그들이 보내는 시간의 길이만큼 외롭지 않기를 바랐던 걸까. 머리가 하얀 노신사 한 분이 여성 맞춤구두 판매대 앞에서 전화기를 꺼내든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며 신발 치수를 묻고 이내 끊을 줄 알았더니, 이야기가 길어진다. 자기가 여기에 왜 있는지를 한참 동안 웃으며 이야기했다. 바자회의 물건보다 이곳이 어디인지가 더 중요한 분이셨다. 이분처럼 누구를 돕는지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한문 주변을 몇 시간 동안 가득 메웠다. 자본주의 상품 소비와는 다른 소비를 즐기는 사람들을 본 것이다. 사람의 질서를 만들려는 열정과 희망이 대한문 분향소의 촛불처럼 너울너울 타오르는 걸 그날 봤다. 그동안 마음 풀어놓을 곳을 못 찾아 힘겹게 지고 있던 각자 마음의 짐 보따리를 맘껏 풀어놓는 것을 함께 확인했다. 힘과 용기를 주러 왔다가 응원을 받고 간다는 사람들의 말의 의미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쌍용차 노동자는 스물두 번째의 자살과 스물두 번째 생이별과 스물두 번째 장례를 마쳤다. 5월11일 대한문 바자회와 콘서트는 더 이상의 죽음을 막으려는 마음의 결의대회였다. 스물세 번째 희생을 막기 위해 우리가 스물세 번째임을 선언해야 함을 시인 심보선은 시로 말했다. 죽음의 공포와 반죽음의 상태에서 희망과 미래를 거세당한 쌍용차 해고노동자인 나는 전율하며 시를 들었다. 기쁨과 행복의 감정마저 잃어버린 목석 같은 몸뚱이에서 눈물이 샜고 환청이 들려 멍하니 서 있었다.

온몸으로 부른 스물세 번째 인간

대한문은 스물세 번째를 자청하는 이들로 항상 북적인다. 조금만 더 가면 고지가 보일까. 연무에 잠긴 분향소, 새벽에 벌떡 일어나 주변을 본다. 안개는 걷히고 있는 것인가. 이 안개만 걷히면 우리는 고지를 밟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모일수록 마음은 급해진다. 평온한 척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들썩임과 북적거림 뒤엔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어김없이 오른다. 일시적 흥분일까, 해결의 전조일까. 이 죽음을 넘는 진정한 힘은 무엇일까. 분명한 건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번 움직인 마음이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의심치 않는다. 해고가 살인임을 우리 모두가 깊이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심보선·김선우·진은영·송경동 시인은 함께 ‘스물세 번째 인간’을 온몸으로 불렀다. 너와 내가 스물세 번째 인간이라고,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다.

“…이제 우리는 연대와 평등의 이 밤을, 세계의 무릎 위에 아기처럼 고이 눕히고, 부드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당신을 부릅니다. 스물세 번째 인간이여, 첫 번째 인간의 동지여, 두 번째 인간의 동생이여, 세 번째 인간의 친구여, 스물두 번째 인간의 부활이여, 죽음의 죽음이여, 삶의 삶이여, 이 죽음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삶은 다시 시작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아니라면, 당신이 아니라면.”(심보선 시인의 ‘스물세 번째 인간’)




쌍용자동차 해고자·트위터 @nomad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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