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전자공학과를 다니던 친구가 가까운 시일 안에 판사·검사·변호사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고려해야 할 요소를 컴퓨터에 입력하면 바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법률가가 할 일이 없게 된다는 얘기였다. 남의 밥줄이 끊어질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 괘씸하기도 했지만, 아직 386 컴퓨터도 드물던 때라 실감이 나지 않는 얘기라서 반박을 했다. 간단해 보이는 사건도 따져봐야 할 것이 얼마나 많고 똑같은 사건이란 있을 수 없는데 어떻게 컴퓨터로 재판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무식한 문과 놈은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컴퓨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할 것이고 제아무리 많은 변수가 있다고 해도 모두 입력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대답을 했다.
친구의 예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인터넷이 출현하고 클릭 몇 번으로 세계 각국의 판례를 검색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은 사실이다.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도 양식을 다운받아서 그럴듯한 소장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고, 사회적 이슈가 되는 판결문은 인터넷에 원문이 실려서 누구나 댓글로 의견을 달고 있다. 하지만 법률가들은 아직 건재하다. 오히려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그때보다 몇 배로 늘어났고, 최근에는 로스쿨 제도를 도입해서 더 많은 법률가를 배출하려 하고 있다. 여보게 친구, 우리도 아직 밥은 먹고 산다네.
법률가라는 직업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컴퓨터보다 더 빠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우수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벌이는 일이 기계로 계산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법은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고 하고 일단 사실관계를 완벽히 파악하면 해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사건은 그렇게 쉬운 결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극단의 형벌, 사형을 선고받는 사건들도 그렇다.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사형수들은 대개 억울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스티븐 킹의 에서 사형을 당하는 존 카피는 실제로 살인사건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고, 공지영의 의 주인공 정윤수는 강도살인죄를 저질렀지만 어린 시절 받은 심한 학대를 생각하면 범죄의 세계에 빠지게 된 것이 이해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인물들을 떠올리면서 사형제도에 대해 생각하면 자칫 현실을 놓치게 된다. 사형수 중에는 동정의 여지가 거의 없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놓고 생각해야 사형 존폐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존 그리샴의 에 등장하는 샘 케이홀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물론 이런 사람의 경우에도 고민의 깊이와 폭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
샘은 미국 남부 미시시피주에 사는 KKK단(ku klux klan·백인 우월주의 단체로 흑인은 물론 민권운동가들에 대한 테러를 일삼았다) 단원이다. 1960년대 미국 남부는 시민권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고 그에 맞서는 KKK단의 폭력도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1967년 어느 날 샘은 조직의 상급자로부터 민권운동을 하는 유대인 변호사의 사무실을 폭파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원래 계획은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폭탄은 새벽 4시 텅 빈 사무실에 설치됐고 15분 뒤에 터지는 도화선을 사용하게 돼 있었다. 샘과 그의 공범 롤리 웨지는 이전에도 이런 짓을 몇 번 했지만 사람을 다치게 한 일은 없었다. 목적은 겁을 주는 것이었다. 이날은 달랐다. 샘이 망을 보는 동안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롤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도화선이 아닌 시계 장치를 이용해서 폭탄이 출근 시간에 맞춰 터지도록 해놓고 달아났다. 샘이 모르는 KKK단의 어떤 음모가 있었던 것인지 혹은 롤리가 독자적인 행동을 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날 아침 피해자인 변호사는 5살 된 아들 쌍둥이를 데리고 사무실에 왔다. 폭발로 두 아이는 즉사했고 변호사는 두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었다(그는 나중에 이혼하고 정신병원에서 자살한다). 예상한 시간에 폭탄이 터지지 않은 것을 의아해하며 현장으로 돌아오던 샘은 파편에 부상을 입고 경찰에 체포된다. 그는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은 모두 세 번이 열린다. 앞선 두 번의 재판에서 역시 KKK 단원인 변호사는 배심원을 백인으로만 채우는 재주를 부렸고, 배심원은 유죄판결을 내리지 못했다. 샘은 사실 살인을 할 의도는 없었고 실제로 폭발 시간을 출근 시간으로 맞춘 것은 공범이었지만, 법정에서 그런 진술을 하지는 않는다. KKK 단원으로서 동료를 밀고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고, 자취를 감췄던 공범이 심부름꾼을 통해서 자기 이름을 불면 샘의 집과 가족을 폭파시켜버리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뒤 14년이 지나서 열린 세 번째 재판에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열혈 검사가 등장했고, 애초 샘에게 폭파를 지시했던 상급자가 탈세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검찰과 협상하기 위해서 샘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던 것이다. 시대도 바뀌어 이제 선거인 명부에 등록된 흑인 수는 엄청나게 늘었다. 배심원은 선거인 명부에 오른 사람 중에서 무작위로 선정한다. 백인만으로 배심원을 구성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백인 8명, 흑인 4명으로 이뤄진 배심원은 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샘은 사형수 감방에 수용돼 가스실에 들어갈 날짜를 기다리게 되었다.
