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다음 중 유신 시절 시행된 긴급조치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①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을 제안하는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② 위와 같은 규정(긴급조치)을 비방한 자도 역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③ 학생이 부당하게 출석이나 수업 또는 시험을 거부하면 사형에 처할 수 있다.
④ 고려대 교내에서 집회나 시위를 하면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수업 거부하면 사형에 처할 수도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답은 ①번부터 ④번까지 전부다. 아직도 일부 매체가 신화화 작업을 계속하고 있으며, 상당수 사람들이 ‘경제성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국민의 자유를 일부 제한했지만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지도자’가 이끌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는 박정희의 유신시대는, 그러나 수업을 빼먹는 학생을 사형시킬 수 있다는 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암흑의 시간이었다.
법조문을 좀더 자세히 보자. “학생의 부당한 이유 없는 출석·수업 또는 시험의 거부, 학교 관계자 지도·감독하의 정당한 수업·연구 활동을 제외한 학교 내외의 집회·시위·성토·농성 기타 일체의 개별적·집단적 행위를 금한다. …(이 조항을) 위반한 자 및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1974년 4월3일 시행 대통령 긴급조치 4호 5항)
유신시대의 엄혹함을 단지 장발이나 미니스커트를 단속당하지 않으려 도망다니는 젊은이와 자와 가위를 든 채 쫓아다니는 경찰관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낭만적인(!) 풍경으로만 떠올리는 사람들은 실제로 수많은 사람을 감옥에 보낸 긴급조치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올해 6월로 활동을 종료하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위원장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독재를 해도 남미처럼 법을 깡그리 무시한 독재는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런 나라들은 그냥 납치해서 비행기로 싣고 가 바다에 던지니까 증거가 없죠. 한데 우리는 (독재를 위한) 법을 만들고 포고령 내고 했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사법절차는 거친 경우가 많아요”라는 말을 했다.
과연 그런 ‘사법절차’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독재정권 아래서 신음했던 사람들이 겪은 경험은 ‘사법절차’ 유무에 관계없이 어딘지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내로라하는 독재자들을 줄을 세운다면 절대 첫 번째 줄에서 뒤로 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한 도미니카의 악명 높은 독재자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의 치하도 마찬가지다. 그 시절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 일들이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의 삶에 끼친 영향을 절묘하게 묘사한 주노 디아스의 소설 이 우리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혹자는 어떻게 박정희 전 대통령과 트루히요를 같이 놓고 비교하느냐고 항의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트루히요가 정권을 잡은 것은 1930~61년이다.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이 장교 250명과 사병 3500명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1961년이다. 트루히요는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30년 전에 육군 준장으로 있으면서 쿠데타를 일으켰고, 5·16이 나던 해에 정적에게 암살당했다. 30년이라는 시대의 차이를 고려하면 두 정권이 사용한 통치 수단에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박정희 시절과 전두환 시절도 나름대로는 차이가 있다. 적어도 전두환 시절에는 고려대 교내에서 시위하면 징역 10년에 처할 수 있다는 법조문을 당당하게 내세우지는 않았다.)
어느 도미니카 지식인의 비극
소설은 1974년 우리의 주인공 오스카 와오가 일곱 살이던 때로부터 출발해 점차 과거로 돌아간다.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트루히요의 만행이 극에 달한 1945년, 오스카의 외할아버지 아벨라르 루이스 카브랄이 뜻하지 않은 비극을 맞으면서부터다.
