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피의자가 범행을 자백했는데도 불구하고 무죄가 선고된 사건이 두 건 연달아 언론에 보도됐다. 하나는 이른바 ‘노숙소녀 살해사건’이고 또 하나는 44건의 절도사건을 자백한 미성년자와 지적장애인이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피의자들은 수사기관에서 혐의를 인정하고 자백하는 진술을 했다. 신문 과정에서 강압적인 언행이 있었다는 주장이 나오기는 했지만, 고문을 당했다거나 참기 어려운 폭행을 당했다는 얘기는 없었다. ‘노숙소녀 살해사건’의 경우 자백하는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까지 있었다. 그럼에도 법원은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자백에도 무죄가 선고된 최근 사건들
‘노숙소녀 살해사건’은 2007년 5월14일 새벽 수원역 부근에서 노숙 생활을 하던 15살 소녀가 사망한 채 발견되면서 시작된 사건이다. 경찰은 노숙인 2명을 범인으로 지목해 체포했고, 그들은 각각 징역 5년과 벌금형을 받았다(벌금형을 받은 사람은 폭행이 시작될 때만 현장에 있다가 그곳을 떠났다는 이유로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두 사람은 ‘꼬맹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20대 남녀 2명과 함께 사망한 소녀를 폭행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해가 바뀌어 2008년이 되자 수원역 부근에 있는 노숙인들 사이에서 이 사건의 주범이 따로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검찰이 직접 나섰다. 수소문 끝에 15살부터 19살까지 5명의 미성년자를 검거했다. 가출해 노숙 생활을 하는 청소년들이었다. 그중 한 소녀가 ‘조건만남’을 하고 받은 2만원을 잃어버렸는데, 이들은 그 돈을 피해자가 가져갔다고 생각하고 폭행해 결국 사망하게 했다는 것이 검찰의 논리였다. 5명의 청소년들(검찰에 따르면 이들이 바로 ‘꼬맹이’다)은 모두 범행에 가담했다고 자백했다. 1심에서는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2심에서는 허위 자백이란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대법원에서무죄가 확정됐다
‘44건의 절도사건’(833호 줌인 ‘10대 피의자, 잔인한 자백의 추억’ 참조)도 전개 과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도난 사고가 빈발하는데 범인이 잡히지 않자 관할 경찰서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동종 사건으로 검거된 피의자를 상대로 여죄를 추궁하거나, 우범자를 상대로 탐문 수사를 하거나, 심지어 관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조사를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수사기록에는 ‘보조열쇠를 육각렌치와 드라이버로 제끼고 침입하는 수법에 비추어 중국인들의 범행 수법과 비슷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를 근거로 중국인들을 용의선상에 올렸던 것이다).
초조해진 경찰은 급기야 청소년들을 상대로 수사를 확대한다. 그중 한 명에게는 “아는 형들 다 불러봐라”는 주문까지 한다. 겁에 질린 소년은 ‘아는 형들’의 이름을 줄줄이 댔고, 그중 두 명이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경찰은 범행 현장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에 찍힌 범인의 모습이 그들과 비슷하다면서 추궁했고(실제로는 키를 비롯한 인상착의가 달랐을 뿐만 아니라, CCTV에 찍힌 영상은 정확한 식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조사 과정에서 피의자들이 CCTV 영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지만 경찰은 “그냥 인정하라”면서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44건이나 되는 절도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들은 애초에 ‘아는 형들’ 이름을 대면서 자기들의 이름을 포함시킨 소년이 자신들을 밀고했다고 생각했고, 그 소년과 함께 도둑질을 했다고 진술함으로써 나름의 복수를 했다.
이 사건은 재판 과정에서 극적인 반전을 겪는다. 휴대전화 발신지 추적 결과 자백한 44건의 절도사건 중 25건이 일어난 때에는 범행 현장에 있지 않았던 것이 객관적 으로 밝혀진 것이다. 아무리 자백을 했어도 도난 장소에 가지도 않은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법. 결국 검사는 25건의 절도 범행에 대한 기소는 취소하고 19건만 남겼는데, 재판부는 이마저도 믿기 어렵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사형 집행 전날 나타난 진범
필자는 우연히도 이 두 사건 모두에 대해 언론과 인터뷰를 하게 됐다. 담당 PD들은 피의자들이 자백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고, 그 이유에 대해 거듭 질문을 던졌다. “불리할 걸 뻔히 알면서 왜 범행을 했다고 자백했을까요?” “말은 안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폭행을 당한 것 아닐까요?” “혹시 부인을 했는데 경찰관이 엉터리로 조서를 작성했을 가능성은 없나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최근 서울 양천경찰서에서 피의자를 고문한 사건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지만, 대체로 우리나라 수사기관에서 자백을 받기 위해 폭행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다. 그리고 자백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백을 한 것처럼 엉터리로 조서를 ‘꾸미는’ 경우도 이제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자백을 할까? 이들이 무죄라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인정했다는 것인데, 도대체 어떤 심리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존 그리샴의 책 (The Confession)은 폭행·협박이 없이도 허위 자백을 하게 되는 상황을 현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제조기’라는 별명에 걸맞게 존 그리샴의 소설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극적인 스토리로 이루어져 있다. 인종갈등이 여전히 남아 있고 미국에서 사형 집행 건수가 가장 많은 텍사스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치어리더 여학생이 실종된다. 주검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살해된 것이 점차 분명해진다. 그때 학교 미식축구부의 주장인 흑인 학생 돈테 드럼이 그 여학생과 몰래 사귀고 있었다는 소문이 돈다. 질투에 눈먼 여학생의 백인 남자친구는 돈테의 차가 여학생이 실종된 곳 부근에 주차돼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돈테는 체포되고 경찰의 추궁 앞에 범행을 자백한다. 나중에 변호사를 만난 돈테는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텍사스주 법원은 사형을 선고하고 9년 뒤 집행일을 하루 앞두게 된다.
