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보고 고은 시인의 수상을 기대한 많은 사람들이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만일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면 정말 대단한 뉴스가 되었겠지만, 문학상 수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 중에서 최고로 흥미진진한 드라마는 1975년 에밀 아자르가 공쿠르상을 받은 일이다. 에밀 아자르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동일인에게 주지 않는다는 공쿠르상의 원칙 깨
성적과 서열을 중시하는 교육을 받은 탓인지 문학상에 관한 보도를 볼 때도 과연 어느 상이 가장 권위가 있는지, 이 상과 저 상 중에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지 따져보고 싶은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 알려진 것은 물론 노벨문학상이지만 각 국가별로 들어가보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 작가들이 쓴 책 뒤표지를 보면 작가가 ‘내셔널 북 어워드’(National Book Award)를 수상했다거나 ‘펜/포크너 어워드’(PEN/Falkner Award)의 후보로 선정된 일이 있다거나 혹은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받은 일이 있다는 등의 소개가 적혀 있는 때가 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100개 따도 금메달 1개에 못 미친다는 사고방식에 익숙한 나로서는 과연 어느 상이 더 높은(?) 상인지 답답할 때가 많다.
영국은 비교적 단순해서 영연방 국가의 작가가 영어로 쓴 소설을 대상으로 주는 상 중에는 ‘맨 부커상’(Man Booker Prize)이 가장 권위 있는 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원래는 ‘부커상’으로 부르다가 2002년 투자회사인 ‘맨 그룹’(Man Group)이 후원하면서 ‘맨 부커상’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어서, 한때는 둘 중 어느 쪽이 영국에서 가장 좋은 상인지 궁금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프랑스는 역시 화끈한 나라고 문화대국이다. 별다른 이론 없이 공쿠르상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졌지만, 기실 그의 책을 읽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는 마르셀 프루스트(번역서로 11권에 이르는 그의 대표작 를 한 번도 졸지 않고 끝까지 읽은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앙드레 말로, 시몬 보부아르 등이 이 상을 탔다.
공쿠르상의 수상자를 결정하는 데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쓰더라도 같은 사람에게 두 번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다. 1956년 로 공쿠르상을 받은 로맹 가리는 20년 가까이 지난 1975년 으로 다시 한번 상을 받는다. 그러나 로맹 가리는 을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출간했고, 심사위원들은 두 사람이 동일인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수상자를 결정했다.
작가가 필명을 쓰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로맹 가리라고 해서 반드시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에밀 아자르의 역할을 할 대역을 내세웠고, 자신이 에밀 아자르가 아니냐는 질문에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쓴 작품이 주목받게 되자, 로맹 가리는 자신의 5촌 조카인 폴 파블로비치에게 아자르 행세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아저씨의 부탁을 쾌히 승낙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언론과의 인터뷰 등 유명세를 즐기는 데 한 치의 망설임을 보이지 않은 대역 조카로 인해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접어든다. 눈 밝은 평론가 몇몇이 로맹 가리의 작품과 에밀 아자르의 책에서 유사한 점을 찾아내고 질문을 하면, 로맹 가리는 점잖은 표정으로 ‘젊은 작가’가 표절을 좀 했다고 해서 항의할 생각은 없다고 답변했다.
두 사람이 동일인임이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지 6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사후에 출간된 소책
자 에서 로맹 가리는 어떤 이유로 에밀 아자르라는 존재를 만들어냈는지, 자신의 작품에는 혹평하면서 “아! 에밀 아자르, 그는 정말 남다른 존재입니다”라고 찬탄하는 평론가들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담담한 필치로 밝혔다.
로맹 가리는, 말하자면 세상을 상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Identity)을 속이는 일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났고(혹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일을 놓고 최근까지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바로 타블로의 ‘학력 검증’ 논쟁이다.
가수 한 명의 출신학교를 놓고 언론기관은 물론 검찰과 경찰까지 동원되는 촌극을 벌인 끝에 학교 쪽에서 졸업 사실을 확인해주었으면 시비가 끝날 만도 한데, 여전히 결과에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호기심에 관련 카페에 가입까지 하면서 살펴보니, 아직도 해명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다니엘 선웅 리’라는 사람이 미국 스탠퍼드대학을 졸업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가수로 활동하는 타블로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 주장이지만, 이 문제가 왜 그렇게까지 뜨겁게 다투어졌는지 일부분은 알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우리 사회는 정체성이나 신분을 속이는 문제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 힘들 만큼 엄격한 법규범을 갖고 있다. 주민등록법이 대표적인 예다.
