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을 계기로 모든 사람이 동시에 한 시대가 지났음을 실감할 때가 있다. 사람들은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결코 잊지 못한다. 지난해 5월23일 아침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던 사람들은 그 순간의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할 것이다. 같은 일이 1963년 11월22일 낮 12시30분 미국인들에게 일어났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것이다.
암살을 둘러싼 조사단의 엇갈린 결론
팻 콘로이의 소설 에는 케네디 사망 사건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묘사된 장면이 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으로 믿었던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절망을 감추지 못한다. 운전을 하다가 라디오 뉴스를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갓길에 차를 세우고 흐느낀다. 과거와 달라졌다고 생각했던 세상은 여전히 한 치의 변함도 없이 옛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것만큼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것은 없다.
케네디와 부인 재클린 그리고 텍사스 주지사 코넬리 부부를 태운 리무진은 댈러스 시내 교과서 창고 건물을 지나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해온 고장이었지만 연도에는 대통령을 환영하는 인파가 줄을 지어 있었다. 케네디는 기쁜 마음으로 손을 흔든다. 앞자리에 탄 주지사 부인은 케네디를 돌아보며 “대통령님, 댈러스 시민이 대통령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못하시겠죠?”라고 말을 건넨다. 바로 그때 몇 발의 총성이 울린다.
뒤쪽에서 날아온 첫 번째 총알은 대통령의 등에 맞았다. 이것이 이른바 ‘마법의 탄환’이다. 이 총알이 계속 날아가 앞자리의 주지사를 관통했는지, 혹은 다른 곳에서 날아온 총알이 주지사를 맞혔는지에 관한 논쟁이 음모론의 핵심이다. 케네디를 승계한 린든 존슨 대통령은 암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워런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위원회를 만들었다. 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는 단독범이다. 그는 세 발의 총탄을 발사했는데 한 발은 빗나갔고 한 발은 케네디의 머리에 치명상을 입혔다. 따라서 공식 발표에 따르면 주지사를 맞힌 총알은 첫 번째 발사된 탄환일 수밖에 없다. 첫 번째 총알은 케네디의 등으로 들어가 목 부분을 뚫고 나왔다. 그 탄환은 다시 앞자리에 앉은 주지사의 등으로 들어가 갈비뼈를 부러뜨리며 튀어나온다. 계속 날아간 총알은 주지사의 오른쪽 손목을 관통하고 손바닥으로 나온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 총알은 최종적으로 주지사의 왼쪽 허벅다리에 박혀서야 파란만장한 여정을 끝낸다. 워런 보고서를 불신하는 사람들이 이 총탄을 ‘마법의 탄환’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사건이 일어난 지 15년 뒤 미국 의회는 또 하나의 조사위원회를 탄생시킨다. 워런 위원회의 조사결과를 검토한 뒤 의회 조사위원회는 놀라운 결론을 내린다. 오스왈드가 단독범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새로운 발표에 따르면, 암살 당시 발사된 총탄은 네 발이다. 오스왈드는 대통령이 탄 리무진의 뒤쪽 교과서 창고 건물의 6층에서 세 발을 쐈다. 마지막 한 발은 정반대 방향, 즉 리무진 앞쪽에 있는 언덕(여기서 언덕으로 번역되는 영어 단어는 ‘hill’이 아닌 작고 둥근 언덕이라는 뜻의 ‘knoll’이다. 잘 쓰이지 않는 이 단어는 케네디 암살 사건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고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음모론을 상징하는 단어로 패러디 대상이 된다)에서 발사됐다. 두 곳에서 발사된 총탄. 이는 이 사건이 단독 범행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암살 직후부터 꿈틀거리던 음모론은 이제 미국 의회의 인정이라는 뜻하지 않은 원군을 얻게 됐다.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음모론은 너무나 다양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은 음모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주인공들이다. CIA는 카스트로를 피해 미국으로 온 쿠바 망명자들과 함께 케네디 암살을 공모했다는 의심도 받는다. 하지만 정반대로 카스트로 쪽에서 암살 음모를 주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최근 화제가 됐던 에서 중국 출신 경제학자 쑹훙빙은 미국 연방준비은행을 지배하는 국제 금융재벌들이 케네디를 살해했다는 주장을 폈다. 케네디 정부가 은본위 화폐를 발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자신의 이익이 타격을 입을 것을 우려한 금융재벌들이 암살에 나섰다는 것이다.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었지만, 실제로 이 이론은 1989년에 이미 짐 말스라는 작가가 라는 책에서 주장했고 반론까지 나와 있는 상태다.
이렇게 많은 음모론이 등장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암살범인 리 하비 오스왈드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믿기 어려운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돈 드릴로의 소설 〈리브라: JFK 암살범에 관한 기록〉은 오스왈드의 별자리인 ‘천칭좌’(libra)를 제목으로 그의 인생과 대통령 암살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 그리고 우연과 필연을 절묘하게 뒤섞어놓았다.
1939년생인 오스왈드는 사생아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살이 되기까지 22번 이사를 다녔고 12번 전학을 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다른 집에 맡겨지기도 했다. 그는 난독증이 있었고 고등학교를 중퇴했지만, 닥치는 대로 책을 읽으려 했고 15살이 됐을 때는 공부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고 주장한다. 17살에는 해병대에 입대해 일본 아쓰기 기지에 근무한다. 아쓰기 기지는 소련 상공을 비행하는 CIA의 U2 정찰기가 발진하는 곳이다. 오스왈드는 국가안보의 최전선에서 복무하게 된 것이다. 3년 뒤 그는 소련으로 가서 망명을 신청한다. 소련 정부가 거절하자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겠다는 선언도 하고 소련 관리에게 U2기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는 제안도 한다. 마침내 그는 민스크로 보내져 공장 노동자가 된다.
