슝슝슝.
머리 위로 폭탄이 날아갔다. 최영언(26) 중위를 비롯한 병사들은 귀를 막았다. 조금 뒤 경기를 일으킬 듯한 폭발음이 연이어 울렸다. 쾅! 쾅! 쾅! 쾅! 폭탄은 1분 간격으로 날아가 목표물을 수차례 때렸다. 전방 200여m 지점의 작은 숲은 초토화됐다. 그곳에 무언가 생명체가 있다면 뼈를 추릴 수 없으리라. 자신의 보고와 중대장의 지원 요청에 따라 호이안에 있는 대대본부 포병중대에서 발사한 155mm 곡사포였다. 폭탄은 무려 10km를 넘게 날아 꽝남성 디엔반현 서쪽에 위치한 정글의 한 지점을 무참하게 유린했다. 포격이 그친 뒤, 정적이 찾아왔다. 전방의 숲 속에선 연기만이 피어올랐다. 누군가 쾌재를 부르며 말했다. “시원~하네.”
적의 폭탄은 공포였지만, 아군의 폭탄은 신나는 게임 같은 거였다. 들입다 퍼붓는 폭음을 들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이 ‘가라’일지라도 말이다. ‘가라’는 군대에서 많이 쓰는 일본말로 ‘가짜’라는 뜻이었다. 그렇다. 이날 155mm 포탄이 무전 보고체계를 통해 날아오기까지의 상황은 각본이 잘 짜인 ‘가라’였다.
‘찝찝’할 때 쓰는 제3의 묘책푹푹 찌는 1968년 4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였다. 동남아 특유의 고온다습한 날씨가 한국에서 온 병사들을 지치게 했다. 해병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 병력은 2열종대의 행군대열을 갖춰 수색·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돌아가며 맡는 선두 첨병소대의 역할은 이날 1소대 차례였다. 1소대장 최영언 중위가 책임자였다. 첨병소대는 적의 공격과 가장 먼저 맞닥뜨릴 가능성이 컸기에 한층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맨 앞에 가던 분대의 선임하사가 병력을 정지시켰다. 최 중위에게 다가와 전방의 작은 숲을 가리켰다. “기분이 안 좋네요. 꼭 뭔가 튀어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갈대 같은 풀들이 빽빽하게 솟은 곳이었다. 사람 키를 넘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분위기가 음산했다. 저격병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굳이 숲으로 들어가 수색을 시도하기에는 위험해 보였다. 그냥 놔두고 지나치기도 찝찝했다. 이럴 땐 제3의 묘책이 있었다.
최영언 중위가 ‘가라 작전’을 지시했다. 분대장이 카빈총을 가져왔다. 그는 중대장이 있는 뒤편 허공을 향해 서너 발을 갈겼다. 피융~. M16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났다. 곧바로 중대장 은명수(1968년 6월 전사) 대위로부터 무전 연락이 왔다. “방금 뭐야?” “전방에 적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대대에 포 지원을 요청해야겠습니다.” “알았어. 좌표 불러.” 최 중위는 전투 지도를 보며 표적의 위치를 정확히 불러주었다. 어쩌면 중대장도 ‘가라’임을 눈치챘을지 모른다. 속아주는 척해서 나쁠 건 없다. 대대와 여단 본부에 일 좀 했다는 티를 낼 수 있다. 이걸로 오늘 작전을 종칠 수도 있다. 대대에는 “적의 저격을 받고 155mm 곡사포 지원 요청을 해서 제압했다”고 전투상보를 올릴 것이다. 1중대장으로부터 포격 요청을 받은 대대본부의 155mm 포병들도 좋아하리라. 오랜만에 몸 좀 풀고 밥값 했다며 보람을 느낄 테니.
카빈총 역시 ‘가라’의 일부였다. 한국군이 ‘적 사살’ 전과를 상부에 보고하려면 반드시 적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증거물로 첨부해야 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들이 주로 쓰는 소총은 AK47과 카빈이었다. 각 소대마다 아군 보급품목이 아닌 그 소총을 어딘가로부터 구해왔다. 아마도 남베트남군 쪽과 거래를 했으리라. 그러한 카빈을 평상시 작전 때 ‘잉여 무기’로 두어 정 갖고 다녔다. 혹시나 ‘적 사살’ 전과를 보고할 기회가 있을 때 노획 무기가 모자라면 이걸로 채워넣었다. ‘가라 전과’를 위한 비상무기인 셈이었다. 적의 저격이 있던 양 ‘가라’로 상황을 연출할 때도 카빈이 제격이었다. 정글은 매일 총탄이 빗발치는 현장이 아니었다. 정글을 아무리 휘젓고 다녀도 쥐새끼 한 마리 만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적이 없으면 가공의 적을 만들어냈다.
