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언 형제의 영화 의 주인공은 유대계 물리학 교수다. 아내의 이혼 요구, 종신 재직권 심사에 대한 불안 등 일상의 스트레스는 그에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가뜩이나 짜증스러운 그의 인생에 또 하나의 고통을 선사할 한국인 학생이 한 명 등장한다. 중간고사에서 낙제점을 받은 그 학생의 요구사항은 학점을 올려달라는 것이다. 수학의 기초가 전혀 돼 있지 않은 답안에 학점을 줄 수 없다고 거절하는 주인공에게 학생은 온갖 궤변을 늘어놓다가 슬그머니 교수실에 돈봉투를 두고 나온다. 뒤늦게 봉투를 발견한 교수는 경악으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아빠·엄마라는 비장의 무기
학생을 다시 부른 주인공은 단단히 야단을 치고 절대로 학점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한국 학생은 그 정도 엄포에 눈도 깜빡 안 한다. 그에게는 다른 나라 출신의 학생들은 꿈도 꾸지 못할 비장의 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아빠’다. 며칠 뒤 교수의 집으로 학생의 아버지가 찾아온다. 자기 아들의 명예를 훼손했으니 학교에 진정하겠다는 협박(학생은 돈봉투를 두고 나온 사실을 부인했다)과 제발 학점을 올려달라는 애걸 등 과보호의 칼을 빼든 부모만이 휘두를 수 있는 무기를 유감없이 사용한 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학점을 고치는 데 성공한다.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몹시 찝찝한 장면이고, 인터넷 영화평에는 코언 형제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비난까지 올라와 있다. 그러나 과연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할 때 영화에 등장하는 한국 학생과 그 ‘아빠’의 모습이 우리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매우 강력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공권력을 상징하는 부서 중 하나로 생각하는 기관에 근무하는 공무원들과 만나서 식사를 하다가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다. 요즘 그 기관에 들어오는 초년병들이 함께 근무하는 상사나 동료와 갈등을 겪을 때, 가끔 ‘엄마’가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당당하게 관공서에 들어선 ‘엄마’는 당황하는 아들(혹은 딸)의 동료의 손을 꼭 잡고, “우리 아들(혹은 딸)을 도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성년이 된 지 한참 지나 어엿한 직업을 갖고, 심지어 ‘국가의 대사(!)’를 다루는 사람들의 문제를 부모가 나서서 해결하려 드는 일은 우리 사회에서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다. 최근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이 계약직으로 특채돼 물의가 빚어졌을 때, 정작 문제가 된 당사자인 장관의 딸은 전혀 언론에 등장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과거에 외교통상부에 5급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것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무관급 공무원의 임용을 둘러싼 논란에 스스로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부모를 앞세워야 하는가.
고위 공직자 임명 청문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교육을 위한 위장전입’은 자녀가 어릴 때 벌어진 일이니 부모가 해명해야 한다고 치자. 공직을 맡겠다고 나섰다가 장관인 부모의 덕으로 특혜를 입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 최소한 스스로 항변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마디 말도 없이 임용 신청만 철회하고 부모의 뒤로 숨는 것을 보면, 과연 그 인생이 자신이 사는 것인지 혹은 부모가 대신 살아주는 것인지 의심이 간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를 점령(!)한 한국 낭자들의 승전보 뒤에 자신의 삶은 내팽개치고 딸을 따라 이역만리를 떠도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모습이 엿보일 때 안타까움과 함께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 정상급에 오른 자녀에 대해서도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 인식 때문이다.
과잉보호는 금치산으로 이어져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행동이 뭐 그리 잘못된 일이냐는 항변이 있을 수 있다. 장관이 자신의 딸을 특채한 것은 분명히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자식을 돌보려는 부모의 마음은 심정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부모가 성년의 자식을 보호하려는 것은 오히려 자식들에게 해가 된다. 적어도 법에서는 그렇게 본다. 보호를 받는 존재는 능력이 없는 존재로 다루는 것이 법의 일반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법은 미성년자, 한정치산자, 금치산자를 보호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친권자(부모) 혹은 후견인에게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긴다. 이들이 맺은 계약은 취소할 수 있게 해서 계약에 따른 책임을 면할 수 있는 제도도 두고 있다. 그런데 민법은 이렇게 보호받는 미성년자, 한정치산자, 금치산자를 ‘무능력자’라고 부른다.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은 홀로 서지 못하는 무능력자로 다루는 것이다. 성년이 됐는데도 부모가 대신 나서서 자식의 일을 처리하려 하면 결국 부모 스스로 자신의 아이가 무능력자라고 선언하는 셈이다.
