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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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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 마음 편하게

등록 2014-02-25 13:37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박미향

한겨레 박미향

친구의 연애상담을 한참 들어주던 중에 친구가 문득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이것 봐, 내가 너한테 하소연하면 너도 공감보다는 조언에 가까운 말을 해주잖아. 똑같은 조언인데 왜 남자친구가 공감보다 조언을 해주려고 하면 화가 나지?” 남자친구가 공감보다 조언을 하려고 하면 화가 난다는 친구의 말은 멀리 날아가고, 내가 공감보다 조언에 가까운 말을 자주 한다는 말만이 차 찌꺼기처럼 남았다. 흰 머그잔 바닥에 남은 커피를 꽤 오래 보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말이 왜 그렇게 가슴 구석에 걸리나 했더니, 스스로도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 너무 힘을 많이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나보다. 한밤중에 방구석에 누워 있다보면 가슴 가운데 맺힌 말들이 전구처럼 밝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때마다 휴대전화의 연락처 목록을 살펴보지만 정작 연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말해서 뭐해’라는 생각이 늘 발에 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차피 정답이나 해설을 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으면서 뭐하러 그 많은 말을 가슴에 주렁주렁 달아두고 살았나 싶다. 그렇게 생각을 죽 따라 올라가다보면 결국 남들도 내게 정답이나 해설을 바라는 게 아닐 텐데 괜히 열심히 듣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혼자 오버를 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끔 눈이나 마주치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이 사람이 지금 이런 문제로 힘들구나’라고 생각했으면 될 일이었다. 그 친구라고 12시간 동안 연락 한 통 없는 남자친구 문제를 내가 해결해줄 거라고 기대했겠는가.

너무 오래도록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내색을 하는 데 많은 힘을 썼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한명 두명 친구들의 하소연을 피해왔다. 이제 그 연애상담을 한 친구 외에 내게 자신의 속 아픈 이야기를 하는 친구는 한두 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 지금 당장 휴대전화를 켜고 친구들에게 안부 문자를 돌릴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나중에 혹 연락이 오거든 그때는 정말 잘 들어줄 수 있을 듯한 생각이 든다. 대단한 액션이나 엄청난 정답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냥 ‘응, 그래’ 정도의 맞장구면 된다. 그 사람들은 내게 정답을 바란 것이 아니다. 내가 그때 이야기를 했건, 하지 않았건 어차피 내게 상담했던 친구는 12시간 동안 연락 한 통 없던 남자친구와 여전히 잘 사귀고 있다.

김자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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