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수사관은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혹시나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염려는 붙들어매라고 했다. 경험한 사실 그대로만 말해달라고 했다. 수사관의 손에는 베트남 작전지도가 들려 있었다. 그가 지도를 펼쳐놓은 뒤 한 지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까 1번국도 여기서 서쪽으로 들어간 거죠?”
콩 볶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1969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해병 포항상륙전기지사령부 훈련교장관리대 사격장 보좌관 최(27) 중위는 해병대사령부 상급 간부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내일 ○○시 통일호를 타고 서울역에 내려라.” 통일호를 타려면 경북 포항에서 버스를 타고 대구로 나가야 했다. 그는 대구역에서 역무원에게 군인용 후불증을 보여주고 경부선 상행선 열차를 탔다. 무엇 때문에 서울행을 명령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서울역에 내리자 사복을 입은 헌병대 요원들이 기다렸다. 그들은 최 중위를 서울 명동 라이언스호텔로 데리고 갔다. 헌병대 요원들은 말했다. “뭔가 조사할 모양인데 큰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별일 없을 겁니다.” 최 중위는 라이언스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자마자 헌병대 요원들의 안내를 받아 길 건너편의 어떤 건물로 향했다. 그곳은 ‘남산’으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였다.
최 중위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건너편에는 두 명의 수사관이 앉았다. 태도는 친절했다. 고압적이지 않았다. ‘장교 대접을 해준다’는 생각에 편안해졌다. 수사관들은 질문을 던진 뒤 최 중위가 답하는 내용을 종이에 볼펜으로 메모했다. 녹음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수사관: 귀관은 1968년 2월 월남에서 해병제2여단 1중대 1소대장이었죠?
최 중위: 맞습니다.
수사관: 1968년 2월12일 월남 작전지역에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지도를 보여주며) 그날 아침에 1소대는 호이안 인근 꽝남성 1번국도에서 서쪽으로 이동 중이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죠?
최 중위: 당일 마을을 지날 때 1소대가 첨병소대로 맨 앞에 있었습니다. 일렬종대로 행군했는데, 저는 소대 대열 중간에 있었어요. 갑자기 총소리가 나 모두가 엎드렸습니다. 베트콩의 저격 같았어요. 한 명이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해 뒤로 뺐습니다. 그리고 중대장한테 무전을 쳤죠. 마을로 들어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위협사격을 하면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수사관: 퐁니마을로 들어갔는데, 가보니 어떻던가요?
최 중위: 죄다 부녀자와 노인, 아이들뿐이었어요. 집으로 들어가 모두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전부 뒤로 보냈어요. 그리고 마을을 관통해 끝까지 갔습니다.
수사관: 또 총소리를 듣지 않았나요?
최 중위: 네, 마을 끝까지 간 뒤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콩 볶는 듯한 소리였어요. 기분이 좀 안 좋았습니다.
수사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최 중위: 글쎄요. 저희 소대 다음에 2소대, 그다음에 3소대가 있었는데 뒤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최 중위는 눈을 감고 그날을 떠올려보았다. 마을에서 만난 베트남 사람들의 형상이 머릿속 검은 스크린 위에 떴다. 위에 흰옷을 걸치고, 좀 짧은 듯한 까만 바지에 삿갓을 쓴 키 작은 농촌 사람들. 한국의 농촌마을 풍경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그날 자신을 포함한 1소대원들은 무엇을 했던가. “라이 라이.” 그랬다. “라이 라이”라고 열심히 외치며 베트남인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한국 군인들이 가장 잘하는 베트남어였다. ‘다 나오라’는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정확한 어법은 아니었다. ‘라이라이’는 중국어였다. 베트남어에도 ‘라이’가 ‘오라’는 뜻으로 쓰이긴 했지만, 베트남인들의 귀엔 좀 어색하게 들렸다. 한데 왜 굳이 집에서 다 나오라고 했을까. 수색이었다.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집을 뒤져 젊은 남자를 찾으려고 했다. 만약 집에 젊은 남자가 있다면 그는 용의자로 몰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 위험성을 알기에 베트남 민가의 청년들은 한국군이 작전하는 지역에서 미리 피했다. 그날도 그랬다. 노인과 여자, 아이들뿐이었다. 1소대가 뒤로 보낸 마을 주민들은 2소대를 거쳐 뒤따라오는 3소대 쪽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한곳에 모였다.
