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안팎에서는 ‘재창당’ 수준의 전면적 쇄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인다. 비례대표 국회의원 총사퇴, 지역구 의원인 심상정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민주노동당 시절 한때 2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얻었던 진보정치는,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정의당의 참담한 지방선거 성적표가 나온 뒤, 6월7일부터 16일까지 <한겨레21>은 30명가량의 정의당 안팎 인사를 만나거나 전화로 취재해 ‘정의당의 위기’에 대해 묻고 들었다. 30명 중에는 전·현직 국회의원 5명, 6·1 지방선거 출마자 7명, 당과 긴밀한 외부 관계자 5명 등이 포함됐다.
정의당에, 새로운 길이 있을까.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이번호에 이어, 정의당이 나아갈 길 등 못다 실은 이야기는 다음호에 이어진다. _편집자주
“비례의원들 전원 사퇴하라는 주장까지 나오는 마당입니다. 당원과 국민이 보기에 정말 바뀌려는구나 싶은, 그런 조처가 있어야 합니다.”
2022년 6월12일 서울 여의도동 국회에서 열린 정의당 6기 전국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전국위원 50여 명 사이에서 비장한 발언이 나왔다. 이날 이들은 정의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9월27일 전당대회까지, 이은주 원내대표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하는 비대위 체제를 꾸리기로 의결했다. 앞서 6·1 지방선거 다음날인 6월2일, 여영국 대표 등 정의당 지도부는 선거에 참패한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비대위는 남은 석 달 안에 ‘당 쇄신안’을 도출해야 한다.
이날 회의에는 ‘비대위’ 외에 다른 선택지도 안건으로 올라왔다. 일주일 뒤 전국위를 다시 열어 비대위원장을 선출하되 위원장에게 당대표 수준의 강력한 권한을 주는 안과, 9월로 예정된 당대회를 앞당겨 열어 사실상 새 지도부를 선출하는 안이었다. 격론이 오갔으나, 전국위는 이은주 비대위라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길’을 선택했다. 일부에선 “당이 소멸될 위기임에도 전국위원들이 안이한 판단을 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은주 비대위 체제는 침몰 위기에 처한 정의당을 구해낼 수 있을까.
2022년 두 차례 이어진 선거에서 정의당은 참담한 수준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3월 치른 제20대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가 2.37%를 얻는 데 그쳤다. 5년 전 대선 득표율(6.2%)의 절반 수준이다. 6월 제8회 지방선거도 참패했다. 4년 전 지방선거 당선자(37명)의 4분의 1에 불과한 9명의 광역·기초의원을 당선시켰을 뿐이다.
당 안팎에선 2024년 있을 제22대 총선에서 한 석도 얻지 못한 채 원외정당이 될 수 있는 “궤멸적 상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6월12일 열린 전국위를 앞두고 ‘비례대표 국회의원 5명 전원 사퇴’ ‘유일한 지역구 국회의원인 심상정 의원 정계은퇴 선언’ 등을 요구하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2012년 10월 진보정의당 창당(2013년 당명 ‘정의당’으로 바꿈) 이후 최악의 상황이다.
“진보정당은 뭐라 해도 정책과 이슈의 선도성과 차별성인데, 대표 정책이 보이지 않습니다. 깊은 강의 물 밑으로 조용히 흐르면서 강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강물 위로 떠다닌 현안만 따라다녔달까요.” 박철한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이 꼽는 ‘위기’의 근본 원인은 ‘정의당표 정책 의제의 실종’이다. “민주노동당 시절 상가임대차보호법은 남들이 뭐라건 몇 년 동안 가져갔습니다. 포복전진하듯 매일 서명받고 청원하고 다른 당 의원들에게 호소하고 이슈가 됐고 주목도 받았죠. 신용카드 수수료 인하 문제도 2년가량 바닥에서부터 가져간 것이었어요. 민주노동당 공약자료집은 거대 양당의 필독서였고, 이후 한국 사회에서 많은 것이 관철됐습니다. 한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런 행보는 보이지 않고 정치 현안 따라가기에만 급급해졌습니다. 정책이나 의제 주기도 짧아졌죠.”
