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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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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매도 폭력을 낳는다


체벌 금지 논란과 ‘빳다’ 때리는 재벌을 낳는 사회…
폭력의 세계로 빠져드는 아이들을 그린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등록 2010-12-29 17:11 수정 2020-05-03 04:26

서울시 교육감의 학생 체벌 금지령으로 언론이 뜨겁다. 마치 지금까지는 교권이 깍듯이 존중을 받아왔는데 이 지시 하나만으로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갑자기 선생님에게 대들고 심지어 야단을 치는 교사에게 덤벼드는 일까지 있다는 보도가 줄을 잇는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조치”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교육과학기술부도 한마디 협의도 없이 체벌 금지 지시를 한 것은 파급효과를 감안하지 않은 신중치 못한 처사라고 비판한다. 심지어 선거 과정에서 교육감을 지지한 전교조마저 전면적인 체벌 금지에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권위적인 학교에서 교장이 교사를 체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10년 9월14일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회원들이 경기 평택시 한국관광고등학교 앞에서 교사를 체벌하는 교장을 처벌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권위적인 학교에서 교장이 교사를 체벌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2010년 9월14일 ‘평등교육 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회원들이 경기 평택시 한국관광고등학교 앞에서 교사를 체벌하는 교장을 처벌하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탁기형

체벌 금지 논란의 이면

속으로 끓던 갈등이 결정적으로 터진 계기는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젊은 여교사를 폭행했다는 사건이었다. 수업시간에 교재를 가져오지 않은 학생이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자 주먹으로 얼굴을 여러 차례 때렸다는 것이다. 스승을 입원시킨 패륜적인 제자에게 각계의 비난이 쏟아졌다. ‘학생의 인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권도 중요하다’ ‘막장 교실인데도 체벌 금지 타령하나’ 유의 사설이 지면을 장식했다.

나중에 이 사건의 진상은 최초의 보도와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교사가 수업 준비가 부실한 학생들에게 서로를 때리도록 지시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친구를 때리라는 지시를 거부한 학생에게 교사는 “너 지금 대드는 거냐”고 하며 ‘엎드려뻗쳐’를 시켰고, 학생이 욕설을 하자 다시 “너 그렇게 돈이 많냐. 때려봐”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얼굴을 내밀었다는 것이다. 일부 학생은 교사가 학생들이 서로 때리는 장면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기까지 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만족스러운 소리가 날 때까지 때리도록 지시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최고로 교육적인 장면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장면을 연출한 교사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어나면서 이 사건의 파장은 점차 가라앉는 듯하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건 스승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을 한 제자를 용서하기는 어렵겠지만 애초에 상식에 맞지 않는 지시를 한 교사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잘못이 있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것도 매일 얼굴을 보는 친구들에게 서로 때리라고 하는 것은 비교육적인 차원을 넘어 거의 변태에 가까운 가학 취미 아닌가. 그리고 이 경우는 체벌이 없기 때문에 학생이 교사에게 대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체벌을 했기 때문에(학생들에게 때리는 일을 대신 시킨 것도 엄연히 체벌이다)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이 사건이 체벌 금지 문제와 관련된 일반적 사례로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만일 정상적인 사례라면 어떨까? 그야말로 ‘교육적인’ 목적을 위해 ‘적절한’ 체벌을 한 경우라면 어떨까? 흔히 화가 나서 때리는 감정적인 체벌은 허용할 수 없지만, ‘사랑의 매’는 필요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어린 시절 잘못된 길로 접어들거나 방황을 할 때 엄한 매로 정신을 차린 추억을 되새기면서 스승의 고마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그런 체벌은 정당한 것일까?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자면 그런 체벌이 더 나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파리대왕

파리대왕

나는 체벌에 반대한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반대하는 정도를 넘어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화를 참기 힘들다. 사람들 사이에 얼마든지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일단은 들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고, 감정이 앞서면 합리적인 비판을 할 수 없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래도 체벌 찬성론에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체벌이 우리가 사는 사회를 폭력사회로 만든 가장 큰 주범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맞고 자랐다. 지금 성인이 된 사회의 구성원 중에 자라면서 선생님에게 한 대도 맞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전 국민이 맞으면서 자라는 사회가 폭력적이지 않은 곳이 될 수 있을까.

목적을 위한 폭력의 정당화

체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최소한 다음 두 가지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로 유럽이나 일본, 미국의 학생들은 체벌 없는 교육을 받는데 왜 우리 청소년들은 매를 들어야만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다. 유럽 각국과 일본에서 체벌은 불법이다. 미국 대다수의 주에서 체벌은 불법이며, 일부 허용되는 주에서도 체벌을 하려면 부모의 명시적인 동의를 받도록 하는 곳이 많다. 심지어 학생이 체벌을 거부할 경우 정학 등 다른 수단으로 대체하도록 하는 곳도 있다. 최근 많은 부모들이 기러기 생활을 감수하면서 어린 자녀를 유학 보내지만 외국에서 맞으면서 학교를 다닌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다.

우리 청소년들이 다른 나라 아이들에 비해 특별히 우수하다고 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뒤처진다고 볼 근거는 더욱 없다. 우리나라에서 정규교육을 마친 사람들에 비해 유럽이나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다른 나라의 아이들보다 못하지 않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다른 나라보다 특별히 뛰어난 교육을 제공하지도 못하면서 매를 들어야 하는가. 일제시대에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조선 놈들은 맞아야 말을 들어” 하면서 매질을 했다는 아픈 기억을 꺼내지 않더라도, 체벌을 앞세우는 교육은 무엇보다도 학생들을 신뢰하지 않는 데서 출발하기에 찬성할 수 없다.