“주민 향해 발포했나요?” “…”수사관: 마을 사람들이 저항하지는 않았나요?
최 중위: 노인과 여성, 꼬마들뿐이었는데 무슨 힘이 있겠어요. 무기도 찾지 못했어요.
수사관: 그럼 왜 총소리가 났나요?
최 중위: 1소대에서부터 마을 사람들을 뒤로 보내니까 뒤에선 다 모아놓았을 텐데, 병력이 이동하는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다가 불상사가 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수사관: 몇 소대에서 발포한 거죠?
최 중위: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소리만 들었으니까요.
조사는 점심시간에 잠시 쉰 뒤 오후에 계속 이어졌다. 수사관은 사건 당일 보고 겪은 일에 대해 꼬치꼬치 상세하게 물었다. 그날 조사를 받으러 온 해병제2여단 1중대 장교는 최 중위뿐이 아니었다. 1968년 2월12일, 최 중위와 함께 퐁니마을로 들어갔던 2소대장 이 중위(당시 경남 진해 해병학교 구대장)와 3소대장 김 중위(당시 포항 파월특수교육대 근무)도 그 시각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2소대장 이 중위의 조사실로 가보자.
수사관: 1소대에 이어 퐁니마을로 진입한 뒤 무엇을 했나요?
이 중위: 저는 마을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했어요. 우리 소대원들은 집을 뒤졌어요. 집에 있는 동굴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수사관: 동굴에 사람이 있었나요?
이 중위: 네, 수류탄 투척 뒤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줄줄이 나왔어요. 그래서 전부 뒤로 뺐습니다. 70~80명 정도 된 것으로 기억해요. 그러곤 앞으로 가는데 뒤에서 총소리가 났어요.
2소대장 이 중위는 “소대원들이 땅굴에 수류탄을 던졌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살육전이 어느 소대의 책임인지는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2소대원들에 의해 주민들이 피를 보기 시작했다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수류탄의 폭음과 일부 주민들의 피 흘리는 모습은 공포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리라.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했을 수도 있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가운데, 주민들은 한국 군인들이 집을 수색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을 해칠지 모른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1·2소대원들에 의해 집 밖으로 나와 3소대원들이 있는 쪽으로 가면서 주민들은 겁에 질렸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3소대장 김 중위.
수사관: 이 시체 사진 보입니까? 본 적 있어요?
김 중위: 네, 봤습니다. 1968년 2월12일 그 다음날인 13일 아침 1번국도를 정찰하는데, 주민들이 시체를 길거리에 늘어놓는 것을 봤어요. 그 사진 같은데요.
3소대장 김 중위의 말은 틀렸다. 그 사진은 다음날 찍은 것이 아니었다. 1968년 2월12일 오후, 1중대 1·2·3소대원들이 퐁니·퐁넛을 빠져나간 뒤 바로 마을에 진입한 미군들이 주검을 촬영했음을 한국군 장교가 알 리 없었다. 물론 김 중위가 의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1968년 2월13일 아침 퐁니·퐁넛촌 주민들이 인근 1번국도에 전날 한국군에 피살당한 주민들의 주검을 늘어놓았던 건 사실이다. 그때 1중대원들은 1번국도를 정찰하며 그 주검들을 목격했다. 목 없는 주검, 팔 없는 주검을 보면서 대원들은 소름이 끼쳤다. 김 중위는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올 것만 같아 사주를 경계하며 잔뜩 긴장의 날을 세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주검 사진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3소대장에게는 다음 질문이 핵심이었다.
수사관: 1·2소대장은 마을 주민들을 3소대 쪽으로 뺐다고 하는데 3소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죠?
김 중위: ….
수사관: 3소대에서 주민들을 향해 발포했나요?
김 중위: ….
강력한 의심 받은 3소대원들그날 3소대장 김 중위는 무어라 답했을까. 일부 마을 주민들이 군인들이 지시한 방향대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가자, 이를 도망이라고 여긴 일부 3소대원들이 총질을 시작해 사건이 벌어졌다고 했을까. 아니면 1소대원이 저격당했다는 소식에 흥분한 3소대의 한 분대 하사관이 주동이 돼 “다 죽여버리자”며 분대원들을 선동해 생긴 일이라고 말했을까. 아니면 “3소대는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했을까.
