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없는 겨울 논이 분주했다. 2024년 3월6일 오후 수천∼수만 마리 철새가 전라남도 순천만과 맞닿은 들판으로 날아들었다. 새떼로 하늘이 까맣게 뒤덮였다. 내려앉은 새들은 부리로 깃을 다듬었다. 낙곡(떨어진 낟알)으로 허기를 채웠다. 검은 망토에 안대를 두르고 머리엔 흰 두건을 쓴 듯했다. 정수리 쪽 단정한 붉은 점이 화룡점정이다. 이 지역 ‘비담’(비주얼 담당) 흑두루미다. 전세계 1만8천여 마리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종이다. 하천·습지·농경지·갯벌로 이어지는 순천만 일대 생태계에선 겨우내 수천 마리의 흑두루미떼를 쉽게 볼 수 있다. 러시아 하바롭스크 추미칸 습지대에서 출발해 중국의 쑹화강과 한국의 충청남도 서산 천수만 등을 거치는 편도 2500㎞ 긴 여정 끝에 11월 중순 순천만과 일본 이즈미시로 날아들어 겨울을 나고 이듬해 3월 말 되돌아간다. 이날도 흑두루미 4589마리가 확인(순천시 일일 모니터링)됐다.
이런 순천도 개발 광풍을 피하지 못한 우리나라 다른 여러 지역 중 하나라는 과거가 있다. 순천만 흑두루미도 절멸 직전까지 내몰렸다. 무리 규모는 1990년대 수십 마리 수준까지 줄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당시엔 갈대가 뿌리 내린 모래톱이 각종 개발을 위한 골재로, 갈대숲은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곳으로 인식됐다. 식당도 즐비했다. 겨울철 순천만에 뜬 배들은 갯벌을 찾은 새떼를 향해 경적을 울려댔다. 소스라치게 놀라 흩어지는 새들을 향해 관광객들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즐거워했다.
당시 전국 35개 환경단체가 멸종위기종의 서식지인 순천만 습지 파괴 문제와 관련한 연대회의체를 구성했고 각종 학술대회와 워크숍을 개최했다. 골재채취 허가과정에서의 환경영향평가가 부실했다며 감사원에 신고도 했다. 사상 첫 국민제안감사 청구였다. 국제 환경단체들도 순천시에 습지 보존을 요구하는 항의서한을 보내며 힘을 보탰다. 1997년 시민단체들이 주축이 돼 ‘제1회 순천만 갈대제’를 열었다. 지금의 ‘순천만 갈대축제’의 전신이다.
결국 순천시가 백기를 들었다. 1998년 순천만 골재채취 허가를 취소했다. 시 정부의 반응은 더뎠지만, 그래도 흑두루미와의 공존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발하는 주민들 설득은 또 다른 문제였다. ‘생태보전’이란 말 자체도 매우 낯선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갈대밭에 불을 질러 항의 시위를 하거나 담당 공무원을 흉기로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순천만 습지가 있는 대대마을의 한 음식점 주인은 “그동안 대대 주민들은 철새들과 더불어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습지보전지구로 지정된다니 매우 당혹스럽다. 뜨내기 철새들이 주인인 주민들을 내쫓는다는 사실이 우습기만 하다”(<한겨레> 1998년 11월23일치)고 말했다.
인식은 점점 바뀌었다. 2003년 순천만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추진 5년 만이었다. 2006년에는 람사르 습지로 등록됐다. 김경만 순천시 순천만보전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주민 피해에 대해 충분히 설득하고 보상하려 했어요. 주민 동의가 중요하거든요. 특히 그 과정에서 단체장과 행정(기관)의 추진 의지가 가장 중요했던 것 같아요.”
2007년에는 주민대표·전문가·시민단체 등 20명이 참여한 순천만습지위원회가 구성됐다. 순천만 습지와 관련한 정책을 심의·자문하는 기구다. 2008년엔 순천시 공간을 절대보전·완충·전이·도심 공간으로 구역화(Zoning)해 순천만 습지의 개발을 막는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김경만 과장은 “쉽게 말해 도시 팽창을 정책으로 막은 거죠. 남승룡로라고 있는데, 이 길까지가 개발의 마지노선이라고 시가 선언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9년에는 철새 도래지 일대 전신주 282개가 제거됐다. 이착륙 때 철새들이 죽거나 다치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식당들도 습지 밖으로 이전됐다.
물론 순조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순천만 습지 관리의 주도권을 놓고 시와 시민사회 사이에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다. 순천지역 30여 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순천만 지키기 시민회의’가 2010년 10월 시민 93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순천만 습지 관리를 행정기관 주도에서 주민·시민단체 참여 체제로 바꾸고, 순천만 습지 입장료 수입의 30%를 주변 주민들에게 돌려주는 등의 내용을 담은 주민청원 조례를 발의했다. 순천시는 수정안을 내며 반발했다. 토론회·간담회 등 주민 의견 수렴이 이어졌다. 3년5개월 만인 2014년 3월 이 조례안은 시의회를 통과했다. 이런 거버넌스(의사결정 체계) 구축은 2018년 순천시가 전세계 최초로 ‘람사르습지 도시’로 지정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됐다.
