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2014년 그날, 향내 매캐한 그곳

(29) 민간인 학살 뒤 46년 흐른 퐁니·퐁넛 마을 제삿날 풍경…

고도 경제성장 뒷배가 된 파병에 얽힌 ‘베트남인 눈물’의 역사
등록 2014-11-01 15:40 수정 2020-05-03 04:27

2월12일, 나는 퐁니·퐁넛 마을로 진입했다.
1968년 2월12일의 일이 아니다. 46년이 흐른 2014년 2월12일이었다. 다낭에서 승용차를 타고 출발했다. 남쪽 호이안 방향으로 1번 국도를 40여 분 달리자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지역이 나타났다. 조금 뒤 오른쪽 논 한가운데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야유나무였다. 그날의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 지점이다. 야유나무는 그날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승용차의 속도를 낮추고 우회전했다. 나는 46년 전 해병제2여단(청룡부대) 1대대 1중대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마을을 오른편으로 끼고 서쪽 쯔엉선 산맥 능선을 마주 보며 들어갔다. 차 한 대만이 간신히 지나갈 너비였다. 맞은편에서 쉴 새 없이 달려오는 오토바이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50m쯤 가니 작은 공터가 나왔다. 차를 세워두고 걷기 시작했다. 46년 전처럼 풀이 무성하게 자란 흙길이 아니다. 시멘트 포장도로다. 마을이 보였다. 그 옛날 초가집은 모두 개량주택으로 변했다.

74명 영혼 어루만지는 ‘따이한 제사’

인천공항을 떠나 다낭공항에 도착한 것은 3일 전이었다. 호찌민이나 하노이를 경유하지 않아도 되는 다낭 직항이 생긴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다낭이 베트남 제3의 도시임을 말해주는 변화다. 일주일간 다낭의 호텔에 묵으며 매일 승용차를 빌려 아침저녁으로 40여 분 거리의 퐁니·퐁넛 마을을 오고 갔다. 2000년부터 시작해 도합 네 번째 방문이었다. 이번엔 일부러 2월 초순을 택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제삿날 풍경을 보고 싶었다. 그날이 바로 2월12일이었다. 양력으로 사건 발생일과 일치했고, 음력으로 계산하면 사건 전날인 1월13일이었다. 베트남 제사는 음력으로 기일 하루 전에 지낸다.

2001년 4월의 어느 날, 퐁니마을 한 주민의 집 마당에 모인 퐁니·퐁넛촌 사람들이 〈한겨레 21〉이 2000년 11월23일치로 보도한 1968년 사건의 주검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밤이 되어도 주민들은 계속 몰려들었다(위쪽). 2014년 2월12일 오전 응웬전(가운데) 할아 버지 식구들이 이른바 ‘따이한 제사’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맨 왼쪽이 둘째딸 응웬티바, 한 사람 건너 셋째딸 응웬티호아. 46년 전 2월12일, 어머니 팜티깜, 큰딸 응웬티탄, 막내아들 응웬디엔칸은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고경태

2001년 4월의 어느 날, 퐁니마을 한 주민의 집 마당에 모인 퐁니·퐁넛촌 사람들이 〈한겨레 21〉이 2000년 11월23일치로 보도한 1968년 사건의 주검 사진을 살펴보고 있다. 밤이 되어도 주민들은 계속 몰려들었다(위쪽). 2014년 2월12일 오전 응웬전(가운데) 할아 버지 식구들이 이른바 ‘따이한 제사’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맨 왼쪽이 둘째딸 응웬티바, 한 사람 건너 셋째딸 응웬티호아. 46년 전 2월12일, 어머니 팜티깜, 큰딸 응웬티탄, 막내아들 응웬디엔칸은 죽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고경태