바로 그때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는 성폭력 전과가 네 번 있는 전과자이자 말기 암으로 몇 개월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환자였다. 피해자를 본 순간부터 집착하게 됐고, 결국 납치해 수백km 떨어진 곳까지 끌고 간 다음 살해하고 주검을 숨겼다는 것이다. 사형 집행을 하루만 연기해주면 피해자의 주검을 찾아 진상을 밝힐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돈테의 변호인은 필사적으로 법원에 상소를 하고, 주지사에게 집행을 연기해달라고 청원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 성폭행 전과자의 자백을 믿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등장해 주목을 받아보려는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돈테가 허위 자백을 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할 때는 실제로 죄를 지었으니 자백한 것이라고 몰아붙이던 사람들이 막상 진범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백을 하자 허위 자백이라며 믿지 않는 것이다. 결국 돈테는 자신의 가족과 피해자의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극약 주사를 맞고 짧은 생을 마친다. 다음날 성폭행 전과자는 돈테의 변호인들과 함께 피해자의 주검을 찾아나서고, 결국 발견해 자신의 말이 사실임을 입증한다. 텍사스주는 억울한 사람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경찰관의 선처를 기대하며돈테의 자백을 받은 경찰관은 오랜 경력을 가진 베테랑 형사였다. 신문 과정에서 그는 올바르지 않은 조사 기법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있지도 않은 공범이 자백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경찰서로 찾아온 부모가 아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막기도 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백을 끌어낸 것은, 변호사를 불러달라고 해야 하느냐고 묻는 돈테에게 그가 던진 이 말이라고 생각한다. “변호사는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어. 변호사는 피해자를 살려놓지도 못해. 변호사는 너를 구해줄 수 없어, 돈테.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지.” 고립무원의 지경에서 밤새 조사를 받은 돈테는 경찰관에게 ‘선처’를 받기 위해 하지도 않은 범죄를 저질렀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실제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사건이 있다. 1993년 11월29일 서울 관악경찰서에 순경으로 근무하던 현직 경찰관의 애인이 여관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함께 투숙했던 그 경찰관이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을 받았고, 동료 경찰관들의 설득 끝에 범행을 자백한다. 그는 구속된 뒤 검찰에 와서부터 범행을 부인한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면하려면 자백을 해야 한다는 동료들의 회유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물론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매일 얼굴을 보던 동료 경찰관들은 그에게 고문은커녕 욕설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일반인도 아닌 경찰관이 단순히 중형을 피하려고 자백을 했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1심과 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 뒤 극적으로 진범이 잡혔고, 그의 자백은 허위라는 것이 밝혀졌다. 대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때때로 수사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변호인이 꼭 있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검찰이나 경찰도 공정하게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 최선을 다하고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는데, 굳이 변호인을 선임할 필요가 있느냐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공정하고 양심적인’ 검사나 경찰관만으로는 부족하다. 피의자가 ‘자기 편’이라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문명국의 형사소송법이 변호인 제도를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의자가 가진 무기가 ‘선처를 호소하는 것’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허위 자백이 나올 수 있다.
집념이 낳은 잘못된 결과‘노숙소녀 살해사건’이나 ‘44건의 절도사건’을 수사하고 기소한 경찰관이나 검사가 그들이 억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죄판결을 받으려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건을 담당한 사람들은 범죄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찾으려 노력했고, 피의자들의 자백이 진실하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열정과 집념이 잘못된 결과를 낳을 때도 분명히 있다. 돈테가 억울하게 사형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담당 검사와 경찰관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면서 자책감을 지우려고 한다. “그 녀석은 자백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러나 그런 독백을 하는 것만으로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고문당하지 않는 한 허위로 자백하는 일이 없다고 믿는 수사관들에게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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