미국은 사형선고 이후의 이의 제기 절차가 발달한 특이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일단 사형이 선고되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해 계속 상소를 한다. 주법원과 연방법원을 오가며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기도 하고 재판에서 선임한 변호인이 변론을 잘못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면서 집행을 면하려는 노력을 한다. 주지사에게 감형을 해달라는 청원도 한다. 그 사이에 사형 집행이 몇 년씩 연기되기도 한다. 이런 사건은 변호사가 하는 일 중에 가장 힘겨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차가 복잡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자칫 실수를 하면 의뢰인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다는 압박감이 주된 이유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건이 실패하기 때문에 의뢰인이 사형을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확률이 높다. 의뢰인의 죽음은 변호사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사형수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높은 보수를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이런 사건들의 상당수는 무료 변론을 자원한 변호사에게 맡겨진다. 사형수 감방에서 9년을 버티면서 상소를 하던 샘에게도 변호사가 한 명 찾아온다. 시카고의 대형 로펌에 갓 입사한 젊은 변호사 애덤 홀은 바로 샘의 손자였다.
샘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었다. 샘이 폭파 사건으로 체포되자 아들은 창피해서 이름을 바꾸고 고향을 떠났다가 유죄 판결이 선고된 직후 자살했다. 그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변호사가 되었고 고향을 떠난 지 23년 만에 자기 할아버지의 사건을 맡기 위해 돌아온다. 샘은 갓난아기 때 헤어진 손자를 사형수 감방에서 자기의 변호사로 재회하게 된 것이다. 샘의 나이는 일흔이었고 사형 집행일은 4주 남아 있었다.
흑인 여럿 살해한 ‘억울한 사형수’인 셈애덤은 의뢰인이 된 할아버지에게 공범의 존재를 털어놓으라고 간청한다. 공범이 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법률적인 책임을 면할 수는 없지만,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사형선고가 정당한지 심리를 다시 해야 하고 그 절차를 위해서 판사가 집행일을 유예해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시간을 벌자는 것이 애덤의 기본 전략이었다. 여러 가지 정황상 공범이 있는 게 분명하고 샘에게 살인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였지만 샘은 완강하게 공범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수십 년간 자취를 감추었던 공범 롤리 웨지가 신분을 속이고 면회를 와서 자기 얘기를 하면 가족을 죽여버릴 것이라고 다시 협박을 했던 것이다. 결국 모든 청원은 기각되고 예정된 집행 시간이 다가왔다.
가스실로 끌려가기 직전 손자가 보는 앞에서 목사에게 고해성사를 하던 샘은 진실을 털어놓는다. 자기는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고, 폭발 시간을 출근 무렵으로 맞춘 사람은 공범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사건에서는 억울한 벌을 받는 셈이지만, KKK 단원으로서 흑인에 대한 린치에 가담해 실제로 흑인 몇 명을 살해했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충격에 빠진 손자를 뒤로하고 그는 사형 집행을 당하기 위해 떠난다.
샘 케이홀의 사형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는 동정을 받을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로서 흑인을 몇 명이나 죽이기까지 했으면서도 크게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사형 집행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자기 소송에 ‘검둥이’나 유대인 변호사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사형선고를 받은 그 사건에서는 억울하다고 주장할 근거가 충분하다. 어차피 죽어 마땅한 죄인이니 어떤 죄로 유죄판결을 받건 무슨 상관이냐고 가볍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보다 훨씬 악독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공범 롤리 웨지(그는 사형을 선고받은 샘을 제외한 사건 관계자 전원과 그 가족을 살해했다)는 샘을 위협해서 처벌을 피했다. 가족이 해를 입는 것을 두려워한 샘은 끝까지 공범의 존재를 밝히지 못하고 가스실로 들어갔다. 과연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여러 언론매체에서 ‘흉악범’의 경우에는 유죄판결을 받기 전이라도 신상을 공개하자는 주장을 한 일이 있다. 법무부에서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과연 어떤 범죄가 ‘흉악범’에 해당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일부 학자는 “두 명 이상이 희생된 연쇄 살인, 어린이 납치 살해, 다중 살인”이라고 구체적인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사형 집행을 재개하자는 사람들도 비슷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과 인권에 관련된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고 성급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사형? 얼굴공개? 단순한 생각은 금물실제 벌어지는 사건의 상당수는 샘 케이홀의 경우처럼 상반되는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 존 그리샴의 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모든 사건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고, 특히 돌이킬 수 없는 처벌인 사형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력 사건이 벌어진 직후에 단순하기 그지없는 기준으로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컴퓨터가 재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가벼운 생각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샘 케이홀의 사형 집행이 정의로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정당한 처벌을 결정하는 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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