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1월부터 지금까지 디엔반 지역의 베트콩은 이곳 주민들로 하여금 한국군의 배치와 군사작전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도록 자극하고 선동해왔으며, 실제로 과거에 그러한 시위가 몇 차례 있었다.
베트콩은 또한 한국군이 무고한 시민의 재산을 파괴하기 위해 이곳에 왔고, 베트남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학대한다는 얘기들을 퍼뜨림으로써 베트남 사람들과 한국군 사이의 좋은 관계를 깨뜨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리고 민병대원들이 한국군에 협조하지 못하도록 민병대의 가족을 죽이고 종종 한국군 해병대의 위장용 군복을 입고 그 책임을 한국군에 돌리는 일도 저질렀다. 이 진술은 남베트남군 호앙쯔엉 소령, 디엔반 현장, 합동작전소대의 블롱 병장, 호이안 첩보부대에서 제공된 정보들에 의한 것이다. (중략) 또한 이 사건과 관련해 다른 사람들이 진술한 시간대도 한국군 중대장이 말한 것과 거의 두 시간 차이가 난다.
위에 언급된 정보, 진술, 상황적 증거를 대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한국군이 퐁넛 마을을 떠난 뒤 이 지역 베트콩들이 책임을 한국군에 돌리고 이를 주월한국군에 반대하는 악선전으로 이용하기 위해 퐁니와 퐁넛 마을에서 한국군 위장용 군복을 입고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font size="3">“지침에 따라 조서를 받아와라.” </font>1968년 5월에 내리쬐는 베트남 중부지방의 땡볕은 죽을 맛이었다. 호이안에 주둔 중인 해병제2여단 헌병대 수사계장 성백우(31) 중사는 사무실에서 얼굴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조사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보고서는 석 달 전인 2월12일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촌에서 발생한 한국군의 잔혹행위 의혹 사건의 조사 결과를 담고 있었다. 해병제2여단 헌병대가 작성한 것으로, 상부 보고를 앞둔 상태였다. 헌병대장 박영길 소령의 지시에 따라 성 중사도 그 과정에 참여했다. 박영길 소령은 한 달 전 그를 조용히 불러 “상부에서 진상조사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눈치를 보아하니 상황이 간단치 않아 보였다. 먼저 작성된 미군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날 한국군이 퐁니와 퐁넛촌을 거쳐간 뒤 60여 명의 민간인이 주검으로 발견됐다. 미군은 마을 사건 현장에 들어가 부상자 응급조처를 했다. 살아남은 마을 주민들은 꽝남성청에 가해 군인들을 처벌해달라는 진정을 했다.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가 개입돼 있어 스리슬쩍 넘어가기 곤란했다. 채명신(42) 주월한국군사령관은 해병제2여단본부에 조사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웨스트몰랜드(54) 주월미군사령관이 정식으로 어떻게 조처할지 묻는 서신을 보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헌병대 성 중사의 출장조사로 이어졌다.
여단본부 헌병대에 남아 있는 수사요원은 성 중사와 또 다른 부사관 둘뿐이었다. 본래 6명이었지만 4명은 대대 파견 중이었다. 헌병대의 두 수사요원은 2월12일 퐁니·퐁넛촌에서 작전을 편 1대대 1중대 장교와 사병들을 찾아다니며 보름 남짓 조사활동을 벌였다. 2중대장 이상우 중위를 비롯한 중대원들의 진술을 받았고 조서를 작성했다. 이미 귀국해 있던 1대대장 홍성환 중령과 1중대장 김석현 대위까지 베트남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2월12일 몇 시에 어디서 어떻게 작전을 했는지 물었다. 민간인을 향해 총기를 발포한 사실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중대원 대부분은 “총기 발포 사실이 없고 그런 일이 있었다면 베트콩의 짓이 틀림없다”고 답했다. 그는 조서 내용을 작성하고 그들에게 보여준 뒤 지장까지 찍게 했다. 그 결과를 압축한 것이 바로 지금 읽고 있는 보고서였다. 조사 결론은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과 같았다. “이 지역 베트콩들이 책임을 한국군에 돌리고 이를 주월한국군에 반대하는 악선전으로 이용하기 위해 퐁니와 퐁넛마을에서 한국군 위장용 군복을 입고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여겨진다.”
