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죽지 않았다.
판르엉(42)은 복 받은 사람이다. 판르엉 부부와 9명이나 되는 아들딸들은 모두 무사했다. 그 누구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하늘이 도운 집이었다.
1968년 2월12일, 한국군의 돌발적인 민가 초토화 작전이 벌어진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촌. 마을에 퍼져가는 총성과 고성, 울부짖음을 통해 한국군이 진입해 총기를 난사하고 있음을 파악한 판르엉은 가족을 추슬러 집 동굴에 숨었다. 옆에 웅크려 있던 아내 응웬티도이(35)가 목소리를 떨며 말했다. “우리 집은 초가집인데 불이 붙으면 어떡하죠?” 판르엉도 그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린 터였다. 아내는 옆집 응웬응예(68) 할아버지 집으로 가자고 했다. 판르엉은 그러자고 했다. 가족은 함께 집 뒷마당을 통해 응웬응예 집으로 건너갔지만 곧 경악할 만한 장면과 마주하고 말았다. 그 집엔 응웬응예의 며느리 찐티안(33), 응웬티호아(5), 응웬티투언(2) 등 일가족이 피투성이 주검이 돼 있었다. 특히 두 살배기 응웬티투언은 엄마인 찐티안의 몸 위에 엎드린 채 숨져 있었다. 엄마의 젖가슴에 얹힌 꼬마의 두 손이 보였다. 연기가 새어나왔다.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얼른 피해야 했다.
꼴 먹이던 물소의 보호를 받지 못한 찐쩌
판르엉은 가족을 데리고 다시 옆집으로 향했다. 찐떠이(45)가 사는 곳이었다. 물소 한 마리가 입구를 막아섰다. 판르엉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더 이상 방법이 없었다. 물소를 달래며 간신히 안으로 들어갔다. 집 동굴엔 찐떠이와 서너 명 되는 그의 아이들이 보였다. 찐떠이의 아내 쩐티득(41)은 보이지 않았다. 판르엉은 아내와 아이들을 침대 밑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 역시 숨었다. 그래봤자 한국군이 들이닥친다면 발각은 시간문제였다.
군인들의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 달그락거리는 총열 소리가 가까이 들려왔다. 한국군이 당장 집에 들어와 실탄을 난사할 것만 같았다. 군홧발 소리가 멈췄다. 군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크게 외쳤다. 물소가 성질을 부리며 군인들을 막아서는 것 같았다. 진로를 방해받은 군인이 짜증을 내는 듯도 했다. 알 수 없는 한국말이었다. 갑자기 엄청난 폭음이 울렸다. 수류탄을 던진 모양이었다. 물소는 미친 듯 단말마적으로 울어젖히더니 계속 씩씩거렸다. 판르엉 가족과 찐떠이 가족은 그러고도 한참을 숨어 있다가 집 앞으로 나왔다. 물소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한국군 병사는 애꿎은 가축에게 화풀이를 하다가 돌아간 것일까. 물소가 온몸으로 군인을 막아 집 안에 숨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린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15명이 넘는 두 가족의 생명이 위태로웠으리라.
생명의 은인인 물소는 평소 이 집의 안주인인 쩐티득이 가장 아끼던 보물 1호였다. 물소는 바쁜 농사철에 기계를 대신해 쟁기질을 했다. 가축시장에 나가 돈 주고 사려면 거금을 줘야 했다. 쩐티득의 셋째아들 찐쩌(12)는 물소와 가장 친한 아이였다. 매일 물소에게 꼴을 먹이러 다녔기 때문이다. 찐쩌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물소와 함께 돼지와 닭 등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을 돌보았다. 결정적인 순간 찐쩌는 자신이 매일 꼴을 먹여주던 물소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날 찐쩌는 오전에 장을 보러 나가는 엄마 쩐티득의 바지 자락을 잡고 따라나섰다. 쩐티득은 같은 마을에 사는 판티찌(34)와 함께 디엔반현 시장에 갈 계획이었다. 2월12일은 정월 대보름 하루 전날인 음력 1월14일이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려고 했다. 1번 국도와 가까운 야유나무 근처에 위치한 판티찌의 집에 도착하자 찐쩌는 엄마 손을 놓고 그곳에 눌러앉아 놀기로 했다. 판티찌의 큰아들 응웬득상(15)은 친한 동네 형이었다. 그곳에는 응웬득상의 여동생인 응웬티쫑(11)과 응웬티탄(8), 남동생인 응웬득쯔엉(6)이 함께 있었다. 아이들은 채소심기와 병모으기 놀이를 한다며 깔깔거렸다. 집 안에 있는 어른이라고는 유일하게 응웬득상의 이모인 판티응우(32)뿐이었다. 판티응우는 자신의 여덟 달 된 아들 도안테민을 안고 서성거리며 아이들이 심한 장난을 칠 때마다 말리곤 했다.
