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박정희는 왜 특명을 내렸나

(26) 희생자 유가족 탄원서·티에우 월남 대통령의 방한 그리고 밀라이 사건…
퐁니·퐁넛 사건 대통령 특명수사의 뒷배경들
등록 2014-10-03 14:01 수정 2020-05-03 04:27
[1969년 2월, 탄원서]

수신: 사이공, 베트남공화국, 하원의장

주제: 1968년 2월12일 디엔반현 탄퐁 마을(퐁니·퐁넛) 주민들의 대량학살 손해에 대한 청구

“존경하는 하원의회 의장님

우리는 1968년 2월12일,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퐁넛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살해를 당한 35가구의 일가친척들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태어나 계속 살아왔습니다.

1968년 2월12일 아침 9시에, 그들은 가난하지만 열심히 일하는 농부였습니다. 현직 군인 또는 전몰군인들의 가족이었습니다. 할아버지·할머니와 젖을 떼지 않은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시민증을 가지고 베트남공화국 통제지역 아래서 평화롭게 살아왔습니다.

갑자기 디엔반현 인근에 주둔하던 한국군 부대가 우리 지역에서 작전을 수행했고, 사람들을 집에서 끌어내 총 쏴 죽이고 신체 일부를 토막 내는 등 야만적 행위를 벌였습니다. (중략) 우리는 위와 같은 일이 다른 이웃에게도 재현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우리 일가친척들이 학살당한 1주기가 다가오는 오늘, 우리는 그분들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아! 슬프도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4천 년의 문명을 지닌 67명의 베트남인들이 일개 곤충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불행한 희생자들에 대해 어떤 집단에서도 공식적인 애도를 표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요구를 국민에 대해 책임을 지는 기관인 하원의회의 존경하는 의장님께 전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장님께 한국군과 남베트남 정부가 다른 유사한 사건에서 적용했던 규칙에 따라 배상해주기를 정중하게 요구합니다.

1969년 2월”

“일개 곤충 취급을 받았습니다”
밀라이 사건을 최초로 특종 보도한 1969년 11월17일치  1면 기사(왼쪽). 최초 보도 땐 희생자 수를 567명으로 집계했다. 밀라이 사건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윌리엄 캘리 중위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시사주간지 . 퐁니·퐁넛은 해병 장교들 사이에서 ‘한국판 밀라이’로 불렸다. 고경태 제공

밀라이 사건을 최초로 특종 보도한 1969년 11월17일치 1면 기사(왼쪽). 최초 보도 땐 희생자 수를 567명으로 집계했다. 밀라이 사건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윌리엄 캘리 중위를 커버스토리로 다룬 시사주간지 . 퐁니·퐁넛은 해병 장교들 사이에서 ‘한국판 밀라이’로 불렸다. 고경태 제공

1969년 2월12일은 퐁니·퐁넛촌 사건 1주기를 맞는 날이었다. 희생된 35가구의 유가족들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해 사이공에 있는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하원의회 의장에게 보냈다. 20여 명이 이름을 적고 지장을 찍었다. 유가족들은 베트남인 67명(실제로는 74명- 필자)이 한국 군인들에게 곤충 취급을 당했노라며 분노하고 슬퍼했다. 기밀 해제된 미군 내부 자료에 첨부된 이 탄원서는 본래 베트남어로 작성됐지만, 미군 당국은 이를 영문으로도 번역했다. 탄원서 작성을 누가 주도했는지, 실제로 이 탄원서가 사이공(현 호찌민)의 하원의회 의장에게 전달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희생자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손해배상’의 범주가 어느 정도인지도 마찬가지다. 미군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해병제2여단 1대대 선임 참모는 1968년 2월12일 사건 직후 남베트남군 디엔반현 담당 지휘관 호앙쯔엉 소령을 불러 쌀 30자루를 제공했다(그러나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이에 관해 “구호물자의 전달과 퐁니 마을에서 발생한 사건을 연관시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어처구니없는 얘기”라고 일축한 바 있다).

