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케슬러의 (Darkness at Noon)은 공산주의를 정면에서 비판한 대표적인 소설이다. 공산주의 이론 자체와 함께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의 현실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메스를 가하고 있다. 시대적 배경과 장소가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전후 관계로 보아 소설의 무대는 스탈린 시대 ‘대숙청’이 벌어지는 소련 사회가 분명하다. 혁명의 주역이자 현재도 당당히 정치국원의 자리를 차지한 주인공은 한밤중에 체포돼 혹독한 신문을 받고 결국 처형된다. 그 과정의 묘사를 통해 작가는 1930년대 사회주의 진영의 문제점을 누구도 반박하기 힘들 만큼 통렬하게 비판한다.
전향한 공산주의자, 케슬러그런 만큼 1940년에 출간된 이 책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소개되지 않은 점은 약간 놀랍다. 수십 년간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살아왔고, 심지어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반공 글짓기 대회, 반공 웅변대회, 반공 포스터 그리기 대회가 학교마다 열렸던 우리 사회가 아닌가. 따져보면 20세기 최고의 ‘반공 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책이 번역도 되지 않은 것은 의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작가인 케슬러는 원래 공산주의자였다가 ‘전향’한 사람이다. 이데올로기 과잉 시대인 20세기 초반 많은 지식인이 다양한 사상 편력을 겪었지만 케슬러만큼 극적인 경험을 한 사람은 찾기 힘들다. 190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기자로 일하던 중 1931년 독일 공산당의 당원이 된다. 그 뒤 몇 년간은 코민테른을 위해 선전·선동 활동을 한다. 1937년에는 내전 중이던 스페인에 잠입했다가 프랑코의 파시스트군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는다.
독방에 갇혀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집행관을 기다리던 작가의 경험은 그대로 이 소설에 녹아 있다. 밤이면 옆방에 수용된 동료 죄수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가로세로 각각 여섯 발자국 반인 감방의 크기는 소설의 주인공이 갇혀 있던 방 크기와 똑같다. 한번은 그날 처형될 죄수를 위로해주러 온 신부가 케슬러의 방문을 열려고 하다가 “그 친구는 아니야”라는 간수의 말을 듣고 다른 방으로 발길을 옮기기도 한다.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던 케슬러는 다행히 프랑코의 심복인 공군 조종사의 아내와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된다.
그가 파시스트 때문에 죽을 고비를 겪은 경험은 이때만이 아니다. 스페인에서 석방된 뒤 프랑스에 머물던 그는 침공해오는 나치를 피해서 영국에 가려고 한다. 연인이던 조각가 다프네 하디(그녀는 나중에 을 영어로 번역한다)와 함께 탈출하려다 계획이 좌절됐다고 생각한 그는 발터 베냐민에게서 얻은 극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극우 세력으로부터 이 모든 고초를 겪었음에도, 결국 케슬러가 공격하는 것은 정반대 쪽에 있는 공산주의자다.
케슬러가 스탈린 치하의 공산주의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개인적 경험에 의한 부분도 크다. 그를 처음 공산주의로 이끈 것은 소꿉친구이자 어린 시절의 연인이던 에바 스트리커다. 헝가리의 유명한 인텔리 집안에서 태어나 도예가가 된 그녀는 29살이 되던 1935년 스탈린의 초청을 받고 소련에 가서 ‘소비에트 도예산업 예술감독’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겨우 1년이 지났을 때 에바는 스탈린 암살 음모에 참여했다는 혐의로 체포된다. 18개월 동안 혹독한 수감 생활을 하던 그녀는, 자신을 신문하던 수사관이 처형된 뒤 석방된다(그녀는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단독 전시회를 갖는 등 103살이 된 현재까지 성공적인 예술가로 살고 있다).
에바의 체포는, 그리고 그녀를 조사하던 수사관이 처형된 것은 1936∼38년 소련에서 벌어진 ‘대숙청’ 과정에서 일어났다. 부하린, 지노비예프 등 혁명 영웅이자 당 간부인 이들이 반혁명 혹은 간첩 혐의 등을 받고 고문당한 뒤 사형됐다. 이 기간 중 적어도 170만 명 이상의 소련인이 체포됐고, 140만 명 이상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70만 명 이상이 사형됐다. 숙청 작업을 주도한 비밀경찰 NKVD(KGB의 전신인 내무인민위원부)의 우두머리 예조프도 죽음을 면하지 못 했다. 예조프가 처형당한 뒤 스탈린과 함께 찍은 사진에서 그의 모습이 지워진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 일을 보면서 케슬러의 마음은 공산주의를 떠나게 됐고 결국 을 쓰게 된 것이다.