옆구리·다리서 뿜어져나온 피쩐티득과 판티찌, 두 여인은 마을 입구를 나서다 총성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쩐티득은 찐쩌 생각부터 했다. 판티찌의 집에 잘 있는 걸까. 찐쩌를 찾아 데려가야 했다. 판티찌 역시 집에 남은 아이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채웠다. 집에서 아이들을 보호해줄 사람은 이모밖에 없다. 아버지 응웬득푸엉은 1년 전 세상을 떠났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도망치면서, 퐁니마을은 아수라장이 됐다. 판티찌와 쩐티득은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어떻게든 자신의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쩐티득과 판티찌는 다급하게 뜀박질을 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쩐티득의 몸이 갑자기 휘청거렸다. 옆구리에서 피가 흘렀다. 걸을 수도 없었다. 오른쪽 다리에서도 피가 뿜어져나왔다. 쩐티득은 논바닥에 쓰러졌다. 그 와중에도 이곳은 판티찌의 여동생 판티응우의 논이라는 의식이 가물가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다시 물소의 보호 아래 있던 찐떠이와 쩐티득 부부의 집. 한참이 지났을까. 침대 밑에 숨어 있던 판르엉은 집 밖으로 나와 마을을 살폈다. 상황은 끝났다. 한국군은 물러났다. 옆 동굴에 숨어 있던 쩐티득의 남편 찐떠이도 함께 나왔다. 대나무로 된 벽이 불에 타며 거리는 소리를 냈다. 마을은 온통 불타고 있었다. 판르엉의 집도 재가 되었다. 동굴에 계속 숨어 있었다면 타죽었으리라. 퐁니촌에서 불타지 않은 집은 오직 한 곳, 찐떠이의 집뿐이었다. 두 사람은 아직도 동굴과 침대 밑에 남아 있던 각자의 아이들을 다 불러 나오게 했다.
찐떠이와 쩐티득의 셋째아들 찐쩌는 눈을 뜨고 죽었다. 그날 찐쩌가 놀던 동네 형 응웬득상의 집으로 한국군이 들어왔다. 그 집에 있다가 온전하게 살아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응웬득상과 응웬티탄은 목숨을 건졌지만, 치명적 부상을 입었다. 둘은 총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탈출을 시도했다. 두 남매는 서로를 격려하며 1번 국도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나가려고 시도했다. 나머지는 즉사했다. 응웬티쫑도 눈을 뜬 채 죽었다. 막내 응웬득쯔엉은 입에 큰 부상을 입고 주검으로 발견됐다. 살아남은 응웬티탄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군은 응웬득쯔엉의 입에 총을 대고 쏘았다. 이모 판티응우와 그녀의 아들 도안테민도 주검 더미 속에서 나왔다. 시장으로 가다가 돌아오던 엄마 판티찌도 근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들을 처음 목격한 사람 중 하나는 판르엉이었다. 찐쩌가 꼴을 먹여 키운 물소 덕분에 대가족이 모두 안전하게 숨었던 판르엉이 물소의 친구 찐쩌의 감기지 않은 두 눈을 보았다. 찐쩌는 자기 집에만 있었다면 살았다. 판르엉은 자기 집에만 있었다면 죽었다. 찐쩌는 동네 형 응웬득상의 집에 갔다가 죽었다. 판르엉은 동네 꼬마 찐쩌의 집에 가서 살았다. 두 사람의 운명은 그렇게 엇갈렸다.
