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엉망진창이었다.
1968년 10월, 비가 폭탄처럼 쏟아졌다. 한 주 내내 거센 바람이 불었다. 베트남 중부지방은 폭우에 취약했다. 물에 잠긴 길은 저수지처럼 변했다. 1번 국도엔 높다란 전신주만 보였다. 집 천장에 비상용으로 설치해놓은 작은 보트를 꺼내 노를 저어 이동하는 주민들이 보였다. 간간이 지프차도 다녔다. 물속에서 차체의 절반가량만 내놓고도 지프는 시동이 꺼지지 않은 채 용케 앞으로 나아갔다. 그 유명한 M151A1 지프였다. 1959년 미국에서 처음 개발된 뒤 1965년부터 베트남전에 투입된 이 지프는 완벽 방수를 자랑했다. 클러치를 비롯한 각종 장치는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특별 설계됐다. 배기가스를 내보내는 머플러는 물에 잠기지 않도록 뒤쪽 위에 달렸다. 미군들은 이를 ‘케네디 지프’라 불렀다. 케네디 지프는 5~10월 우기 때 폭발적인 강우량을 보이는 베트남 지형에서 수륙양용의 기능을 톡톡히 해냈다. 덕분에 ‘베트남전의 영웅’이라는 호칭까지 부여됐다. 미군은 한국군에게도 케네디 지프를 지원했다. 해병 제2여단 1대대엔 두 대가 배당되었다. 대대장과 대대참모의 몫이었다.
<font size="3">폭우 속 긴박했던 군표 수거 작전 </font>
그날은 정확히 1968년 10월21일이었다. 제1대대 인사행정관 최 중위는 하늘에서 땅 밑을 오가는 케네디 지프를 바라보았다. 미군 헬기에 탑승해 작전지역으로 가는 중이었다. 1중대 1소대장과 부중대장을 거쳐 1대대 인사행정관으로 보직이 바뀐 그의 오늘 임무는 전투와는 관계가 멀었다. 육상으로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 위치한 중대원들로부터 군표를 걷어와야 했다. 케네디 지프로도 접근하기 힘든 곳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가능한 이동 수단은 헬기뿐이었다. 헬기가 작전지역인 정글 부근에 이르자 고도를 낮췄다. 지표면이 모두 범람해 착륙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물에 닿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고도를 낮췄다. 헬기 문을 열었다. 아래에서 기다리던 중대 장교가 손을 흔들었다. 최 중위도 손짓을 보냈다. 가까운 거리에서 중대 장교가 비닐백을 던졌고 최 중위가 이를 낚아챘다. 문이 닫혔다. 헬기는 다시 날아올랐다. 최 중위는 비닐백을 열었다. 5센트, 10센트, 25센트, 1달러 등 조잡한 액수의 군표가 한가득이었다. 헬기는 또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한 번 더 군표를 걷으러 가야 했다.
12시간이 주어졌다. 10월21일 아침 7시를 기해 주월미군사령부 당국은 긴급조치를 발표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종래의 모든 군표를 무효화한다. 구군표는 12시간 내에 신군표와 교환한다.” 즉각 여단 본부에서 대대별로 병사들이 소지한 군표를 정리하고 취합해 다낭의 해병대 휴양소로 와 새 군표와 교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어이없는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강풍과 호우를 동반한 이 악천후에 12시간 내에 1대대 관할인 1·2·3중대의 군표를 모두 모아오라니. 일부 중대는 정글로 작전을 나간 상태다. 왜 하필 물난리 통에 군표를 교환한다고 생난리를 치는 걸까. 뭐가 이리도 급하단 말인가. 투덜거려봤자 입만 아프다. 최 중위는 각 중대에 무전연락을 했다. 개인별 군표 보유 액수를 정리한 뒤 군표를 모아 중대의 현재 작전지역에서 대기하라는 내용이었다. 전투를 위한 군사작전보다 더 긴박한 군표 수거 작전이 시작됐다.
