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똑똑히 보았다 불길 속 성난 해병대원들

⑰ 한국 군인이 아이·부녀자·노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한 그날,
성한 이는 죽은 엄마 젖을 빨던 갓난아이뿐
등록 2014-05-23 15:20 수정 2020-05-03 04:27

생생한 클로즈업이었다.
시뻘건 불길을 배경으로 총을 든 한국 해병대원들의 성난 표정이 잡혔다.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의 주검은 끝없이 나타났다. 살려달라 애원하는 부상자들의 일그러진 얼굴도 보였다. 실물보다 대여섯 배로 확대된 그 처절한 광경에 더 이상 눈을 붙이고 있을 수 없었다. 남베트남 민병대원 응웬사(30)는 쌍안경을 내려놓았다. 육안으로도 충분히 보이는 거리였다. 총소리와 폭음은 계속 쿵쿵 울렸다. 그는 옆에 있는 동료 한 명에게 쌍안경을 건네준 뒤 초소에서 내려왔다.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촌 근처 1번 국도변의 키엠루 초소였다. 응웬사를 포함한 남베트남 민병대원 26명은 이곳을 근거지 삼아 인근 지역을 정찰했다. 사건이 벌어지면 현장으로 긴급 투입되기도 했다. 드디어 뭔가 사건이 벌어진 날이었다. 민병대원 전원이 초소에 집결했다. 초소를 관할하는 미 연합작전중대 산하 경비대(일명 캡소대) 장교와 사병 5명도 모였다. 모두 불타는 서쪽 퐁니촌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1968년 2월12일 월요일 오후 1시30분께였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주검을 논과 우물에 내버리다</font></font>

응웬사는 지독한 무력감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키엠루 초소의 벙커 위에서 퐁니촌 옆으로 이동하는 한국군을 발견한 것은 오전 10시께였다. 그들이 마을로 진입해 주민들을 공격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곳에는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의 가족과 친척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연히 민병대원들은 신속하게 마을로 진입해 한국군을 말리고 주민들을 구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군 장교는 잠자코 기다리라고만 했다. 위험하다고 했다. 한국군 대원들이 흥분한 상태라 자칫 충돌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다. 초소 근처에는 옆 마을 주민들도 몰려와 웅성거렸다.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응웬사의 집도 퐁니였지만 키엠루 초소 바로 앞이라 사건이 벌어진 현장과는 거리가 있었다. 부인 레티씨와 딸 응웬티리엔(6), 아들 응웬득프억(2)에겐 별일 없으리라. 문제는 1년 전 베트콩에 끌려간 뒤 실종된 응웬득트엉(1929년생)의 부인, 즉 형수 판티찌(34) 가족이었다. 형수의 아이들은 4남매였다. 아이들의 이모도 함께 살았다. 닥치는 대로 죽이는 걸로 봐서는 다 무사하다고 보기 힘들었다. 마음이 급했다.

1968년 2월12일 당시 남베트남 민병대원이었던 응웬사. 이듬해 정찰을 나갔다가 지뢰를 밟아 오른쪽 발목과 왼손의 손가락을 잃었다. 2000년 5월 퐁니에서 인터뷰할 당시의 모습.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아들 응웬득프억. 부상당한 아이들이 미군 헬기로 이송될 때 보호자로 함께 탔던 응웬티르엉, 학살 현장을 목격한 응웬티니아. 응웬티르엉과 응웬티니아는 올해 2월 모습이다(왼쪽부터 시계방향). 고경태

1968년 2월12일 당시 남베트남 민병대원이었던 응웬사. 이듬해 정찰을 나갔다가 지뢰를 밟아 오른쪽 발목과 왼손의 손가락을 잃었다. 2000년 5월 퐁니에서 인터뷰할 당시의 모습.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아들 응웬득프억. 부상당한 아이들이 미군 헬기로 이송될 때 보호자로 함께 탔던 응웬티르엉, 학살 현장을 목격한 응웬티니아. 응웬티르엉과 응웬티니아는 올해 2월 모습이다(왼쪽부터 시계방향). 고경태

