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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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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함을 판단하는 곤란한 잣대



대법원이 “괴벽스러운 섹스”라 판결한 <내게 거짓말을 해봐>

예술기법에 대한 판단을 법원이 하는 것은 정당한가
등록 2010-07-08 13:35 수정 2020-05-03 04:26
예술을 법의 잣대로 평가하려고 애쓰는 것은 법원의 오래된 전통이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거짓말〉의 한 장면.

예술을 법의 잣대로 평가하려고 애쓰는 것은 법원의 오래된 전통이다.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영화화한 〈거짓말〉의 한 장면.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이탈로 칼비노가 라는 책에서 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인용하는 구절이고, 들으면 절로 쓴웃음이 나오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내용이기도 하다.

도 음란물이었다

맞는 말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도 차마 남들 앞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이나 스타인벡의 를 처음 읽는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누구나 내용을 아는 디포의 나 셰익스피어의 을 읽을 때는, 주위에 실제로 완역본을 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마치 불온서적이라도 되는 양 몰래 숨어서 읽게 된다. 무엇을 배우기에 너무 늦은 때란 없다고들 하지만, 어려서 읽었어야 하는 책을 붙잡고 있으면 조금 창피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모든 고전이 여기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고전 중에는 평단과 독자의 찬사를 동시에 받으면서도, 너무나 심오하고 너무나 방대하고 너무나 어려워서 읽기는커녕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책들이 있다. 고전 중의 고전. 아무리 나이가 많이 들어서 처음 읽어도 부끄럽지 않은 책. 그중 하나로 내놓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 제임스 조이스의 다.

모더니즘 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이 책은 우선 부피에서 다른 책들을 압도한다. 대형 판형으로 1300쪽이 넘고 무게도 2.5kg에 달한다. 침대에 누워 편안히 볼 만한 책은 결코 아니다. 읽지 않고 들고만 다녀도 최소한 근력 향상에는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마음의 양식’이 아닌 ‘몸의 양식’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칭송을 받는 것은 당연히 외형 때문이 아니다. 조이스가 호메로스의 에서 영감을 얻어 썼다는 이 소설은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평범한 독자를 질리게 만든다.

26만5천 단어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모두 3만30개의 단어가 등장한다. 그중 2천여 개는 조이스가 새로 만들어낸 단어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긴 김종건 교수는 1968년부터 2007년까지 40년 동안 세 번에 걸쳐 번역본을 개정해야 했다. 각각의 구절이 뜻하는 의미를 해석하려면 더욱 어려워진다. 작가인 조이스는 이 소설 속에 “너무나 많은 수수께끼와 퍼즐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수세기에 걸쳐 그 의미를 두고 논쟁을 벌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사서는 읽어볼 엄두도 못 내고 책장에 꽂아놓은 채 가끔 한 번씩 쓰다듬어보며 좋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가 단지 비평가의 찬사만을 받는 박제와 같은 존재는 아니다. 소설의 내용은 1904년 6월16일(이날은 조이스가 장래의 아내인 노라 바나클과 첫 데이트를 한 날이다) 단 하루 동안 주인공인 레오폴드 블룸이 더블린시에서 겪는 일이다. 이날을 기념해 매년 6월16일을 ‘블룸스데이’(Bloomsday)라고 부른다. 전세계에서 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블린시를 찾아 소설의 장면을 재현하면서 즐거워한다. ‘책 중의 책’은 인기도에서도 빠지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해 보이는 책에도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다.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조이스의 는 1922년 미국에서 ‘음란물’이라는 판정을 받고 판매 금지가 됐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자위행위 장면이 문제였다.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은 한 소녀가 검찰에 신고했다. 소설의 일부를 발췌해 실은 잡지의 발행인은 벌금형을 받았다. 판결을 선고한 판사는 이 책에 대해 “정신이 나간 사람이 쓴 것 같다”고 평했다.

1933년 랜덤하우스는 수입이 금지된 를 프랑스에서 들여오면서 세관에 신고를 한다. 다시 한번 법의 판단을 받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다행히 문학에 대해 이해가 깊은 판사를 만났다. 연방법원 판사인 존 울시는 조이스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칭송하면서 이 책이 진지한 예술작품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등장인물들이 섹스에 대해 생각하는 장면이 반복되지만, 그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예술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 판사의 결론이었다.

초임 검사 시절, 나오자마자 구입
 〈내게 거짓말을 해봐〉

〈내게 거짓말을 해봐〉

도대체 이렇게 두꺼운 책의 어느 부분에 성적으로 흥분이 되는 내용이 담겼는지 궁금할 따름이지만, 담당 검사는 용케도 이 책에서 성적으로 자극적인 내용을 찾아내 “소중한 도덕적·종교적·정치적 믿음에 위협”이 된다고 주장한다. 검찰은 1심에서의 패소에 굴하지 않고 항소를 했지만, 항소심 법원은 2 대 1로 검찰의 항소를 기각한다. 다만 항소심 판사들도 대중의 불필요한 흥미를 유발하지 않기 위해 판결문을 쓸 때 소설에 나오는 구절을 한 줄도 인용하지 않기로 합의한다. 일반인에게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법의 끈질긴 노력은, 나라에 관계없이 눈물겨운 데가 있다.

음란물을 근절해 사회의 도덕을 세우는 역할을 자임하는 것은 비단 미국 법률가들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외설이냐, 예술이냐’ 논란이 되는 작품이 나올 때마다 전면에 등장해 예술작품의 음란성을 따지는 것은 검사와 변호사들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음란물로 낙인찍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사라진 책 중 하나가 장정일의 라는 소설이다.