이날 순천만 습지 옆 들판의 바깥 두둑을 따라 갈대를 묶어 세운 긴 벽이 눈에 띄었다. 최정민 순천만보전과 해양수산연구사는 이 벽을 두고 “‘빛공해’ 등으로부터 철새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9년부터 순천만 인근 논은 100%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흑두루미 영농단지’로 지정됐다. 2015년부터는 안풍·대대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흑두루미지킴이’가 흑두루미를 보호하고 먹이를 제공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9년 80여 마리에 불과했던 흑두루미는 2015년 1432마리, 2020년 3132마리, 2023년 8662마리로 늘어났다.(순천시 조사) 전세계 흑두루미 개체수도 10년 새 1만 마리에서 1만8천 마리로 늘어나고, 겨울 서식지 역시 이즈미시 중심에서 순천시를 포함한 거점 두 곳으로 늘어났다. 흑두루미가 늘자 관광객도 늘었다. 2002년 10만 명 수준이던 순천시 방문 관광객 수는 제1회 순천국제정원박람회가 열렸던 2013년 440만 명으로 늘었다. 이어 2019년엔 617만 명, 제2회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린 2023년엔 980만 명까지 증가했다. “단순히 흑두루미 몇 마리가 찾아왔는지가 포인트가 아니에요. 흑두루미 눈높이에 맞춘 각종 정책을 펼치다 환경이 좋아져 주민들이 살기 좋아졌고 도시 경쟁력이 높아졌어요.” 황선미 주무관이 말했다.
습지 보존·복원 정책을 시행하면서 순천시의 ‘젖줄’ 동천을 따라 내륙습지와 연안습지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복원됐다. 이 정책은 2010년부터는 해룡면 농주리를 시작으로 한 갯벌복원사업으로 이어졌다. 순천만 갯벌 복원은 순천만 동쪽의 장산지구(2016∼2020년)와 화포지구(2020년 시작해 현재 진행 중)로 이어지고 있다.
낮 동안 농경지와 하천, 습지 등을 누비던 흑두루미는 밤이 되면 순천만 갯벌에서 잠을 청한다. 인간의 눈에선 각각 용도가 다른 별개의 공간이지만, 흑두루미 처지에선 순천만 일대를 비롯해 인근 고흥·보성·광양 등이 커다란 집이다. 실제로 2023년 2월 순천시 위치추적 결과를 보면, 흑두루미 활동 반경은 순천만을 중심으로 121㎢에 달한다.
2024년 3월6일 늦은 오후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가운데 순천만 서편 해룡면 농주리 갯벌을 찾았다. 순천만 습지에서 2㎞ 거리다. 염생식물인 칠면초와 갈대가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자라고 있었다. 불그스름한 집게발들이 갯바닥에 살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멸종위기종인 붉은발말똥게가 온화한 날씨에 때 이른 바깥 구경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갯벌 보전·복원 중 가장 잘된 사례로 평가받는 순천만 갯벌은 2021년 7월 전남 보성·신안, 전북 고창, 충남 서천 등과 함께 ‘한국의 갯벌’로 묶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법적 근거가 있음에도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거버넌스가 흔들린다는 점 등에서 과제도 여전하다. 윤석열 정부의 긴축재정 기조에 따라 신규 갯벌 복원 추진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순천만 염습지에 칠면초·갈대 군락지를 복원하는 ‘블루카본(해양생태계가 흡수하는 탄소) 강화 사업’, 순천만 염습지 해안선 복원 사업 등에 대해 2023년 중앙정부에 예산 지원을 건의했지만 거절됐다.
2021년 4월 순천시가 화포항 인근에서 시행한 ‘어부십리길 조성사업’ 공사 추진 과정도 문제였다. 절대보존공간인 순천만 갯벌 한가운데 길이 1㎞, 높이 3∼3.5m, 넓이 2.5m짜리 해상 데크를 만드는 공사였는데, 순천만습지위원회의 여러 위원이 반대했다. 그러자 순천시는 반대했던 위원들을 제외한 별도 협의체를 구성해 공사를 강행했다.