정의당의 전신이라고 할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정당은 거대 양당과 다른 ‘정책정당’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돋보이는 존재였다. 부유세나 무상의료, 무상교육 같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의제를 제시했고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당이 꾸준히 성장했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첫 공직 당선자를 냈고,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배출하면서 본격적인 ‘제3당’의 지위를 얻었다. 이때 민주노동당은 세입자보다 건물주를 보호하는 법으로 변질된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을 국회에서 주도했다. 서민정당, 대안정당이라는 이미지가 확고해졌다. 당시 민주노동당의 정당지지율은 18.8%(2004년 6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를 기록했다.
이후 국민참여당과의 합당, 통합진보당에서의 분당, 이후 정의당 창당 등의 변화가 이어졌다. 정의당 이름으로 지역구 다선 중진의원(심상정 4선, 고 노회찬 3선)을 배출하고 국회 안에서는 제3당 지위를 굳혔지만, 정의당은 언젠가부터 성장이 정체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거대 양당과 차별된 정책도 점점 드러나지 않았다.
“정의당 초반엔 ‘정의로운 복지국가’ 같은 담론으로 복지와 시민의 삶을 연결하며 더 급진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한데 이제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다 복지 담론을 말해요. 정의당이 진보정당, 대안정당이라면 이 체제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인식하고 나아갈 방향을 짚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죠.” 6·1 지방선거에서 정의당 서울시장 후보였던 권수정 전 서울시의원은 “정의당의 목소리가 분명 민주당과 다르다는 인식을 긴 시간 동안 만들어내지 못한 허약함이 결국 표로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선 애초에 당의 지향과 노선을 분명히 하지 않아서, 대표 정책도 사라진 것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한다. ‘정의’라는 당명은 유럽에선 우익정당이 쓰기도 하고, ‘함께 행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 같은 강령은 다소 모호한 의미로 읽힌다는 지적이다. 차라리 사회민주당 같은 식으로 당의 정체성을 선명히 하자는 주장이다. 실제 정의당 창당 당시에 당명 투표에서 2위는 사회민주당이었다. 2016년 민주사회당으로 당명을 변경하려 한 적도 있다. “사민주의를 당의 이념으로 채택하지 못한 게 굉장히 아쉽습니다. 가치와 이념 없이 정의·진보 등 추상적인 단어만 남았는데, 재창당 수준으로 2기 정의당을 시작하려면 사민주의를 내세우는 당명 교체가 필요합니다.” 6·1 지방선거에 출마했던 조성주 서울 마포구청장 후보의 제안이다.
그러나 김병권 전 정의정책연구소 소장은 당명이 핵심이 아니라고 말했다. “정의당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사실상 사민주의 정당이었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사민주의를 말하는지가 나와야 합니다. 유럽의 사민주의는 이미 분열 과정에 있어요. 영국 노동당도 블레어 버전과 코빈 버전이 다르고, 프랑스의 사회당은 거의 망한 거나 다름없거든요. 독일 사민당은 항상 똑같은 노선이고. 불평등과 기후위기, 차별(젠더)이란 당면한 구조적 과제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번 선거의 실패 원인이 ‘정책’ 자체가 아니라 당내 토론 부재, 이로 인해 유권자에게 정책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정치’의 한계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좋은 정책을 내놨는데, 선거 과정에서 당의 후보와 선거운동본부 등이 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의당은 제20대 대선에서 ‘주4일제 신노동법’ ‘시민평생소득’ ‘그린노믹스’ ‘주거권 부동산’ 등 4대 공약을 뼈대로 한 정책을 내놨다. 기후운동단체들의 연대체인 기후위기비상행동, 청년유니온 등 47개 청년단체가 모인 ‘2022 대선 청년네트워크’, 한국노총 등의 대선 정책 평가에서 정의당은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높은 점수가 득표로 연결되지 못했다.