46년 전 그날 한국군이 다녀간 퐁니·퐁넛 마을에서는 70명 안팎의 주민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중상을 입었다가 숨진 이들까지 합치면 모두 74명이다. 총 35가구 이상으로 알려졌는데, 다른 곳으로 이주한 이들을 빼더라도 이날 퐁니·퐁넛 마을에서 20가구 넘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보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따이한 제사’라고 부른다고 했다. 나는 오전 9시부터 네 집을 차례대로 순례했다. 첫 목적지는 응웬티르엉(77) 할머니의 집이었다. 2월12일 사건으로 인해 그녀가 잃은 가족은 없다. 다만 그날 응웬티토이(사망 당시 33)를 잃고 홀아비가 된 레딘다이(당시 34)와 3년 뒤 혼인의 연을 맺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전부인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 저승에 간 이들에게 정성을 다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은 베트남인들의 오래된 믿음이다. 2013년 1월 방문 때 퐁넛마을의 골목길에서 만난 하마우(57)는 일면식도 없는 자신의 집 전 주인을 위해 지금도 제사음식을 차리고 절을 한다고 했다. 전 주인 쩐로(1901년생)와 보티칸(1904년생) 부부는 그날 불에 타 죽었다. 주검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두 번째 들른 레딘묵(56)의 집에선 사건 당일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 살아남은 그의 동생 레딘먼(47)을 만났다. 밭에서 일하던 어머니 하티지엔(1934년생)은 총탄에 맞아 절명하면서도 끝까지 젖먹이 아들 레딘먼을 보호했다. 레딘먼의 누나인 레티쭝(52)과 레티묵(51)이 아이들과 함께 와 음식을 차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세 번째는 응웬전(87) 할아버지의 집이었다. 그의 큰딸 응웬티탄(사망 당시 19)은 칼에 가슴이 잘린 채 피를 많이 흘리다가 수술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숨졌다. 가장 잔혹한 죽음 중 하나였다. 죽은 응웬티탄의 여동생 응웬티바(63), 응웬티호아(59) 등 9남매 중 지금까지 생존한 5남매의 아들딸과 손자·손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이모, 언니, 남동생, 조카 등 혈육을 가장 많이 잃고 본인도 중상을 입었던 응웬티탄(54·바로 앞의 응웬티탄과 동명이인)의 집을 방문했다. 치명적 총상을 입고도 응웬티탄과 함께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오빠 응웬득상(61)은 호찌민에 살고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응웬티탄의 작은아버지 응웬득초이(76)가 제사를 진행했다. 제사의 풍경은 집집마다 대동소이했다. 제단 앞에 과일과 맥주·돼지고기 등 음식을 차리고, 향을 피우고, 제문을 읽으며 망자의 영혼을 초대하고, 두 손으로 향을 흔들며 세 번 절을 하고는 떠들썩하게 모여 앉아 식사했다.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은 집에선 이웃까지 불러모아 술과 요리를 대접했다. 제삿날이자 잔칫날이었다.

‘향값’ 하나 지원하지 않는 국가

그날 세상을 떠난 이들과 남은 가족들은 국가의 배려를 받지 못했다. 1968년 퐁니·퐁넛 마을 주민들에 대한 보호 의무를 지녔던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은 1975년 사이공이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 군대에 함락되는 걸 신호탄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이후 통일을 이루고 태어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도 한국군에 의한 희생자 가족들을 적극적으로 돌봐주지 않았다. 이는 ‘열사’들에 대한 처우와 확연히 비교된다. ‘열사’란 전쟁 기간에 북베트남 군인과 베트콩 신분으로 사망한 이들을 일컫는다. 퐁니·퐁넛 마을이 속한 디엔안사 인민위원회에만 열사 585명이 있고, 이들을 기리는 탑이 인민위원회 바로 맞은편에 화려하게 세워져 있다. 이들의 가족에겐 매달 150만동(약 7만원)이 지급되고 있다. 새해를 맞을 때마다 20만~40만동을 따로 챙겨준다. 이날 만난 한국군 희생자 유가족 한 명은 “제삿날인데 어떻게 국가가 향 피울 값 하나 지원해주지 않느냐”며 직설적으로 소외감을 뱉었다.