성백우 중사는 서글펐다. 자신이 작성에 참여한 조사보고서가 진정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진실을 밝히는 조사는 무리였다. 박영길 소령은 조사를 지시하며 이렇게 덧붙였던 것이다. “지침에 따라 조서를 받아와라.” 그 지침은, 헌병대에 불려온 1중대원들의 증언과 일치했다. “우리는 절대 양민을 학살한 일 없다. 한국군 위장복으로 변장한 베트콩들의 소행이다.” 일종의 짜맞추기 조사였다. 그것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시나리오였는지는 성 중사도 몰랐다.
<font size="3">상상으로 짜맞춘 논리적 결론 </font>“친애하는 웨스트몰랜드 장군.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촌에서 일어난 유감스러운 사건과 관련하여 제네바협약 위반 의혹이 제기된 것을 알리는 귀하의 1968년 4월29일자 편지를 잘 받아보았습니다.
귀하께서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한국군이 베트남에 첫발을 들인 이래 우리는 상호 신뢰와 존경에 기반하여 베트남의 벗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베트남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것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본관은 또 100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베트남 양민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오늘날까지, 본관은 이런 지시와 훈령이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의 모든 장병들에 의해 절대적으로 준수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관은 이 사건이 진실로 충격적이라고 생각하며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본관은 즉각 이 사건이 일어난 지역을 관할하는 해병제2여단장에게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는 한편, 본관의 참모들에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하고 광범위한 조사를 행하여 진짜로 일어난 일을 밝혀내고 증거를 수집할 것과 수집된 증거들의 가치를 분석하고, 증거들의 법률적 함의를 분석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를 위해 1968년 6월1일 완성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68년 2월12일 해병제2여단 1중대가 퐁넛마을 인근에서 소탕작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밝혀진 증거와 사실들은 한국군이 퐁니마을에 들어갔다는 주장과 모순될 뿐 아니라 이와 정반대입니다. 소탕작전에 참여한 해병 중대는 퐁넛마을을 11시30분에 떠나 북서쪽으로 향하였습니다. 13시에 중대는 계획된 이동로에 따라 퐁니마을과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지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또한 디엔반현 담당 (남베트남군) 쯔엉 지휘관과 CAP D-2 소속 블롱 병장은 베트콩들이 이 지역에 자주 출몰했고, 한국 해병들이 입는 제복과 비슷한 위장용 군복을 입고 다닌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국군, 미군, 베트남군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기 위한 베트콩들의 필사적인 노력과 연결지어볼 때, 대량학살은 음모이며 공산주의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일으킨 것이라는 논리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단지 위장용 군복만 보고 한국군이 이 사건에 연루됐다고 보는 것은 적이 짜놓은 사악한 음모에 걸려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결론을 내리자면, 한국군은 제네바협정을 위반하는 어떠한 사건에도 결코 관여하지 않았음이 명백합니다. 마지막으로, 내게 시의적절한 정보를 제공해준 당신의 친절에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1968년 6월4일
주월한국군사령관, 육군 중장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은 사인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지를 검토했다. 웨스트몰랜드 장군의 편지를 받고 나서 36일 만에 보내는 답신이었다. 해병제2여단 헌병대 성백우 중사가 작성에 참여한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만든 편지 문안이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국군의 조처를 묻는 웨스트몰랜드 장군의 편지를 받았을 때의 막막했던 심정으로부터 이제야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퐁니에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됐는지도 납득이 갔다. 채명신 사령관은 한국군복으로 변장한 베트콩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것이야말로 게릴라전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그는 묘한 향수에 빠져들었다. 한국군사령관이 되어 마주하고 있는 베트남전쟁과 영관급 장교로 참전했던 한국전쟁이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가 되어 만났다. 한국군복을 입은 베트콩의 이미지 위로, 인민군복을 입은 자신의 이미지가 포개졌다.
