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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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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전쟁은 범죄다



전쟁의 수렁에 빠진 병사의 비극, 조지프 헬러의 소설 <캐치-22>
등록 2010-12-09 16:25 수정 2020-05-03 04:26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대단한 호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진 이명박 대통령의 참모들이, 노 전 대통령이 무척 좋아했던 미국 정치드라마 <웨스트윙> DVD를 이 대통령에게 선물해 화제가 된 일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진이 지금까지 했던 몇 안 되는 잘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웨스트윙>의 전편을 세 번 이상 본 광팬의 입장에서 순전히 느낌을 말하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드라마를 너무나 열심히 본 나머지 주인공인 바틀렛 대통령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 같고, 이명박 대통령은 모처럼 나온 참모들의 좋은 권유에도 한 편도 보지 않은 것 같다).
 
명령의 정당성이 전제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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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에 비키 힐튼이라는 해군 파일럿이 등장한다. 그녀는 F14 톰캣을 조종한 최초의 여성이고 우수한 실적으로 중령 자리에 오른 최고의 엘리트다. 군대 내 남녀차별의 장벽을 헤치고 정상의 자리로 달려가던 힐튼은 어느 날 명령불복종죄로 체포된다. 유부남인 부하 장교와 연인 관계이던 힐튼이 관계를 끝내라는 상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간통은 미국법상 범죄가 아니다. 군대 규칙에도 기혼인 동료 혹은 부하와 연애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 법적으로만 볼 때 힐튼이 받은 명령은 개인의 사생활에 간섭하는 부당한 지시였던 것이다.

군대 경험이 없는 바틀렛 대통령은 그녀를 사면하려고 한다. 나중에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아이젠하워는 군인 시절 참전 중인데도 비서이자 부하 장교인 케이 서머스비와 연인 관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남자 군인들이 흔히 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여군이라고 해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는 것이 바틀렛의 논리였다. 이에 맞서 참전군인 출신인 비서실장 리오는 아이젠하워에게 서머스비와 만나지 말라고 명령한 사람은 없었다고 반박한다. 힐튼은 부하 장교와 연애를 했다고 처벌받는 것이 아니라, 헤어지라는 명령에 불복종해서 군사재판에 회부된다는 것이다. 군인에게 명령이란 생명과 같은 것이어서 설사 불합리한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전쟁터에서 전투 명령을 받은 병사가 그 명령이 적절하다고 판단할 때는 따르고 다른 더 좋은 대안이 있다고 생각되면 복종하지 않는다면 군대의 존립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바틀렛 대통령은 이 말에 동의하고 사건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군대에서 명령이 갖는 의미에 대한 리오의 논리에는 수긍이 간다. 그러나 명령에 절대 복종을 요구할 수 있으려면 명령의 정당성에 대한 검증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 구체적인 명령을 내리기 전에 그 명령으로 달성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히 설정돼야 하고, 목적의 달성 경로에 대한 계획도 마련돼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목적이 정당하려면 당연히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전쟁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비참한 상황에 빠지게 하므로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달성이 필요한 목적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결정이, 그리고 전쟁 중의 상황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논리적인지를 내용과 형식을 통해 보여주는 소설이 조지프 헬러의 <캐치-22>(Catch-22)다.

주인공 요사리언은 2차 대전 당시 유럽에 파병된 미군 병사다. 폭격기에 타고 폭탄을 투여하는 임무를 맡은 그는 죽기를 두려워한다. 꾀병을 부려서라도 죽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그의 소원이다. 그런 그를 가로막는 것이 소설의 제목으로 쓰인 ‘캐치-22’(영어 단어 catch에는 ‘법의 조항’이라는 뜻과 ‘함정’이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는 ‘제22조’쯤으로 번역할 수 있다)이다. 정신이 이상해진 군인은 귀향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군의관은 이렇게 설명한다. “미치면 임무를 면제받을 수 있지. 신청만 하면 돼. 하지만 전투에서 빠지겠다고 신청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면제 신청을 하는 사람은 다시 전투에 나가야 하네.” 이것이 바로 ‘캐치-22’라는 조항의 논리다. 소설 제목으로 만들어진 이 단어는 그 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키는 일반명사로 쓰이게 됐다. 소설은 주인공들의 비현실적인 대화와 비논리적인 상황의 연속으로 점철돼 있다. 사건 배열도 시간적 순서를 무시한 채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 전쟁이란 상황의 모순을 형식을 통해서도 보여주려는 것이 작가의 의도다.