아벨라르는 누구에게나 존경받을 만한 지식인이다. 외과의사인 그는 도미니카에서 가장 두뇌가 명석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집요하도록 호기심이 많고 놀랄 만큼 천재적이며 특히 언어와 치밀한 계산에 뛰어나다. 스페인어·영어·프랑스어·라틴어·그리스어로 된 글을 두루 읽었고 희귀한 장서를 수집했으며 민족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유복하게 살던 그는, 저녁이면 마을에서 학식깨나 있다는 사람들을 초대해 밤이 새도록 토론을 했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결코 트루히요의 독재에 맞서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과 토론할 때도 현대 정치(즉, 트루히요)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철저히 금했고 비밀경찰을 포함해 모임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였다. 트루히요가 저지른 만행에 관한 이야기, 즉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국외로 쫓겨난 가문, 아들이 친구들 앞에서 트루히요를 감히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했다고 해서 온 가족이 상어떼에 사지를 떼어먹힌 일, 유명한 노동조합 운동가가 암살된 미심쩍은 사건 등에 관해 들으면 잠시 불편한 침묵을 지킨 뒤 말을 돌렸다. 아벨라르는 우리가 많이 보던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 비극이 닥친 것은 뜻밖에도 그의 딸이 너무나 예뻤기 때문이다. 트루히요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전국에서 여자를 찾아내는 수많은 첩자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유력 인사의 부인이나 딸이라고 해도 그의 마수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트루히요의 만행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페루의 세계적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요사는 그가 저지른 성폭행과 성착취를 소재로 이라는 소설을 썼다고 한다. 소설의 저자 주노 디아스가 직접 붙인 각주에 따르면, 트루히요는 총에 맞아 죽던 날도 ‘오입질’을 하러 가던 중이었다고 한다(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그런 트루히요가 이제 막 사춘기에 이른, 아직 대학도 들어가지 않은 아벨라르의 큰딸 재클린에게 눈독을 들이게 된 것이다. 처음에 아벨라르는 동료 의사에게 부탁해 아내가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진단서를 받은 다음 트루히요의 파티에 가족을 데려가지 않는 식으로 피해가려 한다. 트루히요가 그에게 “딸 하나가 아주 예쁘고 우아하다던데, 안 그렇소?” 하고 노골적으로 묻는데도 재치 있는 답변으로 빠져나간다. 하지만 다음번에 그가 받은 파티 초청장에는 “아벨라르 루이스 카브랄 박사, 부인, 그리고 딸 재클린 귀중”이라고 쓰여 있었다. 게다가 “딸 재클린”이라고 쓴 부분에는 한두 개도 아닌 밑줄을 세 개나 그어놓았다. 아벨라르의 시련이 시작된 것이다.
딸을 트루히요에게 데려가 바쳐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마지막 순간에 혼자 파티에 간다. 트루히요의 표정은 일그러졌고 아벨라르는 4주 뒤에 체포돼 고문당한 뒤 재판을 받는다. 죄목은? ‘국가원수 중상 및 모독죄.’ 우리나라에서는 유신 시절인 1974년에 비슷한 죄가 만들어졌다가 1988년 폐지된 일이 있다.
아벨라르가 겪은 ‘사법절차’는 그 시절 우리도 드물지 않게 목격한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사 과정에서 혐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자 조서를 작성하던 조사관은 주먹을 날린다. 입술이 찢어진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도대체 왜?”라고 묻는 아벨라르에게 조사관은 다시 한 방을 날린다. “여기선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거든.”
아벨라르의 아내는 남편이 체포된 지 사흘이 지나서야 어디로 끌려갔는지 알게 되었고, 닷새를 더 기다린 다음에야 면회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아벨라르는 결국 모든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18년형을 선고받는다. 아벨라르의 아내는 자살하고 두 딸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아벨라르가 체포된 뒤 임신이 확인된 셋째딸, 소설의 주인공 오스카의 어머니인 그녀는 가족의 비극을 그대로 후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요즘 쓰는 말로 원단 ‘덕후’인 주인공 오스카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다. 톨킨의 을 비롯한 수많은 판타지 소설이 인용되고, 아시모프·하인라인의 작품을 비롯한 공상과학소설(SF), ‘던전앤드래곤’을 비롯한 컴퓨터게임, 심지어 일본 애니메이션 의 주인공 가네다와 데쓰오까지 다양한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등장한다. 그러나 굳이 인터넷으로 검색해가면서 읽지 않아도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개인적으로는 지난해에 나온 소설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느낀 사람은 나 하나만은 아닐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향수
나로서는 도저히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어떤 사람들은 독재가 이루어지던 시절에 대해 향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당명을 바꾸기는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그 사람과 친한 사람이 연대한 모임이라는 뜻의 당명을 공식 명칭으로 하는 정당이 존재했던 것을 보면, 어떤 사람을 무조건 추앙하는 것이 이상하게만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시절에 존재한 법조문과 그때의 ‘사법절차’를 보면 과연 그 시기를 그리워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최근 천안함 사태가 터지면서 반공을 국시로 하던 독재 시절에 대한 미화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한 신문에서는 국립현충원에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 방명록에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세요’라고 써놓는다는 칼럼을 싣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그 시기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잘 지켜지던 때라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중형을 선고받고 심지어 사형까지 당했던 시절을 ‘지켜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벨라르의 비극이 그 손자인 오스카 와오에게까지 이어지듯, 독재의 상흔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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