1·2소대장은 물론 1·2소대원들의 증언은 일치하는 편이었다. 수류탄 투척에 따른 부상자를 제외하고 1·2소대에서는 총기 발포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건 당일 1중대는 1소대-2소대-중대본부-3소대 순에 따라 일렬종대로 퐁니마을에 들어갔다. 중대본부엔 중대장과 전령을 포함해 함포와 항공 지원을 위한 미군 무전병 2명이 있었다. 2소대원들이 뒤쪽으로 안내한 주민들은 분명히 3소대 쪽으로 갔고 한곳에 모여 있었다. 한두 명을 향한 우발적 발포는 소대장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도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74명이라면, 그렇게 많은 수가 총에 맞고 쓰러지는데 소대장이 모를 수 있을까. 중대 안에서도 3소대원들이 가장 강력한 의심을 받았다.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3소대장 김 중위가 무어라 답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로부터 31년 뒤인 2000년 4월 어느 날 해병대에서 전역해 민간인이 된 김 중위는 이런 말을 했다. “앞에서 총소리가 들렸고 부락이 불타는 게 보였다.” “서너 구의 시체와 댓 명의 부상자들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을 지나쳐갔던 게 생각날 뿐이다.” 그리고 또 13년이 흐른 2013년 10월엔 이렇게 증언했다. “앞 소대에서 일어났지, 우리 3소대는 아무 상관 없다. 행군을 하면 1소대만 100m 길이다. 2소대도 그 정도 된다. 우린 뒤에서 쫓아가는데, 중대본부가 바로 앞에 있는데 쏠 수가 있는가. 아, 뭐 총이야 지나가는 개새끼한테 쏠 수도 있고 허공에다 쏠 수도 있고.”
다시 1969년 11월의 중앙정보부. 각자 다른 방에서 조사를 받던 최 중위, 이 중위, 김 중위는 화장실 앞에서 조우한다. 세 명의 장교들 외에도 사건 당시 중대장이던 김 대위가 와 있었다. 김 대위는 이 사건 직후 바로 본국으로 돌아왔다. 장교들의 통상적인 파병 기간은 1년이었다. 1967년 11월20일 베트남에 온 김 대위는 이와는 달리 3개월13일간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1968년 3월2일 귀국했다. 김 대위 역시 중앙정보부에서 무엇이라 증언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는 2000년 4월 이런 말을 남겼다. “산개해서 전투하기 때문에 ‘인디비주얼 액션’(개인행동)밖에 안 된다. 난 모르겠다.” 그는 베트남에서 돌아오고 얼마 있다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사건 직후 급거 귀국한 것은 김 대위뿐만이 아니었다. 해병제2여단장인 김연상 준장도 사건 이후 6개월이 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왔다. 둘의 귀국이 퐁니·퐁넛 사건에 대한 문책성 인사라는 명시적인 기록은 없다. “그럴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았을 뿐이다.
중앙정보부에선 장교들만 조사를 받은 게 아니다. 하사관은 물론 이미 전역한 병장도 있었다. 조사는 해가 지기 전에 끝났다. 서울 용산구 후암동에 있는 해병대사령부에서는 작은 버스를 보내 10여 명의 ‘옛 1중대 병력’을 해병대 사령부로 실어날랐다. 해산할 시간이 됐다. 최 중위는 이 중위와 김 중위에게 “야, 오랜만인데 저녁이나 먹자”고 제안했다. 몇몇 하사관도 합세했다. 그들은 명동의 번화가 식당을 찾아 소주를 곁들인 저녁 식사를 했다. 그들은 소주잔을 부딪치며 1968년 2월12일을 화제에 올렸을까.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하께서 진실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중앙정보부는 왜 갑자기 1968년 2월12일 퐁니·퐁넛에 진입했던 해병제2여단 1중대 장교와 사병들을, 1년9개월이 지난 시점에 불러모아 조사했을까. 이미 1968년 4월 해병제2여단 헌병대가 한 차례 관계자들을 불러 조사한 적 있는데 말이다. 최 중위는 수사관이 내뱉은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대통령 각하께서 진실을 알고 싶어 하십니다.” 대통령이 ‘특별히 지시한’ 특명조사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건의 진상이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왜?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의 대화는 소대장들의 기억과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했음을 밝힙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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