방문 기간 중 다른 날엔 주로 생존자 가족의 집에 들어가 증언을 들었다. 그날 부모를 잃은 뒤 입산해 베트콩이 되거나 퐁니·퐁넛 마을에서 저격수로 활동했던 이들도 만났다. 이 모든 취재는 사전에 베트남 꽝남성 우정연합회 쪽의 허가를 얻은 뒤 진행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특성이다. 체류 기간과 취재 목적, 인터뷰 대상자들을 자세히 적은 공문을 베트남어로 작성해 도착 보름 전에 보냈다. 꽝남성 우정연합회는 산하 행정기관인 디엔반현과 디엔안사 인민위원회에 취재 협조를 지시했다.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

인민위원회 직원들은 취재 첫날부터 자전거를 타고 와 가이드를 해주었다. 인터뷰 대상자의 집을 찾아주는 등의 편의 제공이지만, 인터뷰 자리에 동석할 때도 있으니 감시처럼 느껴질 만하다. 나는 친절로 여기기로 했다. 내처 자료 요청까지 했다. 인민위원회가 소장하고 있을지 모를 퐁니·퐁넛 마을의 과거 사진을 달라고 했다. 가능하면 1960년대 것이었으면 했다. 주민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든, 인민위원회 직원들이 기념촬영을 한 것이든 그 무엇이라도 좋다고 했다. 디엔안사 인민위원회에서 대외활동을 담당하는 쩐꾸억또안(46)에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물었다. 쩐꾸억또안은 잠시 생각하더니 “1960년대 사진 자료가 있다”고 말했다. “정말?”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는 며칠 기다리라고 했다. 사진 보관함의 열쇠를 가진 담당 직원이 집안에 상을 당해 휴가 중이라고 했다. 나는 담당 직원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3일 뒤 열쇠를 가진 직원이 사무실에 출근했다. 쩐꾸억또안은 그 직원에게서 받은 사진 자료를 나에게 내밀었다. 너덜너덜해진 잡지 한 권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맙소사, 그것은 2000년 11월23일치로 발행된 이었다. 발행된 지 13년2개월이나 지난 은 귀퉁이가 다 해어지고 구겨져 30년 전 잡지쯤으로 보였다.

기가 막혔다. 사진 자료랍시고 받은 해당호는, 내가 2001년 4월에 기증했던 것이다. 퐁니·퐁넛 마을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일이다. 당시엔 딱 하루 마을에 머물렀다. 2000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32년 만에 기밀 해제된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관련 문서와 사진을 처음 입수해 표지이야기로 쓴 시점이 그해 11월23일. 문서와 사진의 주요 무대는 퐁니·퐁넛 마을이었다. 기사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룬 것도 퐁니·퐁넛 마을 사건이었다. 나는 5개월 뒤인 2001년 4월, 그 을 들고 베트남에 온 거였다. 그때 디엔안사 인민위원회에 한 가지 부탁을 했다. 1968년 2월12일 희생된 이들의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모아달라고. 에 보도한 사진 속의 주검들이 익명으로 존재할 때였다. 이름을 알고 싶었다. 그들의 형, 오빠,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주고 싶었다. 인민위원회가 마을방송을 해줘 퐁니마을의 어느 집 마당에 주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사진을 돌려보며 퀴즈를 풀듯 주검의 이름을 맞춰나갔다. 그 기초조사 덕분에 나는 지금 이 연재물의 마지막 회를 쓰고 있다.

2014년 2월12일 퐁니·퐁넛촌 학살 위령비. 한국의 시민단체가 보낸 10여 개의 조화가 놓여 있다. 어둠이 찾아온 뒤 위령비와 그 옆 야유나무 위로 여객기 한대가 날고 있다. 고경태

2014년 2월12일 퐁니·퐁넛촌 학살 위령비. 한국의 시민단체가 보낸 10여 개의 조화가 놓여 있다. 어둠이 찾아온 뒤 위령비와 그 옆 야유나무 위로 여객기 한대가 날고 있다. 고경태