최근 북의 연평도 포격으로 위기를 맞은 우리의 상황은 어떤가. 우리 정부는 과연 군인들에게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명령을 내리고 있는가.

‘확전 자제’는 목표가 아닌가
» 이명박 대통령이 11월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연평도 사태에 대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담화문은 ‘대북 강경 대응’을 담고 있었다. 와대사진기자단

» 이명박 대통령이 11월29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연평도 사태에 대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날 담화문은 ‘대북 강경 대응’을 담고 있었다. 와대사진기자단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상황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포격 직후 벌어진 ‘확전 자제’ 논란이 대표적인 예다.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사태 직후 “확전이 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발표했지만, 청와대는 나중에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심지어 잘못된 발언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국방부 장관과 국방비서관을 경질하기까지 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확전 자제’가 우리의 전술 혹은 전략적 목표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확전 자제’가 목표인 것은 맞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그런 발언을 한 사실은 없는데 국방비서관이 ‘확전 자제’라는 말을 전한 것이라면 단순한 소통의 문제다. 그러나 애당초 ‘확

전 자제’가 우리 목표가 아니었고 대통령도 그런 말을 한 일이 없는데 비서관이 그런 말을 했다면 도대체 이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는 분단 상황에서 북한이 도발을 감행할 것을 예상하고 미리 대처 계획을 세우는 것은 정부가 당연히 해야 할 의무다. 다양한 침범 시나리오 중에는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도서가 포격을 당하는 경우에 관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가 최우선적으로 상정해야 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전쟁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공습을 감행하는 등 ‘몇 배로 응징’해서 우리가 입은 피해를 넘는 타격을 입히는 것인가. 혹은 확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북한의 공격과 비슷한 수준의 반격을 하는 것인가. 우리 정부의 모습을 보면 애초에 그런 목표 자체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국방부 장관을 경질한 뒤에도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관한 정부의 분명한 설명이 없다.

빠른 승전이란 오래된 거짓말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다 보니 다양한 종류의 주장이 나온다. 그중에 하나가 전쟁불사론이다. 한 신문은 심지어 전면전이 벌어지더라도 3일 이내에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으므로 국민이 3일만 견뎌주면 승리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싣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3일을 견디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인지, ‘견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역사를 보면 그런 주장이 옳다고 입증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반박할 수밖에 없다.

6·25 이전에 남한의 국방 책임자들이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외치면서 전쟁이 벌어져도, 심지어 북침을 하더라도 손쉽게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들은 한강 철교를 폭파하고 줄행랑을 놓았다. 전쟁 중에 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았다. 대량살상무기의 존재를 이유로 이라크전을 일으킨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개전 2개월 뒤인 2003년 5월1일 미 항공모함 에이브러햄링컨호 선상에서 ‘임무 완수’라고 적힌 배너를 배경으로 자랑스럽게 승전을 선언했다. 주요 전투는 모두 끝났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전사한 미군 수는 139명이었다. 그러나 부시의 승전 선언 이후 서른 배에 가까운 4천 명의 미군이 더 전사했다. 이라크 민간인의 경우 그때까지 사망자 수는 7500명이었지만, 전쟁이 사실상 종료됐다고 선언된 이후 6만 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3일만 견디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들을 알고 하는 말이냐고 묻고 싶다. 전쟁의 결과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 목표는 ‘평화 유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캐치-22>의 주인공 요사리언은 전투에 나가야 하는 처지를 한탄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날 죽이려고 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동료인 클레빈저는 “자넬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들은 누구에게나 포를 쏴. 그들은 누구나 다 죽이려고 해”라고 반박한다. 나만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죽이려 한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전쟁이란 이런 논리가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요사리언이 귀향을 위해 마쳐야 하는 출격 수는 25회에서 30회, 30회에서 50회로 계속 늘어난다. 우리가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것이 애초에 예상된 시간에 끝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전쟁을 부추기는 것도 범죄다

<웨스트윙>에는 전범재판소의 승인과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 리오는 미국이 전범재판소에 관한 협정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반대하는 현역 장군과 설전을 벌인다. 전쟁에는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이 있고, 전쟁 중에 허용되는 행위와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가 있는데,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범죄’는 국적에 상관없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차 대전 중 리오의 동료였던 장성은 리오가 출격 임무를 맡아 폭격한 다리가 사실은 군사시설이 아니었고 그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전쟁은 범죄라네.”(All wars are crimes) 전쟁은 범죄다. 그리고 범죄를 부추기는 것도 범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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