두 번째 질문은 때리면서 교육을 하다 보면 은연 중에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해도 괜찮다’는 것을 가르치게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든 교사가 체벌을 할 때 사적인 감정은 철저히 배제하고 순전히 교육적인 목적에서 매를 든다고 가정해보자. 체벌의 수단도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적절한 정도라고 해보자. 선생님들은 개인적 편차 없이 일정한 경우에만 매를 때려서, 학생들도 어떤 짓을 하면 맞게 되는지 예상할 수 있다고 치자.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세상에는 맞을 만한 짓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 동료가 맞는 것을 보면서, ‘저 녀석은 그런 짓을 했으니까 맞는 게 당연해’라고 방관하게 되지 않을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친구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때려서라도 고쳐줘야 한다고 나서게 되지 않을까. 만일 맞고도 정신을 못 차리면 더 때려서라도 고쳐줘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맞을 짓을 한 놈은 때려도 된다’는 생각만큼 때려서라도(!)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생각이 또 있을까. 그리고 매에 내성이 생기는 만큼 폭력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지는 것은 아닐까.

어둠을 더하는 우리 안의 폭력

노동자를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때리고 ‘맷값’이라며 2천만원을 건넨 전 M&M 대표 최철원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12월2일 서울지방경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노동자를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때리고 ‘맷값’이라며 2천만원을 건넨 전 M&M 대표 최철원씨가 조사를 받기 위해 12월2일 서울지방경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폭력에 무감각해지고 그럼으로써 점점 더 심한 폭력의 세계로 빠져드는 아이들의 세계를 그린 책이 윌리엄 골딩의 이다. 핵전쟁이 벌어진 뒤 한 무리의 소년들이 무인도에 떨어지게 된다. 처음에는 합의해 대표를 뽑고 발언권을 가진 사람(소라를 집어들면 발언권을 갖는다)을 존중하면서 제법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를 이루어가던 아이들은 점차 두 패로 나뉘어 반목하게 된다. 봉화를 올려 외부의 구조를 기다려야 한다는 랠프와 멧돼지 사냥을 하면서 군대 같은 조직을 만드는 잭이 양쪽의 우두머리다. 봉화를 피우거나 사냥한 멧돼지를 구우려면 피기라는 소년이 쓴 안경으로 불을 붙여야 한다. 충분히 사이좋게 렌즈를 돌려 쓸 수 있을 것 같은 두 무리는, 그러나 무의미한 폭력의 세계로 빠져든다.

마틴 루서 킹은 폭력에 호소하는 것의 궁극적인 약점은 그것이 점차 악화되는 데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폭력에 폭력으로 답하는 것은 결국 폭력을 몇 배로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별도 없는 어두운 밤하늘에 더 깊은 어둠을 더하는 것이지요.” 처음 피기의 안경알 한쪽을 깨는 데서 시작된 아이들의 폭력은 점차 창으로 공격하는 전투로 번지고 마침내 거리낌 없이 상대방을 죽이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잭의 입장에서 볼 때 ‘사냥꾼이 되지 못하고, 고기를 대주지도 못하고, 그저 명령이나 내리면서 복종을 바라는’ 랠프의 행동은 지도자로서 잘못된 것이다. 때려서라도, 폭력으로라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이렇듯 폭력으로 빠져 들어가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핵전쟁을 벌인 어른들의 영향인지, 혹은 애초에 인간 본성의 문제인지 작가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궁극적인 ‘악’이 폭력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책의 제목인 파리대왕(lord of flies)은 헤브루어로 악마를 가리키는 ‘베엘제버브’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 소설 속에서 작대기 끝에 꽂힌 멧돼지 머리의 형태로 나타나는 파리대왕은 이렇게 말한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왜 모든 것이 틀려먹었는가, 왜 모든 것이 지금처럼 돼버렸는가 하면 모두 내 탓인 거야.” 모든 것을 틀려먹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일부가 돼버린 폭력인 것이다.

얼마 전 재벌가 출신의 한 사업가가 파렴치한 폭력 사건을 일으켜 세상을 분노하게 했다. 초등학교 후배인 그 친구와 어릴 때 스케이트 시합에 나간 일이 있다. 지금 이유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다른 학교 아이들과 시비가 붙게 되었다. 말썽을 피하기 위해 후배들을 끌고 자리를 빠져나오는데, 그 후배와 함께 온 어떤 어른(부모님인지 혹은 다른 분인지는 모르겠다)이 후배를 쫓아와 야단쳤다. 상대방이 잘못했으면 패주고 와야지 왜 그냥 물러섰느냐는 것이다. 무참하게 사람을 때리고 맷값을 던져줬다는 뉴스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그 장면이 떠올라 몸서리쳤다.

그 재벌의 ‘빳다’는 체벌을 닮았다

나는 그 후배를 그렇게 만든 원인 중에 체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피해자와 맞붙어 싸운 것이 아니다. 몰려가서 뭇매를 놓은 것도 아니다. 무릎을 꿇려놓고 “나이 먹은 사람도 돈 벌려고 꼬박꼬박 출근하는데 젊은 놈이 돈 뜯어먹으려고 한다”고 훈계하면서 ‘빳다’를 때린 것이다. 그 장면에서 체벌을 떠올리는 것이 비약일까. ‘잘못했으면 맞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심어준 어른들의 잘못을 비판한다면 잘못 짚은 것일까.

체벌은 때리는 사람에게나 맞는 사람에게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폭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생각을 심어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몸에 새겨진 폭력성은 절대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아무리 감정이 섞이지 않은 ‘사랑의 매’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 가르쳐주신 모든 선생님께 깊이 감사하고 지금도 존경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라면서 맞은 매 중에서 한 번이라도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준 매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 모든 매는 예외 없이 감정이 섞인 매였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은가.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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