그 시각, 응웬티르엉(31)은 집 안 동굴에 있었다. 총소리가 나자마자 어머니 응웬티륵(52)과 함께 숨었다. 집 안에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응웬트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응웬티르엉은 아직 미혼이었다. 미래를 약속한 남자는 있었다. 약혼자 하응옥메오는 남베트남 군인이었다. 고향과 멀리 떨어진 정글로 베트콩과 싸우러 갔다. 모녀는 동굴 안에서 1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집은 키엠루 초소에서 1k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다행히도 불타는 퐁니촌과는 반대편이었다. 퐁니에 사는 친척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다들 괜찮을까.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응웬티니아(30)는 동굴에 있지 않았다. 4명의 자식들을 꼭 끌어안고 집 근처에 숨어서 퐁니촌 현장을 보았다. 총소리는 심장을 벌떡거리게 했다. 딸 쩐티빈(9), 쩐티봉(7), 아들 쩐반통(3), 쩐반민(1)에겐 손으로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고 있으라 했다. 응웬티니아는 쌍안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너무나 똑똑히 보았다. 믿기 힘든 충격적이고 야만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한국 군인들은 음식을 말리는 넓고 둥근 나무 채반에 여러 구의 주검을 한꺼번에 올려놓고 논에 버렸다. 그녀의 집 뒤채에도 걸려 있는 커다란 채반이었다. 그 주검들은 언뜻 엄마 1명과 아이들 4명으로 보였다. 사람을 짐승처럼 취급했다. 한국군은 주검을 우물에 던지기도 했다. 농수를 공급하는 우물이었다. 혹시 언니 응웬티토이(33)가 저 속에 있지 않을까? 언니는 퐁니에 살았다. 그곳은 응웬티니아의 고향이기도 했다. 조카 2명도 걱정이었다. 총소리가 멎기만을 기다렸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다행히 헬기에 태워 병원에 보냈으나…</font></font>

오후 3시께, 응웬사는 키엠루 초소에서 출발했다. 미군들은 한국군이 마을을 빠져나갔다고 판단하고 남베트남 민병대원들과 함께 퐁니촌으로 향했다. 동굴에 숨어 있던 응웬티르엉도, 집 근처에서 몰래 현장을 목격하던 응웬티니아도 퐁니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족과 친척들의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가슴속에 얹혀 있던 큰 돌멩이는 결국 쿵 내려앉았다. 응웬사는 마을 초입에서 중상을 입은 조카 2명과 맞닥뜨렸다. 배와 엉덩이에 많은 피를 흘린 응웬득상(15)은 일어나지도 못했다. 조카는 집에서 여기까지 기어왔다고 했다. 응웬득상의 여동생 응웬티탄(8)은 내장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복부 출혈이 컸다. 둘 다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빨리 병원으로 보내야 했다(2014년 3월17일치 제1002호 참조). 하늘이 도왔다. 마침 미군이 부상자들을 위해 보낸 헬기가 1번 국도변에 도착했다. 다낭의 병원으로 10분 안에 갈 수 있었다. 응웬사는 조카들을 헬기에 태웠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부상당한 또 한 명의 성인 여자도 탔다. 미군 헬기 조종사는 누가 아이들의 보호자로 함께 갈 거냐고 물었다. 응웬사는 곤란했다. 형수와 또 다른 조카들을 찾으러 가야 했다. 마침 먼 친척뻘 동생 응웬티르엉이 보였다. 집 동굴에 숨어 있다가 퐁니로 들어오던 바로 그 응웬티르엉이었다. 응웬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부탁했다. “내 조카들이 많이 다쳤어. 헬기를 타고 가야 하는데 네가 보호자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응웬티르엉은 어리둥절했다. 응웬사는 덧붙였다. “혹시 숨이 끊어지면 네가 주검을 지키고 기다려줘. 내가 곧 병원으로 갈게.”

퐁니촌에 있는 농수 공급 우물. 1968년 2월12일, 일부 주민들은 한국군의 총에 맞은 뒤 이런 우물에 던져졌다고 한다. 고경태

퐁니촌에 있는 농수 공급 우물. 1968년 2월12일, 일부 주민들은 한국군의 총에 맞은 뒤 이런 우물에 던져졌다고 한다. 고경태

응웬티르엉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멀리서만 보던 헬기를 난생처음 올라탔다. 응웬득상과 응웬티탄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옷은 피로 흥건했다.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헬기에 탄 미군이었다. 카키색 군복에 선글라스를 낀 덩치 큰 이가 바로 옆에 앉았다. 옆구리에는 권총도 보였다. 미군은 사람들을 많이 죽인다고 들었다. 무서움이 몰려왔다. 헬기에 오르기 전 그녀에게 응웬사는 말했다. “괜찮아. 헬기에 올라가서 미국 사람 보지 말고 내 조카들만 보면 돼.” 그 말대로, 응웬티르엉은 미군의 얼굴을 절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헬기는 10여 분 뒤 다낭 병원에 내렸다. 문이 열리자 하얀 옷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 서너 명이 이동침대를 가져와 부상자들을 실어날랐다. 응웬티르엉은 그들을 따라갔다. 수술실은 출입통제구역이었다. 그저 병원 복도에 앉아 기다릴 뿐이었다. 의사들이 수술실을 수시로 들고 났다. ‘가위와 칼로 수술하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무심코 그런 걱정이 들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갔다. 조카들은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퐁니에 들어간 응웬사는 친척 중 온전한 이가 아무도 없음을 알고 절망했다. 형수 판티찌는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또 다른 조카 응웬티쫑(11)과 응웬득쯔엉(6), 그들의 이모인 판티응우(32)와 이모의 아들인 도안테민(8개월)이 다 죽었다. 응웬사는 일단 이들의 주검을 수습해야 했다. 다낭 병원으로 보낸 조카 2명이 어떻게 됐는지도 살펴봐야 했다.