보급품 불법 유통 사건의 전말두 달 전인 2월12일에도 마찬가지였다. 1소대장 최영언 중위가 속한 1중대는 사격통제구역인 퐁니·퐁넛촌에 들어갔다가 엉뚱한 주민 수십 명을 향해 발포하는 사고를 쳤다. 뒤에서 오던 아무개 소대, 아무개 분대의 짓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미군이 한국군 쪽에 사건의 진상을 해명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어김없이 ‘가라’가 괴력을 발휘했다. 한국군 해병 헌병대가 중대장과 일부 소대장, 선임하사들을 조사하고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1중대원들 중 그날 퐁니·퐁넛촌에 들어가 총을 쏜 대원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한국군복을 입은 베트콩의 존재가 ‘가라’로 만들어졌다.(이에 대한 상세한 기술은 다음 기회에)
최영언 중위는 ‘가라 카빈 작전’ 한 달 뒤 1소대장에서 부중대장으로 보직이 바뀌었다. 호이안의 중대 기지에 상주하며 중대의 살림을 책임지는 자리였다. 이것은 또 다른 ‘가라’의 시작이었다.
1968년 여름이었다. 부중대장을 맡고 몇 개월이 흘렀다. 최 중위는 남베트남군 지프차를 타고 다낭의 미군 PX에서 쇼핑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남베트남군 운전병이 핸들을 잡았다. 뒤편에는 소니 흑백TV 수상기 한 대와 함께 살렘 담배, 코카콜라 등의 음료수가 한가득 쌓였다. 중대 기지가 있는 호이안으로 가려면, 다낭 시내에서 1번 국도를 타야 했다. 한데 갑자기 뒤편의 고물 지프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빠른 속도를 내며 옆으로 따라붙었다. 차 위에는 작은 안테나가 달려 있었다. 사복을 입은 미국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정지신호를 받고 갓길에 차를 대자, 미국인은 미군 정보부대 신분증을 보이며 동행을 요구했다. 한국군 해병장교가 남베트남군 지프차를 타고 미군 PX에서 나오는 걸 이상히 여긴 게 틀림없었다. 불법적인 물품 유통과 거래의 어떤 정황으로 의심했으리라. 미군의 각종 보급품과 PX 제품들이 남베트남군을 거쳐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가 베트콩 쪽으로 넘어가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지나친 의심이었다. 최영언 중위는 억울했다. 일말의 거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수준은 대단히 소박했다. 전말을 되짚어보자.
부중대장 최 중위는 호이안의 중대 기지 옆에 있는 남베트남군 포병장교에게 지프차 기름을 넣어주겠다고 제안한다. 한국군 중대 단위엔 지프차가 없었다. 대신 대대 보급계를 통해 미군으로부터 공급받은 휘발유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군 포병장교는 공짜로 얻은 기름의 일정 부분을 시장에 나가 어떻게든 현금으로 바꿀 것이다. 최 중위는 기름을 넣어주는 대신 필요할 때 지프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어느 날 최 중위는 남베트남군 운전병과 함께 그 지프차를 타고 다낭의 미군 PX로 향한다. 1시간 거리였다. 귀국길에 오르는 병사를 위해 24인치 흑백TV 한 대를 사주기로 했다. 간 김에 필요한 물품도 사려고 했다. 한국에 TV가 귀할 때였다. 한국군 사병들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TV를 살 수 없다. 군 당국은 송금을 장려하기 위해 고가의 전자제품 구매를 금지시켰다. 최 중위는 TV 값 107달러를 귀국 예정 병사에게 미국 군표(전시에 군대에서 쓰는 달러)로 받았다. 병장이라면 한 달 전투수당이 54달러. 대부분 금액을 송금하고 1년 내내 이 돈을 모았을 거다. 최 중위는 이미 자신의 장교 아이디카드로 미군 PX에서 흑백 TV를 한 대 구매한 적 있다.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아이디카드에 뚫린 작은 구멍 한 개는 그 사실을 숨기지 못한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라’의 완벽한 승리최 중위는 다낭의 미군 PX에 도착한다. 