다시 2014년 2월. 나는 인민위원회 직원에게서 받은 을 돌려주며 다른 사진 자료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기대를 한 내가 잘못이었다. 그나마 퐁니·퐁넛 마을 사건 자료집이 하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디엔안사의 상급 행정기관인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에서 1996년 제작한 얇은 책자었다. 2013년 1월 방문 때 그 자료집의 주인공을 수소문해 만난 적이 있다.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에서 일하는 르엉미린(42)이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1996년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에서는 디엔안 등 현 내 20개 사에 특기할 만한 역사와 문화유적이 없는지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당시 디엔반현 문화통신청은 프랑스 식민지 시대부터 한국군 주둔 시절까지의 사건들을 광범위하게 조사해 박물관 자료로 삼으려 했다고 한다. 이때 디엔안사에서는 1968년 2월의 퐁니·퐁넛 마을 사건을 적어 올렸다. 르엉미린이 말했다. “3곳을 조사했던 게 기억나요. 퐁니·퐁넛과 투이보, 하미였어요. 전 퐁니·퐁넛에 내려가 이틀 동안 생존자들을 만나 증언을 수집했지요. 투이보와 하미는 다른 동료들이 갔어요. 모두들 다녀온 뒤 글을 작성해 자료집을 만들었고요.” 투이보와 하미도 1968년 사건이다. 각각 1월20일과 2월22일 참화를 겪었다. 투이보에선 145명이, 하미에선 138명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2곳 다 희생자 수가 퐁니·퐁넛 마을의 두 배다. 투이보 사건은 당시 한국군 해병제2여단이 추라이에서 호이안으로 주둔지를 옮기던 비룡작전 때, 하미 사건은 퐁니·퐁넛 때와 같은 구정대공세 반격 작전인 괴룡1호 작전 때의 일이다. 퐁니·퐁넛과 함께 투이보와 하미는 베트남전쟁기 꽝남성 디엔반현의 3대 사건으로 꼽힌다.

디엔반현뿐이랴. 퐁니·퐁넛 마을에서의 일은 유별난 사건이 아니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문제를 1999년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린 구수정 박사(전 호찌민 통신원)에 따르면, 1968년 1월부터 1969년 11월까지 주이쑤엔현·꾸에선현·탕빈현 등 꽝남성에서만 민간인 4천여 명이 희생됐다. 이는 한국군 전투부대가 파병된 전체 기간인 1965~73년 중부 5개 성(꽝남·꽝응아이·빈딘·푸옌·카인호아)에서 목숨을 잃은 민간인 총 9천 명의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수다. 9천 명 중 4천 명, 4천 명 중 74명. 그러니까 퐁니·퐁넛 마을의 74명은 가장 진부한 표현대로 ‘빙산의 일각’이다.

한국 사회에 충격 준 민간인 학살

퐁니·퐁넛 마을 입구의 야유나무 옆 위령비에선 그 ‘빙산의 일각’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다. 사건 당시 78살이던 1890년생 할아버지부터 1967년생 젖먹이까지, 이름과 태어난 해, 고향을 새겨놓았다. 위령비 앞 안내판엔 베트남어로 이렇게 적혀 있다. “1968년 2월12일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야유나무에서 74명의 양민이 남조선 군인에게 학살을 당했다. 음력 무신년 1월14일.” 이 위령비는 한국의 시민단체 ‘나와 우리’ 회원들이 시민 모금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디엔안사 인민위원회와 협의해 2004년 8월에 준공했다. 마을에서 위령비까지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 진입로도 같은 해 7월 ‘나와 우리’ 회원 10여 명이 베트남 자원봉사단체 회원들과 삽을 들고 직접 닦았다.