물론 어떤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고 싶지 않을까. 예순이 된 아들도 팔순 노모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부모의 심정만이 아니다. 다만 그런 시도를 하면 아이가 스스로의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경계할 뿐이다. 자식을 끝까지 자신의 울타리에 두려 하면 결국 비극적으로 끝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한 책이 로맹 가리의 이다. 저자인 로맹 가리와 동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 소설은(주인공과 작가는 고향, 가족관계, 외교관 경력 등 인생 경로가 비슷하다. 아마존에는 이 책이 회고록(memoir)으로 분류돼 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헌신하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를 위해 세상과 투쟁하겠다고 결심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어머니는 3류 배우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이다. 때로는 미장원에서 여자들에게 화장을 해주고, 때로는 위조 상표를 붙인 모자를 팔고, 때로는 호텔 복도에 진열장을 놓고 잡화를 팔면서 어렵게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는 항상 점심에 ‘비프스테이크’를 해준다. 어머니의 모습은 서양이나 우리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아들 앞에서는 자신은 채소밖에 좋아하지 않는데다 고기나 기름기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지만, 아들이 안 볼 때는 비프스테이크를 구웠던 프라이팬에 남은 기름기를 몰래 빵으로 훑어 먹는다. 주인공은 우연히 그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언젠가 세상을 다시 세워, 마침내 행복하고 정당하고 자신만만하게 된 내 어머니 앞에 갖다 바치리라는 격렬한 다짐’을 한다.
죽어서도 아들에게 편지를 쓴 어머니
어머니의 헌신은 당연히 보호에 그치지 않는다. 아들의 장래에 엄청난 기대를 갖고, 꿈을 이루기 위해 세심한 지도를 아끼지 않는다. 어머니의 눈에 아들은 괴테, 톨스토이, 단눈치오의 뒤를 잇는 문학의 천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아들이 수학 시험에 빵점을 맞은 것은 단지 선생들이 아들의 재능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모파상과 하이네가 성병에 걸렸던 것을 기억하고, 분명히 문학계의 별이 될 아들에게 성병에 주의하라는 경계를 내리기도 한다(그때 아들은 불과 12살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자를 멀리하라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아들은 유럽 사교계의 수많은 미인들을 울릴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자식에 대한 자부심을 혼자 간직하는 소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웃들 앞에서 장차 프랑스 대사가 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위대한 극작가가 될 사람을 몰라본다고 호통치다가 비웃음을 산다. 입대한 아들이 교관으로 근무하는 항공학교에 찾아가서는 동료들이 보는 가운데 “너는 영웅이 될 것이다. 장군이 되고,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되고, 프랑스 대사가 될 것이다!”라고 선언해서 아들을 죽고 싶도록 창피하게 만든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아들은 어떻게 됐을까? 2차 세계대전에 조종사로 참전한 주인공은 끊임없이 날아오는 어머니의 편지에 격려를 받으면서 수훈을 세우고 최고 훈장을 받는다. 그러나 마침내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3년도 더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된다. 아들이 자신에게 얼마나 의지하는지 아는 어머니는 죽기 전에 250통의 편지를 미리 써놓고 친구에게 대신 부쳐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18년이 지난 뒤, 마흔넷이 된 아들은 해변에 누워 어머니의 뜻에 따라 산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며 “끝났다”라고 중얼거린다. 그때까지도 ‘내 손으로 내 몸을 따뜻하게 하는 법을 배운 일이 없는’ 그는 마침내 어머니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을 느끼고 “나는 살아냈다”는 말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는 남자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여성이 군대에서 활동한 역사는 4천 년이 넘었다고 한다. 다만 최전선에 서서 전투하는 역할을 맡는 일이 별로 없었을 뿐이다. 언뜻 생각하기에 여군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데 대해 남자들이 불만을 가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전투병과에 근무하고,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핵잠수함에 승선하기 위해 여성들은 오랜 투쟁을 벌여왔다. 어느 조직에서든지 ‘보호의 대상’이 되면 결국 ‘무능력자’ 취급을 받게 될 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중학교에 다닐 때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으로 고등학교 수학 공부를 하는 우리 아이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사법연수원에 입학하기 전에도 선행학습을 한다. 수년간 고시 공부를 해온 예비연수생들이 스스로 학원비를 낼 능력은 없을 테고, 결국 부모의 도움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렵다는 시험에 붙은 사람들(그들은 모두 성인이다)도 부모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그렇게 부모의 도움으로 선행학습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대를 이어 사는 인생, 행복할까
우리는 과연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 것일까. 우리 민법의 ‘무능력자’에 ‘과보호를 받는 성인 자녀’라는 항목을 더해야 속이 시원해질까. 사무관 생활을 3년이나 한 딸은 자신의 임용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부모의 뒤에 숨고, 아버지 혼자 나서서 해명하는 것이 정상일까. 장관인 아버지의 덕으로 사무관에 특채되는 딸의 인생이나, 군대 경험도 하나 없이 국방위원장인 아버지 덕에 하루아침에 당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 되는 아들의 인생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그들은 정말 자신의 인생을 사는 걸까. 아이들의 인생은 아이들이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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