이 책은 1996년 10월10일 김영사에서 출간됐다. 당시 초임 검사이던 나는 우연히 한 잡지에서 이런 내용의 책이 출간된다는 기사를 읽고 서점에 미리 주문해 나오는 날 바로 구입했다. 성적 묘사에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우리 법조계의 관행에 비춰볼 때 나오자마자 단속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출간된 그달에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제재권고 결정을 받았다. 다음달에는 출판사인 김영사의 상무가 음란물 판매죄로 구속됐다. 프랑스에 체류 중이던 작가는 그해 말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1심 재판 결과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항소심 과정에서 보석으로 석방되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지만 유죄판결에는 변함이 없었다. 책이 나온 지 4년 가까이 지났을 때 대법원은 유죄판결을 확정했고, 이 소설을 둘러싼 법적 논란은 끝나게 됐다.

다독으로 유명한 사람들에 비해 그리 많은 책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장하는 책 중에 희귀본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 소설이다. 불법으로 낙인찍혀 더는 나올 수 없는 책의 초판본인 것이다. 책장 한구석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볼 때마다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수집 가치가 있는 유일한 책이 법원에 의해 음란물로 선언된 책이라니.

소설의 내용은 의외로 단순하다. 별 볼일 없는 유부남 조각가인 제이(J)는 18살의 여고생 와이(Y)를 만나 성관계를 갖는다. 여관을 전전하며 성에 탐닉하던 두 사람은 점점 가학·피학적 성행위에 빠지고 결국 배설물을 먹거나 몸에 심한 상처를 줄 정도로 폭행을 주고받는 단계에까지 접어든다. 와이의 오빠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헤어지고 와이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SM클럽에 가서 손님들에게 채찍질을 하는 ‘여신’이 된다. 제이의 아내는 자신의 곁으로 돌아온 제이에게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고 묻는다.

성기가 크면 외설, 작으면 예술?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주인공인 제이는 상상 속 존재인 ‘신버지’의 목소리를 느낄 때마다 두려움에 떤다. ‘신버지’가 박정희의 파벌에 들지 못해 옷을 벗게 된, 엄격한 군인이었던 제이의 아버지를 상징하는지, 혹은 독재자를 의미하는지, 혹은 억압적 사회 분위기 자체를 형상화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독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제이는 ‘신버지’의 망령에 시달리면서 어린 와이와 가학적 성행위를 갖다가 나중에는 오히려 와이에게 때려달라고 부탁하는 피학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가 와이와 섹스를 하는 모습은 두 사람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이 혼자 자신을 억압하는 권력(그것이 가상이든 실제든)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물론 법원이 이 소설을 해석하는 시각은 우리와 다르다. 대법원 판결문에서 중시된 것은, “괴벽스럽고 변태적인 섹스 행각의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와이는 성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한 달여 동안 제이와 이른바 폰섹스를 하고 괴벽스러운 섹스행각을 벌이면서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이를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보다 개방된 성관념에 비추어보더라도 음란하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두 사람이 전화로 성적 대화를 하거나 오럴섹스를 하는 게 왜 ‘괴벽스럽다’는 것인지, 성경험이 ‘전혀’ 없는 여자는 한 달 동안 ‘괴벽스러운’ 섹스를 하면서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왜 안 된다는 말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지만, 어쨌든 ‘보다 개방된 성관념에 비추어보더라도 음란하다’는 데는 할 말이 없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을 법의 잣대로 평가하려고 애를 쓰는 것은 법원의 오래된 전통이다. 하지만 그 기준은 명확하지도 않고, 정당하지도 않다. 2005년에 선고된 ‘김인규 교사 사건’에서 대법원은 변기 바닥에 남자의 성기를 그린 그림에 대해서는 성기가 발기되지 않았고 작게 그려졌다는 이유로 음란물이 아니라고 하면서, 임신한 아내와 벌거벗고 찍은 사진에 대해서는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는 이유로 음란물이라고 판단했다. 변기 그림에 대해서는 ‘성기가 크면 외설이고, 작으면 예술이냐’는 조롱이 따랐고, 누드 사진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광주비엔날레에 전시됐던 예술품이라는 점에서 비판이 줄을 이었다.

단순히 평가의 차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술 기법에 대해서 한 수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자임하는 판례의 태도다. 대법원은 “꼭 본인 부부의 나신을 그렇게 적나라하게(얼굴이나 성기 부분을 적당히 가리지도 않은 채) 드러내 보여야 할 논리적 필요나 제작기법상의 필연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과연 이런 판단을 법원이 하는 것이 정당할까. 누드 사진의 얼굴 부분을 가려야 할지 여부를 법이 정해야 하는 것일까.

불과 5년도 못 버틸 잣대
금태섭 변호사

금태섭 변호사

장정일을 변호했던 강금실 전 법무장관은 이 책이 출간된 지 5년이 지난 뒤 ‘장정일을 위한 변명’이라는 글을 썼다. 소설에 나오는 내용 중 가장 노골적인 성 묘사가 인용돼 있지만 강 전 장관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사이 인터넷이 등장했고 책이 출간되던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양과 질의 포르노가 우리 주위에 존재하게 됐기 때문이다. 검찰이 강 전 장관의 글을 문제 삼아 다시 기소를 했다면 웃음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겨우 5년도 유지되지 못할 기준으로 문학작품을 처단한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이었을까.

예술을 법으로 재단하려는 시도는, 적어도 시간이 흐른 뒤에 보면 그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1922년 제임스 조이스의 를 판매 금지한 미국 법원은 과연 옳은 일을 한 것일까. 2000년 장정일의 를 음란물이라고 선언한 대법원은 반드시 필요한 일을 한 것일까. 이 두 개의 판결이 없었다면 사회가 조금이라도 ‘비도덕적’이 됐을까. 15년 전 출간된 ‘음란물’을 다시 읽는 내내 그런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금태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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