개방형 구조를 갖춘 PX는 백화점 매장만큼이나 넓다. PX 전체를 한 바퀴 둘러본 최 중위는 바깥에 있는 잔디밭으로 발길을 돌린다. 휴가를 나온 미군 병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노닥거린다. 그중 한 명을 잡아 말을 건넨다. “커티삭(미국산 스카치 위스키) 한 병 사줄까?” 젊은 미군 병사들은 위스키에 군침을 넘기지만 군표가 많아도 살 수가 없다. 한국군 장교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의 표정이 환해진다. 최 중위는 조건을 제시한다. “그럼 대신 TV 한 대 사줘라.” 어렵지 않다. 미군 병사는 TV를 살 수 있다. 거래는 끝났다. 각자 소니TV와 커티삭 위스키를 사온 뒤 군표와 함께 교환했다. 최 중위는 내처 담배 코너로 향한다. 베트남 사람들이 좋아서 환장한다는 3S 중 하나인 살렘 담배를 몇 보루 집어든다. 3S는 살렘(Salem)과 함께 소니(Sony), 세이코(Seiko)를 일컫는다. 이 일본산 제품들은 암시장에서 현금 호환성이 최고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최 중위는 PX에서 나온 뒤 미군 정보요원에게 적발됐다. 미군들은 한국군 해병 헌병대에 연락을 취했다. 곧바로 한국 해병 제2여단 헌병대 요원들이 최 중위를 인계받아 데리고 갔다. 그는 여단 헌병대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수사요원은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냥 풀어주기는 힘들다”고 했다. 미군 쪽에 눈치가 보인다는 이유였다. 결론은 TV를 포함한 모든 물건의 압수.
이렇게 당할 수는 없었다. 대반전이 일어났다. 그 힘은 ‘가라’였다. 최영언 중위는 열심히 사인 연습을 했다. 대대 인사계 서류철에서 찾아낸 여단 참모장 염태복 대령의 사인을 되풀이해 베껴보았다. 그는 ‘가라 공문’을 만들어냈다. 발신인은 염태복 참모장, 수신인은 헌병대장. 그는 맨 끝에 멋지게 ‘가라 사인’을 휘갈겼다. 내용은 이러했다. “1중대 부중대장 최영언 중위로부터 압류한 물품들을 즉각 돌려줄 것.” 르네 클레망의 1960년 영화 에서 얻은 아이디어였다. 주인공 알랭 들롱이 친구의 사인을 도용해 편지를 보내는 장면을 떠올렸다. ‘가라 공문’은 즉각 효력을 발휘했다. 헌병대는 모든 압류 물품을 돌려주었다. 최 중위는 스스로를 변호했다. 적어도 사리사욕을 취하려는 목적은 아니라며. 귀국하는 병사에게 TV라는 큰 선물을 안겨주지 않았는가. ‘가라’의 완벽한 승리.
시레이션(전투식량) 때문에 여단 본부로부터 기습적인 감사를 당한 적도 있다. 감사도 ‘가라’를 이기지는 못했다. 1번 국도에서 십자성 부대의 군 보급품 수송차량 경계를 서다가 부산고 동창생 수송장교를 만난 게 일의 시작이었다. 친구의 호의로 여단 본부 창고에서 수십 박스의 시레이션을 챙겨 트럭에 싣고 온 거였다. 중대 창고에 시레이션을 가득 쌓아놨지만, 병사들은 매일 먹는 그 인스턴트 음식을 질려했다. 어떻게 처치할지 고민하다 중대 보급하사를 통해 남베트남군에 팔아넘겼다. 바꾼 돈으로는 버드와이저 맥주를 사와서 회식을 했다.
여단 본부에서 감사를 나온 건 미군의 문제제기 탓이었다. 항공사진에서 베트남 민간인들이 개미떼처럼 무언가를 머리에 이고 길게 줄지어 어느 산속 마을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판독 결과 시레이션 박스였다. 한 박스에 12인분짜리였다. 그 시레이션이 정말 1중대로부터 흘러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암시장을 거쳐 산으로 들어가 베트콩들의 식량이 되었는지도 모르지만 개연성은 충분했다. 감사 요원들은 중대 보급계 서류와 창고에 비치된 물품을 맞춰보았다. 아무 이상을 발견 못했다. ‘가라’로 만들어진 서류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쩐과 꼼수의 전쟁베트남전쟁은 총과 폭탄의 전쟁이자, 동시에 ‘쩐의 전쟁’이었다. 그 이면에선 크고 작은 ‘가라’가 춤을 췄다. 꼼수의 전쟁이었다. 가장 강력한 꼼수의 주인공은 미군이었다. 1968년 가을, 1중대 부중대장에서 대대 인사행정관으로 옮긴 최영언 중위는 그 실상을 목도했다. 장대비가 억수로 퍼붓던 날이었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표지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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