한국인들이 이곳을 찾기까지엔 의 연속 보도가 한몫했다. 본격적인 보도는 1999년 9월2일치였다. 구수정 호찌민 통신원이 그해 여름 한국군의 작전지역이던 중부 5개 성을 돌며 확보한 증언들을 특집으로 기사화했다. 독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공식적인 매체에서 이런 이야기를 처음 접했기 때문이다. 2000년 봄부터 서너 차례 이어진 참전군인들의 고백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은 무려 1년간 매주 1~2쪽을 할애해 베트남인들의 피해 실상을 알렸고 성금 모금운동을 했다. 독자들이 거대한 감동으로 화답했지만, 반감의 거대한 회오리도 만났다.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의 명예가 훼손당했다”고 주장하는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 소속 2천여 명이 2000년 6월27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을 습격해 난동을 부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윤전기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공갈 전화로 인해 폭발물 탐지견이 윤전기 주변을 수색하는 소동까지 일어났다. 1년 뒤인 2001년 8월23일 김대중 대통령은 베트남 쩐득르엉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자리에서 “불행한 전쟁에 참여한 걸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사과했다. 김 대통령은 병원·학교 건립을 골자로 한 베트남 중부 5개 성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약속했고 실제 이뤄졌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베트남전 양민학살 진상규명위원회’로 출발한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가 출범했고(2003년), ‘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이 페이스북을 통해 결성됐다(2012년).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2000년부터 매년 한국군 피해 지역에 봉사활동을 가고 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한국 사회에서 인권 이슈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2014년 2월12일 오후, 퐁니·퐁넛 위령비 앞엔 10개의 조화가 놓였다. 모두 한국의 시민단체나 학교에서 보내온 꽃이다. 조화 리본에는 이런 말들이 베트남어로 적혔다. “우리는 여러분의 희생을 진심으로 사과합니다.”(베트남평화의료연대) “영령들이여 편히 쉬소서.”(제주작가회의) “퐁니·퐁넛 희생자 가족들께 다시 한번 무릎 꿇어 사죄드립니다. 미안해요.”(베트남과 한국을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 “기억하겠습니다. 그날의 역사!”(여행대안학교 로드스꼴라) “퐁니·퐁넛 마을 희생자들과 가족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더 많이 노력하겠습니다.”(평화박물관)

점점 잦아드는 스포트라이트

위령비 위로 하늘은 맑고 파랬다. 바람이 불어왔다. 조화를 지탱하는 대나무 받침대는 가늘고 약했다. 조화들이 하나둘 쓰러져 나뒹굴었다. 집에서 제사를 마치고 위령비를 찾아온 참배객들이 조화를 일으켜세웠다. 참배객들이 떠나면 조화는 또 쓰러졌다. 뒤늦게 희미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나 그 빛조차 점점 바스라지는 망자들의 오늘을 말해주는 듯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바람은 더 세게 불었다. 야유나무 잎사귀가 춤을 추었다. 어둠이 스며들자 가로등 하나 없는 야유나무와 위령비 주변은 칠흑처럼 깜깜해졌다. 그 위로 여객기 한 대가 날아갔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끝으로: 1968년은 독자 여러분과 무슨 상관일까요? 10대나 20대 젊은이라면 더욱 까마득하겠네요. 마치 제가 어렸을 적 할아버지에게 듣던 일제 식민지 시절 이야기를 접하는 느낌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하필 1968년 베트남일까요. 연재를 끝내면서 다시 한번 자문해봅니다. 저는 1968년이 대한민국의 어떤 비밀스러운 기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하고 피폐했던 농업국가가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5위(2013년)의 경제대국이 되기까지의 어떤 기원 말입니다. 한국은 어떻게 이렇게나 빨리 잘사는 나라의 반열에 올랐을까요?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북한보다 형편이 못하던 남한이 말입니다. 오로지 박정희의 원대한 경제개발 계획과 능력 덕분일까요? 아니면 미국과 밀당을 잘해서였을까요. 한국인이 천성적으로 근면해서일까요. 아무튼 저는 여기에 ‘베트남 파병’을 빼놓을 수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파병은 대한민국의 로또였습니다. 벼락부자의 환호 이면엔 파탄의 두려운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저는 그 뒤에 웅크린 ‘베트남인들의 눈물’에 주목했습니다. 국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인 ‘대한민국 참전군인들의 눈물’도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연재한 글을 통해 그 눈물들에 얽힌 역사를 가능한 한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눈물이 21세기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취와 모순에 어떻게 닿아 있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했습니다.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 마을의 하루는 그 모델이 되기에 가장 적합한 시공간이었습니다. 기대대로 됐나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