군표란 무엇인가. 화폐다. 특수화폐다. 외국에서 전쟁을 하거나 군대가 주둔한 경우, 군대와 군인들이 필요한 물품을 사는 데 쓰기 위해 정부 또는 군 당국에서 발행한다. 베트남전의 경우 미국의 파병 요청에 응한 연합군 군인들에게 미군 당국이 발행하는 군표가 지급되었다. 군표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위원회(연준위)에서 발행한 이른바 ‘본토불’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 베트남의 한국 군인들은 월급처럼 군표를 한 달에 한 번씩 받았다. 정글에서 수색·정찰을 하는 와중에도 군표 지급일은 잘 지켜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월급이 아닌 전투수당이었다. 가령 장교인 최 중위는 베트남에서 하루 4.5달러를 전투수당으로 받았다. 사병 중 일병의 경우 1.35달러를 받았다. 이를 30일 한 달치로 환산하면 중위는 135달러, 일병은 40.5달러였다(1968년 당시 환율은 1달러당 282원가량). 대한민국 국방부가 주는 월급은 파병 직전에 1년치를 한꺼번에 받았다. 장교나 사병들은 베트남에 파병돼 본래 월급의 두 배 이상을 챙겼다. 목숨이 담보로 잡혀 문제였지만.
<font size="3">신군표냐, 휴지 조각이냐 </font>군표 교환이란 일종의 화폐개혁이었다. 군표 교환이 선포되는 순간 기존의 군표는 구군표로 명명되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신군표와 교환하지 않으면 휴지 조각이 되었다. 군표 교환은 군인들에게 심각한 사건이 아닐 수도 있었다. 군 당국에 군표를 제출해 바꾸면 그만이었다. 보유한 군표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군 당국으로부터 받는 군인들의 전투수당 중 80%를 고국에 강제송금토록 했다. 한국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이 한창이었다. 송금된 군표는 국내에 유입돼 한국 경제의 외환보유고를 높여주었다. 1968년 한 해에 송금된 전투수당이 3140만달러였다(1965~72년 송금 총액은 2억150만달러). 이렇게 베트남 현지의 한국군에겐 전투수당의 20%만이 지급됐으니, 실제로 중위는 한 달에 27달러, 일병은 8.1달러를 받았다. 직업군인인 장교야 조금 쓸 만한 금액이었지만, 사병들에겐 그야말로 푼돈이었다. 미군이 대규모로 주둔한 다낭과는 달리 한국군 해병 제2여단이 주둔한 호이안엔 미군 PX가 없었다. 사병들은 간혹 민가 부근을 지나다 작은 가게가 보이면 들어가 군표를 내고 담배와 술, 콜라, 과일을 사먹는 수준이었다. 가게 주인인 베트남인은 그 군표를 받아두었다가 나중에 본토불이나 남베트남 화폐인 피아스타로 바꿔 사용했다. 군표와 본토불의 교환가치는 본래 1:1이었으나 지하시장에선 1.2:1 정도로 군표의 가치가 낮았다. 민간인들이 군표로 상품을 거래하는 일은 엄밀히 말하자면 불법이었다. 현실은 달랐다. 미군과 한국군이 보유한 군표는 공공연히 부대 바깥에서도 실제 화폐처럼 통용되었다.
최 중위가 탄 헬기는 해가 지기 전 다낭으로 향했다. 12시간 안에 대대원 전원의 군표를 다 모았다. 각 대대 인사행정관들은 다낭에 있는 해병대 휴양소 숙소에 저녁까지 집합하기로 돼 있었다. 여단 본부 간부들이 각 대대에서 온 장교들을 맞았다. 최 중위는 각 중대에서 걷어온 군표 다발과 함께 개인별 보유 액수를 적은 보고서를 내놓았다. 파견 나온 미군 경리장교가 이를 검토했다. 최 중위는 눈치를 살폈다. 100달러짜리를 묶은 또 다른 고액권 다발이 그의 품에 있었다. 이 군표의 교환을 미군 장교에게 요청할 것인가 말 것인가.
100달러 뭉치는 그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달려온 한국인 사업가 두 명에게 받은 군표였다. 그들은 평소 안면이 있는 영관급 간부의 소개를 받고 대대 인사 행정관인 최 중위를 찾아왔노라고 말했다. 그중 한 명은 자신을 아리랑식당 사장이라고 소개했다. 다낭엔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두 곳과 카바레 한 곳이 있었다. 간혹 한국인 장교들이 다낭에 휴양이나 출장을 갈 때 들르는 공간이었다. 술과 음식, 노래로 한국군 장교와 사병들의 향수를 달래주었다. 식당에선 김치찌개와 소주를 즐길 수 있었고, 카바레에선 이미자의 같은 뽕짝을 들으며 스텝을 밟을 수 있었다. 주 고객은 군인, 그중에서도 한국군이었다. 군인들의 지불수단은 당연히 군표뿐이었다.
