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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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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범에겐 법정이 필요 없나



암살범의 인간적인 동기를 그린 살만 루슈디 <광대 샬리마르>…

‘군사위원회’를 급조해 테러범을 처벌한 부시 정부는 옳았나
등록 2010-08-19 15:12 수정 2020-05-03 04:26

에너미 컴배턴트(Enemy Combatant). 9·11 사건 이후에 미국에서 유행한 용어다. ‘적 전투병’ 정도로 직역할 수 있는 이 말이 자주 등장하게 된 것은 9·11 사건에 연루된 용의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가 문제됐기 때문이다. 민간인이 범죄 혐의를 받고 체포되면 ‘피의자’가 된다. 나라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형사소송법에 따라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진술거부권·보석신청권 등의 권리를 갖게 된다. 검사가 기소를 하고 일반 법정에서 배심원 혹은 판사에게 재판을 받는다. 조지 W. 부시의 미국 정부는 테러리스트에게 이런 권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민간인이 아닌 전투병으로 다루려 했던 것이다. 군인이 전투 중에 사로잡히면 피의자가 아니라 단순히 포로가 될 뿐이다.
그들에겐 군사재판도 과분하다?

〈광대 샬리마르〉

〈광대 샬리마르〉

물론 포로라고 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적법한’ 전투 중에 포로가 된 군인은 1949년에 만들어진 제네바협약에 따른 처우를 받는다. 인격적인 대우를 해야 하고 생명의 위협이나 고문은 금지된다. 만일 포로가 저지른 어떤 행위에 대해 처벌을 하려면 “문명국에서 인정되는 모든 형사절차상의 권리가 보장된 정규적인 법정에서 선고된 판결”에 의해야 한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테러범으로 체포된 사람들을 ‘적법한’ 포로로 대우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9·11 이후에 쓰이던 에너미 컴배턴트라는 용어는 제네바협약이 규정하는 포로에 해당하지 않는 ‘불법 전투원’을 의미했다.

불법 전투원이란, 예를 들어 교전 중 적군에 침투해 정보 수집을 하는 스파이 혹은 군복을 입지 않고 몰래 적진에 잠입해 인명을 살상하거나 재산을 파괴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런 활동은 적법한 전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체포되면 제네바협약에 따른 처우를 받지 못한다. 군사재판을 거쳐 처벌 받게 된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9·11 관련 용의자를 비롯한 테러리스트들에게 일반적인 군사재판을 받게 해줄 생각마저도 없었다.

2001년 9월18일 미 의회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군사력의 사용 승인’이란 결의안을 채택한다. 그리고 이 결의를 근거로 부시 대통령은 ‘대테러 전쟁 중 미국 시민이 아닌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구금·처우·재판’이라는 행정명령을 내린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 시민이 아닌 특정한 사람들’은 바로 알카에다나 탈레반 등 테러조직의 구성원이나 그 지지 세력으로 의심받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이들이 바로 에너미 컴배턴트다.

부시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테러범을 일반 군사법원도 아닌 ‘군사위원회’라는 곳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이 왜 테러범이라고 해서 일반 법정이나 혹은 그것이 어렵다면 통상적인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할 수 없느냐고 비판했다. 부시 행정부는 재판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라고 답변했지만, 결국 이런 논란 때문에 실제 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는 데는 몇 년이 걸려야 했고 테러범에 대한 재판은 일반 사건보다 오히려 오래 걸리게 되었다.

부시 미 전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테러범을 일반 군사법원도 아닌 ‘군사위원회’라는 곳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갇힌 포로들. EPA

부시 미 전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테러범을 일반 군사법원도 아닌 ‘군사위원회’라는 곳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관타나모 미군기지에 갇힌 포로들. EPA

무죄판결 받아도 풀려나지 못해

군사위원회에서 재판을 받는 테러 용의자들은 민간 법정이나 일반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인정되는 권리를 갖지 못한다. 불리한 증거를 반박하기는커녕 자신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된 증거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다. 국방부가 고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강압적인 조사로 얻어낸 증거도 사용될 수 있다. 변호인을 자유롭게 선택할 권한도 없다. ‘기밀 정보를 볼 자격이 인정된’ 변호사들 중에서 고를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국방장관인 럼즈펠드는 군사위원회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은 ‘불법 전투원’이기 때문에 설사 무죄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석방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무죄를 선고받아도 풀려나지 못한다면 재판을 받을 이유를 찾기 어렵다.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수감된 테러 용의자들이 집단으로 재판을 거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군사위원회가 위헌인지 여부는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연방 지방법원은 위헌으로 판단했으나 항소법원은 합헌이라고 했고, 연방대법원은 다시 위헌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2006년 미국 의회는 연방대법원의 위헌판결을 무력화하는 ‘군사위원회법’을 통과시켰다. 연방대법원은 이 법률의 일부 조항에 대해 다시 위헌판결을 했고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은 법률의 독소 조항을 개정한 법률에 서명했다.)