<font size="3">게릴라전·위장술, 어떤 운명</font>‘중령 채명신’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하순 병사 300여 명을 이끌고 산악지역인 강원도 영월 쪽으로 침투했다. 나중에 ‘백골병단’으로 확대·개편되는 ‘유격결사 11연대’였다. 그들은 모두 인민군 복장을 하고 소련제 아카보 소총을 들었으며 이북 화폐를 소지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한 1951년 1·4 후퇴 뒤 적 후방에서 중공군과 인민군을 교란하라는 임무를 띤 대규모 정규 게릴라 병력이었다. 채명신은 그들의 사령관이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직후 21연대 1대대장으로 평안남도 덕천까지 올라갔다가 중공군의 개입 이후 포로로 잡힐 위기를 넘기고 필사적으로 남하에 성공하고서도 그는 게릴라 병력 지휘를 자청해 다시 북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인민군 중령 계급장을 단 채명신은 1m 이상 쌓이는 눈과 영하 20℃의 추위와 싸우며 오대산 위쪽 동부 산악지역을 ‘뻔뻔스럽게’ 다녔다. 인민군 부대를 만나면 “동무들 어디 가는가?”라고 먼저 선수를 쳤다.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나 1947년 2월 기독교 탄압을 피해 탈출하기까지 20여 년을 북한에서 보냈기에 말투도 어색하지 않았다. “중앙당에서 나왔다”는 자신만만한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인민군들은 경례까지 붙이며 예의를 갖추다 무장해제를 당하기 일쑤였다. 2군단장에게 가는 극비 문서를 휴대한 69여단사령부 연락군관단과 조우해 그들의 옷을 빼앗아 입고 2군단 사령부로 가 초소병력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대남 유격부대 총사령관 김원팔 생포는 가장 빛나는 성과였다. 이렇게 적으로 위장한 경험은 이전에도 있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10월, 25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태백산 공비를 토벌하던 시절 ‘대위 채명신’은 게릴라 복장으로 변장한 채 분대병력을 이끌고 경북 영덕읍 인근 민가에 들어가 게릴라 협력자들을 색출했던 것이다.
게릴라전은 그에게 어떤 운명이었다. 1948년 3월 제5기 국방경비대 사관학교(육사 전신)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해 처음 부임한 곳이 제주도의 9연대였다. 그가 제주에 첫발을 내디딘 날은 4·3 사건의 첫 총성이 울린 지 3일 뒤인 1948년 4월6일. ‘소위 채명신’ 밑으로는 주로 제주도 출신으로 구성된 소대원 42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부하인지 적인지조차 미스터리했다. 피격 위기를 수차례 넘겼다. 섬뜩하고 오싹한 게릴라전의 비정함을 그는 종교의 힘으로 이겨냈다.
대한민국에서 게릴라전을 가장 잘 아는 그가 게릴라들과 상대해야 하는 주월한국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전쟁 영웅으로서 그의 전투 지휘 능력을 잘 알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강릉 9사단 참모장으로 있던 1951년 4월, 백골병단 유격대 사령관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3개월 만에 생환한 채명신 중령을 격려하며 그의 피 묻은 잠바를 자신의 야전잠바와 바꿔 입기도 했다.
채명신 사령관은 명장으로 통했다. 적을 떨게 하는 맹장이자 지장이며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덕장이라는 평가가 늘 함께했다. 1961년 5·16 혁명에 가담했으되 정치적 감투를 거절하고 오로지 야전만을 고집해온 군인이었다. 훗날 유신을 반대하는 등 대통령 앞에서도 바른말을 망설이지 않은 꼿꼿장수였다. 그렇다 해도 거짓이 사실을 대체할 수는 없었다. 웨스트몰랜드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힌 ‘베트콩의 소행 운운’ 하는 내용은 한국군의 바람을 반영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었다. 베트콩들은 한국전쟁 때 인민군복으로 위장하고 남북한의 산악지대를 누빈 채명신의 부하들과 같지 않았다.
<font size="3">대민자원 힘쓰던 교회 목사와도 같던 이 </font>편지에 찍힌 발신일은 6월4일이었다. 임기가 5일도 채 남지 않은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이 그 편지를 읽을 가능성은 적었다. 채명신 사령관은 5월21일 주월한국군야전사령부가 있는 닌호아의 백마사단 연병장에서 미 육군참모총장직 수행을 위해 떠나는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의 환송식을 성대히 거행해주었다.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공산군과 벌인 모든 대규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채명신 사령관을 띄워주었다. 웨스트몰랜드 사령관은 5월29일엔 서울로 날아가 박정희 대통령도 만났다. 청와대 접견실에서 열린 만찬회 석상에서 그는 “주월한국군의 탁월한 전투 능력과 솜씨를 배우기 위해 미국 장교들을 파견한 일이 있다”고 밝히면서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이룩한 대민지원, 특히 농촌에 깊이 파고들어가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있는 것은 자유와 자결을 찾는 남베트남 국민에게 마치 교회의 목사와도 같은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라고 극찬했다. 바로 사이공으로 돌아온 그는, 6월9일 베트남을 출국해 미국으로 향했다.
채명신 사령관은 몰랐다. 웨스트몰랜드 사령관도 몰랐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와 조사보고서들이 한국과 미국의 주요 기관들 사이를 둥둥 떠다니다 1년 뒤 한국의 청와대를 위협할 줄은.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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