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을 떨며 노란색 점퍼를 입은 사람이 입을 뗐다. “자, 첫 번째 소원이 뭣입니까?” 주변에서 “동서화합”이라는 작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는 “두 번째 소원은 뭣입니까”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다. “또 동서화합입니다.” 스스로 답했다. 마지막 질문인 “세 번째 소원이 뭣입니까”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동서화합”이라고 큰 목소리로 합창했다. 2002년 3월15일 밤. 다음날 열릴 새천년민주당 광주 경선을 준비하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광주광역시로 모인 노사모 회원들이었다.1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후보는 불리할 거라 예상됐던 광주 경선에서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득표율 1위를 차지했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아들과 관련한 비리로 레임덕을 겪었다. 정몽준 당시 국민통합21 대표가 제3세력으로 급부상했다. 노무현 당시 후보는 지역주의에 물든 ‘3김 정치’를 청산하자는 시대과제를 내세웠다.
2022년 20대 대선은 다르다. 정치학자와 정치평론가들은 △대통령 레임덕 △강고한 제3세력 △시대과제를 둘러싼 논의 등 세 가지가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2007년 17대 대선에서 최저치를 찍고 반등해온 투표율이 20대 대선에서는 떨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8월부터 9월 둘째 주까지 6주간 40% 초반대를 유지하고 있다. 2017년 대선 득표율 41.1%를 거의 그대로 유지하는 셈이다. 이는 집권 5년차 1분기를 맞은 역대 대통령 지지율 중 가장 높은 수치다. 범여권 의석수는 절반을 훌쩍 넘는 170석이나 된다. 문 대통령은 여대야소를 유지하며 지지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최초의 대통령이다. 대통령 직무 수행 긍정평가 이유 가운데 가장 많이 꼽는 것은 코로나19 대처(31%)와 외교·국제관계(14%)다.2
임기 말 대통령이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는 근본 배경엔 보수와 진보 세력의 ‘재정렬’이 있다. “2010년 지방선거,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을 거치며 한국에서 보수는 장기간 소수화돼왔다. 지난 대선에서 ‘국가주의 보수’와 ‘리버럴 보수’로 합쳐진 보수연합이 붕괴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재임 기간에 국정교과서 사건이 터졌고, 이는 리버럴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제였다.”(박원호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사회 주류 세력이 보수에서 진보로 교체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청와대에 반발하는 여당과 진보 언론을 견제한 열정적 지지자의 역할을 언급했다. “전통적으로는 당·정 관계의 기본은 분리였다. 통치의 주도성이 대통령에게 너무 많이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민주화의 보이지 않는 합의였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당·정 분리가 안 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 여당에서 다른 목소리를 내면 배신행위를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임기 말 이례적으로 높은 대통령 지지율은 차기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문 대통령 지지가 그대로 여당 대선 후보 지지로 이어지지 않을 거란 분석도 나온다. 유창선 정치평론가는 “민주당 고정지지층이 대통령을 받쳐주고 있긴 하지만, 정권연장론과 견주면 정권교체론에 대한 시민의 열망이 한 단계 더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박상훈 학교장은 “레임덕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책임정치의 일환이다. 당 안에서 (청와대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정치적 자산을 쌓기도 한다”고 밝혔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과거에는 정권 재창출을 하고자 대통령이 자신의 자리를 (차기 후보에게) 비워주곤 했다. 노무현도 김대중과 긴장 관계에 있었다. 이회창과 김영삼의 관계도, 노태우와 전두환의 사이도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대통령들은 레임덕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차기 주자의 숨통을 터줬다는 뜻이다.
제3세력은 기성 정치에 자극과 활력을 주는 역할을 해왔다. 거대 양당정치에선 생각지도 못할 정책과 비전을 내놓았다. 원내 10석의 제3당 민주노동당은 2004년 5월13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 결과 20% 넘는 지지율을 얻었다. 17대 총선 직후였다. ‘노무현 탄핵’ 역풍을 맞아 위기에 몰린 한나라당과 비슷한 수치였다. 민노당이 내건 무상복지, 반값등록금 같은 진보정책은 수년 뒤 한국 사회 주요 의제로 떠올랐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한때 기성 양당정치를 바꿔보자는 ‘새정치’ 열망의 중심에 있었다. 국민의당은 2016년 20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정당지지율 26.74%를 얻었다. 의석수는 38석에 달했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안철수 후보는 21.4%라는 지지를 얻었다. 20대 대선에선 유의미한 제3세력이 보이지 않는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국민의힘에 일찌감치 입당하면서 그나마 있던 가능성도 사라졌다. 새로운 정치를 향한 열망은 있는데 인물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새로운 정치 질서에 대한 갈망은 아직 광범위하다고 본다. 그러나 구심이 될 인물이 없다. 윤 후보가 국민의힘에 너무 일찍 입당해버렸다. 독자세력을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새로운 세력으로서의 힘과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것이다.”(유창선)
진보정당도 제3세력으로 역할을 상실했다. “그동안 기회는 충분히 좋았다. 다만 (정의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지나치게 목숨을 걸다가, 진보정당 스스로를 내실 있게 꾸미지 못한 게 크다. 사회적 목소리를 조직하는 진보정당 기능이 약화했다. 물론 대통령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크지 않은 정당이 존립되지 않는 제도적 요인도 무시할 수는 없다.”(박상훈)
진보정당에서 안철수 현상으로 이어진 ‘새정치에 대한 열망’은 부유하고 있다. “(제3세력이 내걸 만한 의제에 대한) 수요는 있다고 본다. 이들을 어떻게 끌어당길지가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우선 야당은 서울시장 선거는 잘해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현재 중간층을 끌어당기려 하고 있다.”(박원호)
국민의힘은 당의 이미지를 혁신하며 제3지대의 열망을 잡아채려 애쓰고 있다. “친문도 반문도 싫어하는 제3지대의 수요가 있겠지만, 다른 대안을 역동적으로 찾아보려는 유권자가 보이지 않는다. 야당의 홍준표 후보가 이를 받아들이는 ‘무야홍(무조권 야권 후보는 홍준표) 현상’이 일어났다. 반문과 친문 구도가 강해졌고 정치는 양극단화됐다.”(김종배 시사평론가)
진보와 보수가 일대일 구도로 처음 맞붙은 2002년 16대 대선부터, 박근혜 탄핵 이후 치른 2017년 19대 대선까지 ‘시대적 화두’가 있었다.3 2002년 16대 대선은 ‘3김 시대 청산’, 2007년 17대 대선은 ‘경제성장’, 2012년 18대 대선은 ‘경제민주화와 복지’, 2017년 19대 대선은 ‘적폐 청산’이 화두였다.