반공소설이 아니라 반전체주의 소설그러나 전향한 공산주의자의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쓴 이 소설이 단순한 ‘반공 소설’만으로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사상을 강요하고 사회 전체를 한 가지 색깔로 획일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한 항의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다양성을 건강한 사회의 표지로 이해하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포용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우리 사회의 ‘반공주의자’ 혹은 자칭 ‘자유민주주의자’가 이 책의 소개에 열성을 보이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주인공 루바쇼프는 공산주의 혁명의 화신과 같은 존재다. 40여 년의 세월을 빨치산 활동을 비롯한 투쟁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바쳤다. 그에게 개인이란 아무 의미가 없다. 오로지 당만이 모든 것이다. 그는 대화를 할 때 ‘나’라는 1인칭 단수를 쓰지 않는다. 주어로 ‘우리’라는 단어를 쓸 뿐이다. 국가와 당이 곧 루바쇼프 개인이고, 자신과 당은 한 몸이기 때문이다.
빨치산 대장 출신인 그는 과거의 부하들에게 낭만적인 모습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냉정한 정치가로 변신한다. 당에 불이익이 되거나 혁명 완수에 지장을 주는 사람은, 그 개인의 의도가 아무리 좋은 것일지라도 가차 없이 제거한다.
혁명 뒤 루바쇼프는 주로 외국의 공산주의자를 지원하는 일을 한다. 1933년 그는 당의 지령을 받고 독일에서 리처드라는 젊은 공산당원을 만난다. 1933년은 히틀러가 총리가 된 해다. 당연히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체포가 이어진다. 이제 갓 17살이 된 리처드의 임신한 아내도 체포됐다. 아내의 안전을 걱정하는 앳된 ‘혁명가’에게, 그러나 루바쇼프는 출당을 선언한다. 독일 공산당의 어려운 상황을 사실대로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리처드가 만든 유인물 내용이 진실이고 당에서 내려보낸 내용은 엉터리라는 것은 아무런 변명도 되지 않는다. 당은 항상 옳기 때문이다.
당은 항상 옳아야 한다?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도, 동무, 저를 이렇게 버리지 마, 마세요”라고 울먹이는 리처드를 버려둔 채 루바쇼프는 차갑게 떠나버린다. 독재국가에 상품을 수출하는 소련 공산당을 비판하던 또 다른 공산당원 로위도 비슷한 이유로 당에서 쫓겨난다. 그는 루바쇼프를 만난 지 사흘 만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다. 자신의 비서이자 애인인 알로바가 당에 체포돼 처형될 때도 루바쇼프는 냉정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밤 두 명의 남자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린다. 루바쇼프도 마침내 숙청 대상이 된 것이다.
루바쇼프의 혐의는 반혁명 조직과 동조해서 당의 지도자(시대적 배경으로 볼 때 스탈린이 분명하지만 책에서는 이름이 명시되지 않는다. ‘넘버원’으로 등장할 뿐이다. 그의 사진은 모든 벽에 걸려 있다)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이다. 조사 초기에 루바쇼프는 이 말도 안 되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다.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온 당을 배신하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모욕인가. 혐의를 인정하면 사형만은 면하게 해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한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이 혁명가는 무너져내린다.
루바쇼프가 굴복하게 된 데는 육체적인 고난도 분명히 한몫을 한다. 그는 예상과 달리 심한 고문을 당하지 않는다. 물론 눈물을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전등 아래서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못 자면서 신문을 받는 것은 분명히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로 하여금 모든 혐의를 자백하고 공개 법정에서 스스로 죄를 인정하게 한 결정적 요인은 자신의 신조였다. 당은 항상 옳아야 한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희생양이 되면 당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혐의를 부인하면 평생 지켜온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루바쇼프는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모든 죄를 인정하고 유죄판결을 받는다. 총살당하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은 ‘넘버원’의 모습이다.
마지막까지 대의를 위해 희생한 루바쇼프는 과연 후회가 없었을까. 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 그는 지난 인생을 돌이킨다. 그는 당과 혁명을 위해서 40년 동안 투쟁을 했고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과연 무엇을 위해서 죽는 것인지 자신에게 물었을 때 그는 아무런 대답도 찾지 못한다.
대숙청 시기에 처형된 한 혁명가의 최후를 묘사한 이 소설은 단순히 사회주의 체제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있지만은 않다. 이 책이 나오자마자 고전의 반열에 오르고 알베르 카뮈, 딜런 토머스, 장 폴 사르트르, 조지 오웰(그의 소설 에 나오는 신문 장면은 이 책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등 당대의 지성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그런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오히려 ‘옳은 길은 단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외의 선택은 모두 틀리고, 잘못된 생각을 하면 제거돼야 한다’는 편협한 논리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바쇼프는 자신의 편견을 지키기 위해서 죽어간 것이다.
천안함 사건, 교원노조 명단 공개 등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자신이 어느 편인지 밝혀야 하고 조금이라도 틀린 주장을 하면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스탈린 시대의 대숙청과 비교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자신과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역시 비판의 대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르트르는 이 책을 읽고 “나의 관점이 당신의 관점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당신의 주장이 절대로 옳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그것이 좌우 어느 형태를 취하는지에 관계없이 전제주의로 나아가게 된다. 루바쇼프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당을 위한 마지막 봉사’를 했음에도(부하린과 지노비예프 등도 혐의를 자백했다) 스탈린 체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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