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교 시절 난전에서 파는 운동화를 신고 다닐 정도의 가정형편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느끼지 못한 옷과 신발에 대한 창피함이 읍내로 중학교를 옮기자 사춘기의 몽정처럼 온몸으로 느껴졌다. 읍내 아이들의 가방과 옷, 신발이 부러웠다. 예민한 나이에 옷과 신발에 신경 쓰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던 차에 내게도 핑크빛 줄무늬가 들어간 하얀색 리복 신발 한 켤레가 생겼다. 리복이란 상표가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을 정도로 수출만 하는 고가의 신발이었다. 누이가 내게 준 선물이었다. 눈치 빠른 읍내 녀석들이 여성용임을 눈치채고 놀려대도 신줏단지 모시듯 1년6개월을 신고 다녔다. 뒤축은 닳고, 하루가 다르게 커지는 발을 감당하기엔 신발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도움과 부축으로 걷는 건 아닌가
내겐 손위 누이가 5명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연스럽게 군대 가듯 모두 부산에 있는 신발공장으로 떠났다. 신발공장으로 떠나는 누이가 늘어날수록 시골집 논과 과수원은 조금씩 평수가 늘어났다. 없던 가전제품이 명절이면 하나씩 생겼다. 냉장고가 들어왔고, 텔레비전이 점차 커졌다. 옷장이 마련됐으며, 가스레인지와 세탁기까지 들어왔다. 내 공부방이 만들어지고 책상과 책꽂이까지 갖게 됐다. 누이들의 하루하루 공장 생활은 주름진 시골집 가정형편을 점차 펴게 했다. 몇 시간을 일하는지 야근은 또 얼마나 하는지 나는 그때 알지 못했고, 관심조차 없었다. 새로운 물건이 생기는 게 그저 신기하고 기쁠 뿐이었다. 낮엔 일하고 밤에 야간고등학교까지 다녀야 했을 그 고단함에 대해 나는 아직까지 묻지 못한다. 남동생 공부시킨다는 주입된 사명감에 고스란히 10대와 20대의 청춘을 보낸 누이들에게 나는 아직까지 미안함이 많다.
2011년 7월1일 ‘소금꽃 찾아 천릿길’을 떠났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는 1차 희망의 버스 이후에도 해결은커녕 더욱 꼬여만 갔다. 한진중공업 사 쪽은 노조와 기만적인 합의서를 흔들며 상황은 끝났다고 언론플레이를 했고, 노조 합의에 분노한 적잖은 사람들은 희망버스가 또 필요한지에 대해 수군거렸다. 그러나 해고자들의 투쟁 의지가 굳건하고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이 존재하는 한 희망버스는 중단될 수 없었다. 우리는 2차 희망버스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 185일째에 맞춰 185대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185대 희망버스의 디딤돌이 되겠노라 호기롭게 외쳤다. 경기도 평택에서 부산까지 9일 만에 410km를 폭풍질주하겠다는 ‘소금꽃 찾아 천릿길’ 계획을 낸 건 그 때문이었다. 공수부대 시절 천리행군을 경험한 나는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안다. 천릿길 대장을 맡았을 때, 함께 걷는 동료들에게 좋은 신발을 선물하고 싶었던 이유다. 돈 없는 해고자가 그런 생각을 한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누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이에게 이런저런 계획을 얘기하고 도움을 청했다. 흔쾌히 허락한 누이에게서 신발 살 돈을 받아 동료들에게 좋은 신발을 신겼다. 스스로 걷고 있다 자부하는 나는, 아직 스스로 걷는 것이 아닌 듯하다. 도움과 부축으로 지금 걸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 누이들의 신발이 생각난다.
풍산마이크로텍 노동자들의 대장정
풍산마이크로텍(현 PSMC) 노동자들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향해 지난 5월30일 부산을 출발해 서울로 ‘700km터 국토 대장정’에 나섰다. 발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더운 이 여름에 이들이 대장정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의 사연을 들으면 기가 막힌다.
2010년 말 전 직원을 휴가 보낸 뒤 풍산그룹은 그해 12월29일 야밤에 계열사인 풍산마이크로텍을 매각했다. 직원들이 다음날 아침 인터넷을 통해 매각 사실을 알게 될 정도로 기습적이었다. “고용 및 단체협약 등 모든 것을 승계했다”고 언론플레이를 했지만, 풍산마이크로텍은 생산직 노동자 58명(생산직 노동자의 29%)을 지난해 11월7일 정리해고했다. 2003년 풍산마이크로텍지회 설립 뒤 구조조정 5번에 7년 동안 임단협이 항상 해를 넘겨 마무리될 정도로 노조 탄압이 일상화된 사업장이다.
풍산그룹 류진 회장은 2008년 창립 40돌 기념식에서 2018년까지 세계 일류기업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하는 ‘비전 풍산 50’(매출 12조원, 경상이익 1조원 달성)의 사세 확장 계획을 밝힌 바 있다. 또한 2011년 12월17일 본사를 서울 충무로 극동빌딩에서 풍산빌딩으로 이전해 창립 43년 만에 신사옥 시대를 열었노라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사옥 이전의 밑바탕엔 수십 년간 함께한 노동자들의 해고와 계열사 매각이 있었다. 매각 대금이 신사옥을 짓는 데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의 (주)풍산 부지 43만 평은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으로 묶여 있는데, 이 땅이 용도 변경돼 개발되면 엄청난 시세차익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 땅이 개발되려면 그린벨트 해제와 부지 내 공장들의 이전이 필요했다. 풍산마이크로텍이 지난해 말 급작스럽게 매각되고 해고가 이뤄진 이유는 철저하게 풍산의 계산 때문이었다.
풍산마이크로텍 노동자들의 ‘700km 국토 대장정’이 6월18일로 19일째를 맞는다. 아직 10여 일을 더 걸어야 한다. 19일 동안 그들의 이야기와 사연은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오고 있는가. 그들이 왜 부산에서 서울까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걷고 있는지 나 또한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해고자와 비해고자가 함께 걷는 그 절박함의 걸음걸이에 우리는 무엇을 보태고 도울 수 있는지 생각해볼 때다. 해고 뒤 노동과 강제적으로 분리된 채 오로지 걷고 선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해고노동자들의 심정을 우리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걸어서 삶의 숨구멍을 만들 수 있기에, 한 걸음 한 걸음으로 막힌 해결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걷는다. 전국을 연결하는 촘촘한 통신망처럼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문제는 삶의 혈관을 짓누르고 있다. 무던히 내딛는 해고자들의 걸음걸이는 막힌 삶의 혈관을 뚫고 자본의 일방적 대로에 난 작은 샛길일지 모른다. 그것이 결국 삶을 지탱하는 모세혈관의 건강을 회복하는 길이란 걸 알고 있다.
삶의 신발 잃고 맨발로 걷다
중국의 문인 루쉰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무엇이 길인가? 그것은 바로 길이 없던 곳을 밟아서 생겨난 것이고 가시덤불로 뒤덮인 곳을 개척해 생겨난 것이다. 예전에도 길이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길은 생길 것이다.” 해고자들은 지금 길 위에서 길을 만들고 있다.
삶의 신발을 잃어버린 채 맨발로 걷고 있는 풍산 노동자들에게 당신이 건넬 한마디는 무언인가. 그 한마디를 지금 우리는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쌍용차 해고자·트위터 @nomadc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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