장석준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은 연구소가 내는 정책이론지 <보다 정의> 여름호에 실은 글에서 “정의당의 이번 대선 공약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총선 공약 이후 가장 혁신적 공약”이라고 평가하면서도 “(이 공약이) 자신이 실제 이뤄낸 성취마저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주4일제’라는 핵심 슬로건의 경우 트위터 등에서 호응받자 “급기야 정의당 대선 공약 전체를 대표하는 위상까지 얻게 되는” 등 “5년간 당이 펼친 실천과 고민의 결과가 아니라 대선을 코앞에 둔 몇 주 동안 SNS에서 감지한 여론이 정의당의 철학과 비전을 좌우”하는 상황이 된 점을 꼬집었다. “일상적으로 당내 토론을 지속해온 정당만이 선거 같은 중요한 정치적 계기에 자신의 입장을 확연히 제시할 수 있으나 정의당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투명한 당 운영을 방해하는 ‘의견그룹’<한겨레21>이 만난 정의당 내외부 인사들도 하나같이 “정의당에 제대로 된 토론이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왜 토론이 사라졌을까.
정의당에는 ‘의견그룹’이라고 불리는 정파들이 존재한다. 현재 당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의견그룹은 크게 넷으로 나뉜다. ‘인천연합’과 ‘함께서울’, ‘새로운진보’, ‘전환’. 인천연합과 함께서울은 이른바 ‘자주파’로 분류되며, 새로운진보는 옛 ‘국민참여당’이 주축이다. 전환은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해 진보신당, 노동당 등을 거친 ‘평등파’다. 의견그룹은 서로 경쟁하며 이념·가치 대결을 벌여 당의 발전을 끌고 가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때로 각 의견그룹의 결정을 관철하려고만 하면서 투명한 당 운영을 방해하고 일반 당원들을 배제하는 부정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특정 의견그룹에 속하지 않은 현역 의원들조차 ‘배제’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당의 의제가 현실에 맞춰 설정돼야 하는데 민감한 이슈에 대한 당 지도부 회의는 늘 비공개로 이뤄져요. 지도부 내에 어떤 토론이 있었고 어떻게 입장을 정했는지 감춰져 있습니다. 정파에 속한 이들만 알음알음하는 식이죠. 의사결정이 물밑에서 이뤄지니 다수의 당원은 도대체 어쩌다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알 수 없어요.” 류호정 의원은 “당의 의사결정이 늘 정파 타협의 산물이라, 좋게 말해 안정적이지만 나쁘게 말해 선명하지 않은 뻔한 것들”이라고 말했다.
장혜영 의원은 “선출된 당대표가 있어도 정작 중요한 의사결정은 다 전국위 추인을 받아야만 유효하게 추진된다. 전국위가 정파를 안배한 구조라, 당의 주요 결정이 정파 간 합의 이상으로 가기가 굉장히 어렵게 돼 있다”며 “무엇보다 권한과 책임이 비례하도록 당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정의당의 최고의사결정은 1년마다 소집되는 당대회에서 이뤄진다. 당대회 아래에는 전국위원회를 둔다. 2년 임기의 전국위원들이 공직 후보자와 당 주요 집행기구의 장을 인준하고 대표단회의가 제출한 안건을 심의한다. 2020년 9월 선출된 현재의 전국위원은 모두 53명이다. 장 의원은 지난 대선 후보 경선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당 밖의 시민선거인단을 포함하는 안건이 전국위에서 부결된 예를 들며 “중요한 의사결정마다 전국위원들이 가장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그 권한과 결정의 책임이 아예 형해화돼 있다. 전국위와 정파 구조에 대한 성찰 없이 제대로 된 쇄신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진보정당, 정책정당의 정체성이 흐려진 이면엔 정파 구조에 매몰돼 내부 토론이 위축된 당내 분위기가 자리했다. ‘더 과감한 진보정당이 되려면, 정책 혁신 이전에 반드시 정치 혁신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장석준 부소장)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정의당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한 관계자는 말했다. “이번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정의당은 민주당과 같이 심판받았다고 봐야 한다. 이건 단지 두 차례 선거 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동안 (20년 넘게) 진보정당이 누적해온 정치적 행보의 결과물이다. 가깝게는 정의당 10년의 결과물이다. 재창당 수준의 전면적인 재구성이 필요하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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