5·16 직후인 1962년 “주민을 등록하게 함으로써 주민의 거주관계를 파악하고 상시로 인구의 동태를 명확히 하여 행정사무의 적정하고 간이한 처리를 도모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법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 법에 따라 성명, 성별, 생년월일, 주소, 세대주와의 관계 등을 시장, 군수 또는 구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 이중으로 주민등록을 하거나 허위 사실을 신고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17살 이상의 주민에 대해 경찰은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할 수 있다. 만일 주민등록증을 제시하지 않으면 일정한 경우 인근 ‘관계 관서’에서 신원이나 거주 관계를 밝히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런 법률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가다 보면 사고방식이나 문화도 적응하게 된다. 개그맨 심형래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지나가는 행인에게 “주민등록증 좀 봅시다”라고 말을 거는 개그를 한 일이 있다. 알고 보면 자기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렸는데 혹시 못 봤느냐고 묻는 것인데,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허겁지겁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낸다.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는 솔직히 대답할 의무가 있다는 사고가 우리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이다.
타블로의 학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의식 깊은 곳에도 이런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사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 답변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으면 얼마든지 ‘증명서’를 요구할 수 있다는 황당한 고집,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하는 사람은 법적·도덕적으로 어떤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는 비논리는 이런 생각 없이는 생겨날 수 없다.
물론 그들에게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타블로가 인기를 얻은 요인 중에는 남들이 쉽게 가지 못하는 좋은 학교를 나왔다는 점도 있는데, 만일 그것이 허위라면 당연히 질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타블로 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는 일이다. 가수가 노래나 춤으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학벌로 인기를 얻었다면, 그런 현상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삐뚤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것 아닐까. 정말로 타블로가 스탠퍼드대학을 나온 사실이 없는데 학위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 유명인이 된 사실이 밝혀진다면, 타블로를 좋아한 팬들을 비롯해 우리 모두가 얼굴을 붉혀야 할 일이 아닐까. 물론 만일 타블로가 자신이 나온 학교를 속였다면 비난받을 만하지만, 적어도 내 생각에는 학벌을 절대시하는 우리 사회의 허위의식을 이용하려는 행위보다는 “정체를 밝혀라. 왜 여권을 까서 보여주지 않느냐”고 소리 지르는 집단적 폭력이 훨씬 더 위험하고 비도덕적이다.
왜 겉치장에만 집착하는가로맹 가리는 곰브로비치의 말을 빌려 “사람들이 만들어준 얼굴”에 구속되기 싫어서 에밀 아자르를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런 ‘얼굴’은 작가의 작품이나 작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저자가 로맹 가리라는 이름을 가지든, 혹은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을 가지든 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이다. 살인범 아버지와 창녀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주인공 모모와 창녀들이 낳은 아이들을 키워주는 로사 아주머니 사이의 우정을 그린 이 책은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모모가 이미 죽어서 부패해가는 로사 아주머니에게 화장을 해주고 향수를 뿌려가면서 3주일을 함께 지내는 대목은 쉽게 눈을 떼기 어렵다. 열네 살 소년의 눈으로 인종갈등, 안락사, 가족, 종교를 해석하는 부분도 만만치 않은 재미를 준다. 역시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그것을 둘러싼 겉치장이 아닌 것이다.
덧붙이는 말: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전날 기자들이 고은 시인의 집 앞에 진을 치고 대기하는 일은 제발 그만뒀으면 한다. 발표 전까지 “이번에는 거의 확실하다”고 방정을 떨다가, 발표가 난 뒤 “이날 시인의 휴대전화는 하루 종일 통화가 되지 않았다”는 식의 신파조 기사를 쓰는 모습은 촌스럽다 못해 슬픔까지 느끼게 한다. 우리가 고은 시인을 좋아하는 것은 그의 시가 좋기 때문이지 무슨 상을 탈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은 아니지 않나. 중요한 것은 항상 내용이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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