<font size="3"><font color="#006699">동맹군의 이해할 수 없는 공격 </font></font>

응웬티니아도 눈물을 쏟았다. 퐁니촌 한가운데 모여 있는 주검 무더기 속에 언니 응웬티토이가 있었다. 조카 레딘딕(4)은 숨을 거둔 채 그 옆에 말없이 누워 있었다. 엄마와 아이들의 주검이 뒤섞여 있었다. 신기한 장면은 가슴을 내놓고 죽은 엄마 옆에서 꼬물거리는 갓난아기였다. 젖을 먹다 엄마는 죽고 아이만 혼자 살아난 모양이었다(다음 회에 상세히). 응웬티니아는 남편 쩐이(30)의 존재가 아쉬웠다.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었다. 남편은 공산당 활동가였다.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가끔 집에 다녀갈 뿐이었다.

응웬사는 자괴감에 사로잡혔다.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자들을 볼 낯이 없었다. 이번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베트콩의 짓이라면 분노에 사로잡혀 울분을 터뜨리기라도 할 텐데, 그럴 처지가 못 됐다. 한국군은 남베트남군의 동맹군이었다. 유가족들은 주검을 키엠루 초소 바로 맞은편 도로에 늘어놓았다. 밤새워 남베트남 정부를 성토했다. 베트콩들은 분명 이번 사건을 정치 선전의 호기로 삼을 것이다. 퐁니촌에는 베트콩 지지자와 남베트남 정부 지지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가령 응웬사의 형은 베트콩에 끌려간 피해자였고, 응웬티르엉의 약혼녀는 남베트남군에 입대했지만, 응웬티니아의 남편은 베트콩이었다. 마을 사람들 중 누가 어느 편을 지지하는지는 대충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그렇다고 둘 사이의 긴장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남베트남 정부 편에 서 있는 민병대원 응웬사는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font color="#C21A1A">■ 그 뒤</font>: <font color="#638F03">응웬티르엉은 헬기를 타고 다낭 병원으로 간 이틀 뒤 퐁니촌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조카들을 보살피겠다며 병원에 온 응웬사와 교대했기 때문이다. 응웬티르엉은 몇 개월 뒤 다낭 병원에 실려간 두 아이들이 모두 살아 있음을 알고선 깜짝 놀랐다.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죽은 형을 대신해 조카들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던 응웬사는 사건 1년 뒤 퐁니촌 인근으로 정찰을 나갔다가 베트콩이 설치한 지뢰를 밟는 바람에 큰 부상을 입었다. 오른쪽 발목이 잘렸고, 왼손의 세 손가락을 잃었다. 1년간 치료받았지만 의족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됐고, 1970년 남베트남 민병대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975년 사이공이 북베트남에 함락된 뒤엔 9개월간 감옥에 갇혀 재교육을 받았다. 1968년 2월12일 사건은 평생의 상처와 한이 됐다. 자신이 형수와 조카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2006년 병을 얻어 6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혀 모르고 지내던 응웬티르엉과 응웬티니아의 관계는 묘하게 얽혔다. 3년 뒤인 1971년, 응웬티르엉은 응웬티니아의 형부 레딘다이(1934년생)와 결혼했다. 응웬티르엉의 약혼자인 남베트남 군인 하응옥메오는 베트콩과 싸우다 전사했고, 레딘다이의 부인이자 응웬티니아의 언니인 응웬티토이는 1968년 2월12일 한국군에게 죽었다. 레딘다이로선 재혼이었다. 응웬티니아는 학살 때 목숨을 잃은 남편의 전부인 응웬티토이와 아들 레딘딕의 제사를 지금까지도 매년 지내준다.
응웬티니아는 사건 몇 달 뒤 두 줄로 행군하는 한국군을 만났다. 그 광경을 자식들과 함께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행군 대열에서 군인 한 명이 나오더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품에서 가족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과자도 주었다.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다. 1968년 2월12일을 떠올렸다. 무서웠다.</font>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