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어릴 적부터 시장이 그렇게 좋았다. 할머니 손을 잡고 따라간 5일 장터는 천국 중에서도 상천국! ‘뻥!’ 소리가 나고 고소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뻥튀기 집을 지나면 “한번 묵어봐”라며 튀밥 한 줌을 쥐어주던 밀짚모자 쓴 주인 아저씨가 반가웠다. 할머니는 달달한 팥죽을 한 그릇 내 앞에 놓아두시고는 이웃 할머니를 만나 수다를 나누느라 정신없으셨다. 난 괜찮았다. 설탕을 솔솔 뿌려서 맛있게 익은 김치랑 함께 먹는 팥죽에 콧등을 빠뜨릴 정도로 얼굴을 박고 먹느라 나 역시 정신이 없었으니까.
때때로, 아니 어쩌면 항상 그리웠다. 시장이라는 공간이. 서울에 시장은 많다. 사람들이 북적대고, 상인들이 흥정하는 목소리가 왁자지껄한 그곳. 부침개 부치는 기름 냄새에 옛 기억이 소환돼, 입안에는 금세 침이 고인다. 어릴 적 시장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물건과 상인이 서울 시장에 있었다.
많았지만 없었다.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 말이다. 관광특구화된 서울의 시장 곳곳에는 장터의 수다보다는 일터의 짜증이 더 많이 느껴지곤 한다. 그런 곳에서 정을 나눌 단골 가게를 찾는 것은 무의미했다. 이제 나에게 서울의 시장은 1년에 한두 번 찾는 핫플레이스 관광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독특한 시장이 열린다는 곳을 찾아가보기도 했다. 유기농 재료로 만든 음식이 차려지고,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손바느질로 만든 가방이 좌판에 나오는 그런 시장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관광지’의 냄새는 진했다.
과감히 시장을 열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였다. 정과 대화를 나눌 시장을 찾기 어려워졌으니 차라리 시장을 열어보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작은 시장이면 됐다. 물건이 많을 필요도 없었다. 새 물건보다 헌 물건이 더 많았다. 이웃끼리 벼룩시장을 열었다. 또래 친구들은 저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필요 없는 물건은 많은데 어디다 내놓아야 할지 모르겠고, 될 수 있으면 아는 사람이 써줬으면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 “밖에서 카페나 식당에서 수다 떠는 거 말고 뭐 없을까 했어. 그렇다고 아파트 단지 정자에서 누군가가 오길 하염없이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말이야.” 그랬다. 우리는 이야기가 필요했고, 일상의 물건을 나눌 이웃이 필요했다.
이웃의 작은 거실에서 각자 만든 음식을 한 접시씩 모으니 여느 시장 바닥의 소박한 음식점 못지않았다. 부침개, 샐러드, 화채…. 남김없이 먹느라 수다는 길게 이어졌다. 아마 수다를 오래 떨고 싶어서 서로 음식을 아껴 먹었는지도 모른다. 집 안 장터는 그렇게 소박하고 즐거웠다. 5월에는 아파트 정자에 자리를 잡고 시장을 한번 열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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