판르엉은 곧이어 엉금엉금 기어가는 응웬득상과 응웬티탄을 발견했다. 왼쪽 옆구리에 총을 맞은 응웬티탄의 내장은 자꾸만 밖으로 삐져나왔다. 판르엉은 손으로 응웬티탄의 내장을 눌러 넣어주었다. 1번 국도 쪽에서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이 들어왔다. 헬리콥터도 보였다. 부상자를 병원으로 데려갈 모양이었다. 판르엉은 동네 주민들과 함께 힘을 모아 응웬득상과 응웬티탄을 헬리콥터 있는 곳까지 부축해 데려갔다. 그곳엔 남베트남 민병대원이자 응웬득상과 응웬티탄의 작은아버지인 응웬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응웬사에게 인계했다.
심장, 심장이 뛰고 있다!쩐티득은 죽었는가. 판르엉과 함께 구조활동을 하던 한 주민은 판티응우의 논에 버려진 끔찍한 주검들을 수습했다. 어떤 이는 발이 없어졌고, 어떤 이는 머리가 부서졌다. 내장이 다 쏟아져나온 이도 있었다. 그 주검들을 다 끌어내니 맨 아래에 피칠갑된 쩐티득이 있었다. 오른쪽 허리와 허벅지가 온통 피범벅이었다. 죽은 게 분명해 보였다. 혹시나 해서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심장, 심장이 뛰고 있었다. 쩐티득의 몸을 훌쩍 둘러업었다. 그는 1번 국도 쪽으로 성큼성큼 뛰어갔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그 뒤: 쩐티득은 살았다. 셋째아들 찐쩌의 주검은 보지 못했다. 다낭병원에서 10일간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엔 다낭항구에 정박해 있던 독일병원선에 입원하기도 했다. 긴 기간 치료를 받았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그녀는 2014년 7월 현재 87살의 할머니다. 남편 찐떠이도 현재 91살로 생존해 있다. 부부는 1번 국도변의 작은 주택에서 퐁니촌 촌장으로 일하는 막내아들 찐티엔찌엔(51)과 함께 산다. 찐티엔찌엔은 사건 당일 5살이었고, 집 안 동굴에 아버지 찐떠이, 둘째형 찐놈(16), 누나 찐티남(14)·찐티쩌우(10)와 함께 숨었기에 무사했다. 역시 물소 덕분이었다. 쩐티득 할머니의 사연은 1999년과 2001년 에 몇 차례 보도됐다. 2013년 1월 필자가 만난 쩐티득 할머니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꽝남 지방 사투리에 능숙한 베트남의 젊은이가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질문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눈도 침침해서 사람과 사물을 잘 분간하지 못했다. 그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식사를 한 뒤 뜰에 심은 채소에 물 주는 일을 거른 적이 없다고 했다. 집에서 키우는 돼지와 닭을 보살피는 일도 쩐티득 할머니의 몫이란다.
판르엉 할아버지는 끝까지 복을 받았다.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촌에서 74명이 죽을 때 모두 무사했던 그의 대가족은, 2013년 1월 필자가 퐁니를 방문했을 때도 변함이 없었다. 다 함께 살지는 않지만, 이후 자식 둘을 더 낳아 가족의 공식적인 수는 13명으로 불어나기까지 했다. 판르엉은 2014년 7월 현재 88살의 할아버지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 아내 응웬티도이는 당뇨와 고혈압으로 투병 중이었다. 8개월이 지난 2013년 가을, 8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판르엉 할아버지의 가장 큰 걱정은 30대 중반인 막내아들이다. 인식 능력이 떨어져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고엽제 후유의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고엽제에 노출된 부모의 영향이었을까. 하필 전쟁 뒤에 태어난 막내에게 고약한 운명의 십자가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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