그러나 현실의 공산주의 국가는 그의 상상과는 달랐다. 너무 단조로운 생활에 질린 그는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일기를 쓴다. 민스크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도 하나 갖지만 결국 4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케네디 암살이 일어난 해인 1963년 4월에는 널리 알려진 반공주의자이자 인종차별주의자인 에드윈 워커 장군을 저격한다. 친카스트로 단체와 반카스트로 단체에 모두 접촉을 한다. 멕시코로 건너가서는 쿠바를 거쳐 소련으로 가겠다고 하면서 쿠바 비자를 신청하기도 한다. 얼마 뒤 댈러스로 돌아온 그는 교과서 창고에 취직을 한다. 한 달 뒤 대통령에게 총을 쏘는 장소가 바로 그 회사 건물이다. 암살 당일 체포돼서는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한다. 이틀 뒤 수갑을 찬 채 구치소로 이송되던 오스왈드는 수많은 보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댈러스의 나이트클럽 지배인 잭 루비가 쏜 총에 맞아 숨진다.
돈 드릴로는 작가의 말에서 자신은 케네디 암살과 관련된 의문에 해답을 제시하려 하지는 않았다고 밝힌다. 소설 속에서는 CIA를 비롯한 다양한 인물의 음모가 강하게 시사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어느 한쪽의 결론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연과 필연, 실제로 일어난 일과 의도됐지만 실행되지 않은 일들이 층층이 겹치면서 어떤 일의 진상을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망설임 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작가·언론인소설이 아닌 현실에서의 공방은 어떨까. 최근에 이르러서는 음모론이 급격히 힘을 잃고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설이 다수설로 자리를 잡는 것처럼 보인다. 1993년 제럴드 포스너는 음모론을 공격하는 이라는 책을 써서 퓰리처상 후보에 올랐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부시를 살인죄로 기소해야 한다는 내용의 책을 써서 우리나라 독자에게도 친숙한 검사 출신의 빈센트 불리오시는 2007년 라는 1600페이지짜리 대작을 쓰고는 오스왈드의 단독 범행을 ‘입증’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이제 논쟁은 끝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는 불리오시의 책에 대한 서평에서 “음모론자들이 자신의 이론을 ‘입증’한 것처럼 불리오시는 단독 범행을 ‘입증’했다”라고 썼다. 다툼의 여지 없이 진상을 파악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돈 드릴로의 책을 비롯해 케네디 암살을 소재로 한 많은 책을 읽다 보면, 대통령 살해 사건을 다루면서도 언론인이나 작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온갖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데 하등의 망설임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양한 견해가 서로 부딪히고 공방을 벌인다. 틀린 주장을 하더라도 반박을 받을 뿐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천안함 사건이 일어난 뒤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구호가 다시 등장했다. 바로 ‘국론통일’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민·군 합동조사단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면 과학적 지식도 없으면서 전문가가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공격을 당한다. 이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합동조사단이 조사결과를 발표한 날 언론과의 일문일답을 보면 과학적 영역이 아닌 논리적으로도 모순을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연합TF단장인 황원동 공군 중장은 북한 잠수함의 침투 경로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침투 경로는 식별되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도주 경로를 묻는 질문에는 “침투한 경로로 되돌아간 것으로 확인됐다”고 대답했다. 비유를 하자면 이는 ‘A의 고향이 어딘지는 모른다. 그러나 A는 현재 고향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침투한 경로를 모르는데 침투 경로로 도주했다는 것이 어떻게 “확인”될 수 있는가. 차마 ‘국론’으로 ‘통일’할 만한 견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된다.
의문을 처벌하는 정부의 천안함 국론통일합동조사단 위원이던 신상철씨는 공식 발표와 달리 좌초설을 주장하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 수사를 받고 있다. 검찰은 그를 불러 좌초설의 근거와 배경을 캐묻고 있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일일까. 우리 정부와 북한은 세계 각국을 상대로 외교전을 펴고 있다. 조사단 위원을 수사하는 것은 북한에 더할 나위 없는 공격 거리를 제공하는 것 아닐까. 북한이 “남한은 정부 발표와 다른 의견을 말하면 소환해서 조사를 한다. 심지어 합동조사단 위원도 공식 견해와 다른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검찰에 불려가 수사를 받고 있다”고 비난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합동조사단은 전문가들이 모여 조사를 했기 때문에 절대로 옳고, 신상철씨의 주장은 절대로 틀렸다”라는 대답이 통할 수 있을까. 언론이 ‘국론통일’을 외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외교전에 도움이 될까.
케네디 암살 뒤 첫 번째 공식조사단의 단장이었던 얼 워런은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두 번째 조사단인 의회 조사단에서도 각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모여 철저한 조사를 했다. 그 두 조사단이 내린 결론은 전혀 다르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는 돈 드릴로는 진실이 얼마나 다양한 모습을 가졌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인지에 관한 책을 썼다. 천안함 민·군 합동조사단의 발표와 다른 주장은 모두 유언비어고 공식 발표가 절대로 옳은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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