여야 대선 후보는 저마다 공약을 내걸고 있다. 여당에서는 △기본소득(이재명) △아동수당 18살까지로 확대(이낙연) △20년 적립형 미래씨앗통장(정세균) 등이 나왔다. 야당의 대표 공약은 △청년 원가주택(윤석열) △비례대표 폐지(홍준표) △디지털-사회서비스 일자리 각각 100만 개 양성(유승민) 등이 있다. 문제는 경선 과정에서 시대과제를 논하고 정책을 검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당은 ‘적통 경쟁’에 빠졌고 야당은 정책화하기 어려운 공정 담론에 빠져 유권자의 눈을 사로잡는 의제를 던지지 못하고 있다.
여당 후보들이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우기 쉽지 않아서 정책에도 힘이 빠졌다는 진단이 나온다. “문 대통령 지지율이 40%대를 유지하는 상황이 이어지면, 여권 대선주자는 미래가치를 그리기 힘들어진다. 4차 산업혁명으로 불안정해지는 삶에 국가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이라고 본다. 그나마 여기에 걸쳐 있는 의제가 기본소득이다. 하지만 이재명 후보 입장에서 이 의제를 전면에 내걸면 문재인 정부와 각이 세워진다는 어려움이 있다.”(김종배)
“(친문) 지지자들이 민주당 경선도 지배했고 당내에서 이견을 내기 어렵다.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가 나타났다. 정당이 없고 열정적 지지자만 남은 형편이다. 정당이 후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도 정당 지도부나 주류 집단이 반대하는 인물이 대통령 후보가 될 확률이 높아졌다.”(박상훈)
야당 역시, 한 시대의 문제를 포괄할 만한 정책을 뽑아내지 못하고 있다. “야권의 화두는 ‘공정’이다. 국가가 주체가 되어 불안정한 삶을 개선해줄 순 없다, 이는 당신들이 풀어야 할 문제다, 다만 반칙이 없도록 관리는 해주겠다는 것이 보수의 입장이다. 이제는 (보수가 밀던) 성장 담론도 없어졌다.”(김종배)
20대 대선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전문가들이 말하는 전망은 비관적이다. “양자택일만 남았다. 정권교체냐. 정권재창출이냐. 정책을 보고 투표하는 선거는 아닐 거 같다. 미래를 준비하는 의제는 파묻혔다. 진영 대결로 투표율이 오를 수도 있겠지만 퇴행적인 선거 구도가 됐다. 대선주자도 마찬가지다. 미래를 말하는 주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유창선)
“정당 기능은 사라지고 캠프 정치만 남았다. 2012년 18대 대선이 좋았다. 진보와 보수는 (시대과제를 두고) 합의점을 찾아갔다. 현재까지 사회보장과 관련된 납부액은 계속 올라가고 있다. 이는 2012년 대선의 합의 결과다.”(박상훈) “정치권이 장기 비전을 찾아가야 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어젠다를 가지고 선거를 치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 대선 투표율이 떨어질 수도 있다.”(박원호)
다만 대선까지 아직 6개월 가까이 남았다. 역동적인 한국 정치의 속성을 생각하면 짧은 시간은 아니다.
이정규 기자 jk@hani.co.kr
참고 문헌
1.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 이창재 감독, 2017년
2. 한국갤럽 <데일리 오피니언> 제464호 2021년 9월 2주(조사 대상: 전국 만 18살 이상 1001명, 조사 기간: 2021년 9월7∼9일, 조사 방법: 휴대전화 RDD 표본 프레임에서 무작위 추출(집전화 RDD 15% 포함),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3.1%포인트)
3. <2002-2007-2012년 대선의 회고와 한국정치의 전망>, 김호기, 대한기독교서회,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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