사법 시스템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했던 미국이 이렇듯 무리한 절차를 밀어붙인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9·11 사태에 따른 충격 때문이다. 독립 이후 최초의 본토에 대한 공격, 2976명에 달하는 사상자(그중 펜타곤에서 사망한 55명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이 민간인이었다)는 미국을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미국인이 보기에 이런 짓을 저지르는 테러리스트는 도저히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알카에다·탈레반 등 테러조직의 구성원에게 법치주의의 혜택을 준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 아닐 수 없다. 민간 항공기를 몰고 빌딩으로 돌진하는 놈들은 이미 인간으로 대접받기를 포기한 놈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테러리즘을 그렇게 단순히 절대악으로 치부하고 분노와 격분의 대상으로만 삼는 것이 과연 ‘이기는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이 어린 소년들과 임산부까지 동원해 자살폭탄 공격을 감행하고,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해치는 잔인무도한 행동을 옹호할 마음은 전혀 없다. 나름의 분쟁과 갈등의 역사를 가진 세계 각지에서 생겨난 테러리즘에 공통된 원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잔인한 테러를 저지르는 범죄자라고 해서, 애초에 그 동기를 알아볼 생각조차 갖지 않는 것은 너무 성급한 일이 아닐까. 우리가 그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으로 단정하고 공포와 적개심만 느끼게 되는 것이야말로 잔혹한 테러를 기획하는 자들의 목적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인도 카슈미르 출신인 한 테러범의 범행 동기를 파헤친 살만 루슈디의 는 일독의 가치가 있다.

 

아내를 빼앗긴 광대의 분노

주인공인 테러리스트 샬리마르는 주인도 미국대사를 지낸 막시밀리안 오퓔스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오퓔스 전 대사는 딸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고, 샬리마르는 암살 계획을 가진 채 그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딸 인디아가 보는 앞에서 오퓔스 대사는 참혹하게 살해당한다.

인도 대사를 지낸 오퓔스는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며 미국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저명한 정치인이다. 어딘지 케네디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그는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업을 하는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가업으로 배운 인쇄술을 이용해 레지스탕스를 돕기 위해 위조신분증을 만드는 일을 한다. 나치에 의해 부모가 수용소로 끌려가자 전설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부가티가 만든 비행기를 몰고 영국으로 탈출해 영웅이 된다. 탈출을 도와준 레지스탕스 동지와 결혼한 그는 이제 자유의 상징이다. 종전 직전에는 미국 브레턴우즈에서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탄생의 산파역을 맡아 새로운 ‘세계공동체’를 만드는 데 한몫한다. 그 뒤 미국에 귀화해서 인도 대사를 지낸다.

그와 반대편에 있는 암살자 샬리마르를 이해하려면 비극의 땅 카슈미르의 역사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슈미르 주민의 다수는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이지만 통치자는 힌두교도인 마하라자였다. 1947년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마하라자는 카슈미르를 인도에 합병하는 결정을 한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이 반발했고 인도와 전쟁을 하게 된다. 두 나라는 그 뒤로도 두 번 더 전쟁을 벌인다. 카슈미르 일부가 티베트에 속한다고 주장하는(티베트는 중국의 일부이므로 결국 중국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중국도 분쟁의 한 축을 이룬다. 그런 곳에서 무슬림의 아들로 태어난 샬리마르는 같은 마을에 사는 힌두교도의 딸인 부미 카울과 사랑에 빠진다. 종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을 주민들은 둘의 결혼을 받아들인다. 마을 최고의 줄타기 광대 샬리마르와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무희 부미, 두 사람의 앞날에는 축복만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게 행복하게 끝나지 않는다. 전통 공연을 보기 위해 마을을 방문한 오퓔스 대사는 부미를 보고 욕정에 눈이 먼다. 대사는 부미를 인도 뉴델리로 초대하고 결국 첩으로 삼는다. 부미는 도시 한구석의 아파트에서 밤마다 오퓔스를 즐겁게 해주는 노리개로 전락한다. 절망에 빠진 샬리마르는 이슬람 군사조직에 합류하고(탈레반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를 연상시키는 인물과 조우하기도 한다), 점차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는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 언젠가 오퓔스 대사와 부미, 그리고 그들 사이에 생긴 아이를 죽이는 것이다.

테러범은 ‘정치적 기계’가 아니다

카슈미르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비극을 풍부하게 담은 이 소설에서 루슈디는 모든 사람은 똑같은 감정과 욕망의 노예라고 말하는 듯하다. 브레턴우즈 체제를 만든 미국 정치인을 암살하는 카슈미르 출신의 이슬람 테러리스트. 겉으로는 정치적 대립으로만 보이는 모습이지만, 그 깊은 속에는 아내를 빼앗긴 남편의 질투와 복수심이 있는 것이다. (샬리마르를 진정으로 절망하게 하는 것은 미국 대사가 부미를 강제로 끌고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부미는 시골 마을과 광대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서 스스로 오퓔스를 유혹한다.)

금태섭 변호사

금태섭 변호사

테러리즘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할 수는 없다. 모든 테러범이 감정적 동기에서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가정이다. 그러나 테러범이라고 해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정치적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보는 것도 너무나 단순한 사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종 청소” “하나를 죽이면 열 명이 겁을 먹는다”는 구호가 난무하는 카슈미르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얼굴을 가진 존재다. 종교와 지역에 따라 편을 나눈 채 피비린내 나는 보복을 주고받는 환경에서 줄타기 광대를 하다가 아내를 잃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쉽게 바라볼 수는 없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급조된 ‘군사위원회’의 재판을 통해 테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단견이 아닐 수 없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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