김인철 소장은 순천만 갯벌의 지속가능성을 우려했다. 여전히 건간망(말뚝에 그물을 걸어 밀물 때 들어온 게·새우·물고기 등을 썰물 때 잡는 어구)은 허가받은 것의 10배 이상 많이 설치돼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우화처럼 순천만의 갯벌도 수산자원도 그러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그래도 표를 의식해서인지 대책을 내지 못하고 있죠. 갯벌 복원도 용역을 줘서 결국은 토목공사 하던 사람들이 합니다. 제방을 허무는 것까진 좋은데 10년 이상 긴 안목으로 사후모니터링은 어떻게 할지, 새로운 거버넌스가 필요한 건 아닌지 고민해야 합니다. 또 복원 타깃 종을 무엇으로 할지 등에 대한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생태관광 쪽도 주민을 참여시켜 복원 혜택을 주민과 나누는 정책이 부족하고요. 순천만이 습지보전지구로 지정된 지 20년이에요. 순천이 걸어온 길은 단순히 한 지자체의 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생물다양성 (유지·증진) 리더로서 다른 지자체들이 따라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만큼 고민이 깊지 않아 보여요.”
멸종위기 철새를 보호하려면 전국적인 관심·지원이 필요하다. 흑두루미만 해도 원래 천수만을 거쳐 순천만에 이르는 서해안 루트 외에 강원도 철원을 통해 낙동강을 통하는 별도 이동경로가 있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시절 4대강 공사로 길 하나가 끊어져버렸다. 흑두루미와 같이 다리·목·부리가 긴 섭금류 새들은 습지·갯벌 등 자작자작하게 물이 얕은 곳에서 생물들을 잡아먹고 살아간다.
10여 년째 순천만 습지의 생태 보존·복원 관련 일을 맡아온 황선미 주무관도 이렇게 말했다. “흑두루미는 러시아와 중국의 소택지와 숲이 우거진 늪지대에서 번식합니다. 순천만에서 월동하는 모습을 보면 갯벌에서 잠자고 주변 농습지에서 먹이 활동을 합니다. 순천만 흑두루미 보전 역사는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면 습지에 대한 이야기예요. 잠자리인 연안습지(갯벌), 그리고 인간의 식량을 생산하는 내륙습지(농경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전 지구적인 습지의 간척과 개발이 이곳에서 서식하던 흑두루미를 멸종위기종으로 몰고 간 것이지요.”
우리나라 갯벌 면적은 1987년 3203.5㎢였던 것이 시화호·새만금 등 대규모 간척사업 등의 추진으로 2008년 2489.4㎢로 21년 사이 22.3%나 급감했다.(2018년 해양수산부 전국 갯벌 면적 조사) 그나마 1999년 습지보전법 제정, 2021년 갯벌법(갯벌 및 주변 지역의 지속 가능한 관리와 복원에 관한 법률) 제정 등 갯벌 보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뒤 감소 속도는 더뎌졌다.
황 주무관은 이어 말했다. “순천이 잘해서 순천만에 1만 마리, 1만5천 마리가 날아들 수 있지만 멸종위기종이 한 지역으로 집중하는 것은 결코 건강한 모습은 아닙니다. 다른 지역도 흑두루미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퍼져나가는 게 좋겠죠.”
이동경로 단일화, 서식밀도 증가는 무리 지어 사는 습성이 있는 흑두루미 등 멸종위기종들이 조류독감 등에 쉽게 노출되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2022년 겨울 이즈미시 흑두루미 서식지에 조류독감이 퍼져 1천여 마리가 집단 폐사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2023년 2월 국제두루미재단은 한국·일본에 두루미들이 월동할 잠재적인 5∼6개의 새로운 지역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농기계 발달로 낙곡이 줄고 가축용 사료 수입가격 인상으로 볏짚이 대부분 수거되는 점, 비닐하우스 등 각종 농업시설물 증가 등도 생물다양성 유지 차원에서 중앙정부의 세세한 관심과 적절한 지원이 필요한 대목이다. 순천만 사례에서 나왔던 충분한 보상과 설득 과정은 흑두루미 등 다른 생물과의 지속 가능한 동행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려면 국가적 노력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환경부의 생태계서비스 지불제(2021년 시행)가 있어서 볏짚을 팔지 않고 놓아두면 보상해주거나 겨울에 논에 물을 채워서 습지를 좋아하는 흑두루미 등이 머물 수 있도록 하면 보상하는 제도가 있지만 중앙정부가 예산을 잘 늘리지 않아요. 새들을 보호해서 무슨 직접적 혜택이 있느냐고 합니다. 새들을 위해 농업을 저농약으로 짓고 둠벙 같은 곳을 만들어 생물다양성을 높이면 마찬가지로 인간도 생태적으로 건강한 환경에서 살 수 있고 삶이 풍요로워지는 혜택이 돌아옵니다. 새는 그 지표가 되죠. 농약 때문에 제비가 잘 안 보이고, 둠벙 대신 수로를 콘크리트로 정비하고 나니 개구리가 크게 감소했습니다. 이미 많은 생물이 그간 우리가 환경을 망가뜨리는 바람에 사라졌습니다. 우리에게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기섭 한국물새네트워크 대표가 지적했다.
순천(전남)=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서산(충남)=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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