<font size="3">군표 유통 방치한 미군, 이익 얻고 튄 셈 </font>그렇게 모은 군표가 몽땅 휴지가 될 위기에 처하자 다급하게 SOS를 치러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군표 뭉치를 내놓으며 “신군표와 바꿔주면 절반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최 중위는 “시도는 해보겠지만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솔직히 말했다. 예상대로였다. 미군 경리장교는 최 중위 담당의 1대대가 보유한 군표 금액이 얼마가 될지 예측하고 있었다. 대대 전체 예상 금액을 훨씬 웃도는 고액권 군표 다발을 내밀자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교환을 거부했다. 고액권이 존재할 리 없음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달 전 예행연습까지 치른 군표 교환이었다. 그땐 완전히 속았다. 이번처럼 각 부대 장교와 사병들의 군표 보유액을 적어내라고 한 점은 똑같았으나, 실제 군표를 걷지 않은 점이 달랐다. 취합된 액수가 얼마인지 정리하고 난 뒤에야 연습이라는 통고를 받았다. 단순한 연습이 아니었다. 일종의 ‘도상 훈련’이었다. 실제 군표 교환을 앞두고 각 부대에서 받는 전투수당과 송금 액수, 병사당 평균 군표 보유 액수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며 이동이 쉽지 않은 날을 디데이로 정했다. 미군 PX는 일제히 문을 닫았고, 영내의 군인들에겐 외출금지령이 떨어졌다. 민간인들이 대책을 세울 수 없도록 발을 묶어놓고 기습적으로 군표 교환을 선포한 것이다.
호이안과 다낭의 상인들은 완전히 허를 찔렸다. 군인들에게 군표를 받고 물건을 팔며 생계를 꾸려온 그들은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피아스타나 본토불로 바꿔놓지 않은 군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종이에 불과했다. 미군 최고위급 장교들과 비밀스런 선이 닿아 있다면 모를까, 12시간 내에 폭우를 뚫고 묘책을 써 신군표와 교환하기는 쉽지 않았다. 두 명의 그 한국인 사업가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최 중위에게 매달렸으리라. 군표를 시중에 유통하도록 방치한 미군 당국은, 막대한 통화량으로 물건을 구매해 이익을 취하고 튄 셈이었다. 화폐 디자인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무력화하는 기가 막힌 작전. 최 중위는 “참으로 악랄한 도둑놈 심보”라고 생각했다.
미군 당국은 긴급한 군표 교환 조치에 대해 “군표 위조와 암거래에 대처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댔다. 실제로 군표의 위조나 불법유통의 흐름은 존재했다. 불법유통은 미군 당국의 방조와 묵인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위조 역시 군표 교환의 핑계로 삼기엔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 결과로 얻는 미군 쪽의 이익과 반대편의 손실이 지나치게 컸기 때문이다.
<font size="3">거대한 PX, 배보다 큰 배꼽 </font>다낭에는 주월미군사령부가 운영하는 PX가 있었다. 개방형인 PX의 규모는 당시 한국의 백화점을 능가했다. 없는 게 없었다. 미국 사회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압축해놓은 듯했다. 담배와 위스키, 생필품은 물론 TV와 냉장고 등 각종 전자제품에 더해 귀금속까지 팔았다. 한국군 장교들은 귀국 뒤 결혼에 대비해 미군 PX에서 130달러 정도 하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가는 게 유행이었다. 최 중위는 가끔 의문에 휩싸였다. ‘전쟁터에서 왜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판단 말인가.’ 그는 동료 장교들과 화제로 삼던 영국군 PX 이야기를 떠올렸다. 한국전쟁 때 영국군이 전투부대 1개 중대당 대대급의 PX를 붙여 보내더라는 것이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그 말은, 전쟁의 본질이 장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무기의 그늘엔 돈이 흘렀다. 군표가 흘렀다. 달러가 장난을 쳤다.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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