1968년 2월12일 오전 퐁니·퐁넛촌에 최초로 진입한 1중대 1소대의 지휘관이던 최 중위는, 1년이 지난 1969년 2월 대한민국 포항에 있었다. 베트남 파병 기간은 통상 1년이었다. 그를 비롯한 1중대원 대부분이 한국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최 중위가 수송함을 타고 부산항으로 돌아온 날은 1968년 12월24일 성탄절 이브 저녁이었다. 부산은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그는 광복동에서 서점을 운영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택시를 잡아탔다. 서가를 정리하던 친구가 깜짝 놀라며 최 중위를 맞았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그의 전투복은 양 소매를 가위로 잘라내 하복이나 다름없었다. 열대지방에서 돌아온 해병 장교의 새까만 얼굴 속에서 눈 흰자위와 치아만이 하얗게 번뜩였다. 남포동 거리의 술집에서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막 고국에 도착한 해병의 무사생환을 축하하며 술을 따라주었다. 친구는 그런 최 중위를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귀국은 제대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베트남전 파병으로 인해 해병 장교가 태부족하다는 이유로, 해병대 사령부는 장교들의 복무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늘려놓았다. 1966년 3월 입대한 최 중위의 제대일은 1971년 3월이었다. 2년이나 남아 있었다. 그는 다음날 새벽 부산역으로 향했다. 군용열차를 타고 해병 포항상륙전기지 사령부로 가야 했다. 귀국신고를 하던 날, 상륙전기지 사령관은 최 중위가 베트남에 가기 전 사고를 치고 45일간 영창을 살았음을 알게 됐다. 1966년 8월7일 해병 간부후보생들의 김포비행학교 습격사건에 주동자로 연루됐기 때문이다(2013년 10월25일치 ‘질 수 없다 해병이니까’ 참조). 그것은 일종의 훈장이었다. 사령관은 “월남까지 다녀왔으니 좀 쉬라”고 말했다. 최 중위는 사령부 내 야전위생학교 부교장으로 발령이 났다. 조금은 한가로운 보직이었다. 1969년 2월에도 그는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별 의미 없어 보였던 티에우 대통령의 방한 [1969년 5월, 티에우]

티우 월남 대통령 착한(着韓): “‘구엔·반·티우’ 월남공화국 대통령 내외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의 초청으로 4일 동안 한국을 공식 방문하기 위해 ‘에어베트남’ 특별기편으로 27일 오후 3시 김포공항 착 내한했다.

‘고·딘·디엠’ 전 대통령에 이어 월남 대통령으로는 두 번째로 우리나라에 온 ‘티우’ 대통령은 이날 공항에 나온 박 대통령 내외를 비롯, 3부 요인과 외교사절의 영접을 받고 곧이어 공항 환영식에 참석, 21발의 예포가 울리는 가운데 3군 의장대를 사열했다.”

박 대통령 환영사: “한국과 월남은 다 같이 분단국으로서 공산침략자와 싸우는 자유수호의 반공국가인 점에서 각별한 교우의 나라이며 우리 한국군이 귀국에서 싸우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거듭되는 열전과 협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모색하는 새 국면에 들어선 귀국의 사태는 귀국민의 시련을 우리의 시련으로 느끼고 자유월남의 장래를 반공한국의 장래와 직결시켜 생각하는 우리 국민의 지대한 관심사다. 이런 시기는 어느 때보다 두 나라의 결속과 협력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고 같은 목표를 향한 공동 노력의 결의를 더욱 가다듬어야 할 때라고 믿는다.”( 1969년 5월27일치)

응웬반티에우(옛 표기: 구엔반티우) 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그는 1963년 11월11일 응오딘지엠(고딘디엠) 대통령을 살해하고 권력을 움켜쥔 군 쿠데타 주축세력의 한 사람이었다. 군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파워게임은 이후에도 치열했다. 자고 일어나면 또 쿠데타였다. 4년간의 암투 끝에 티에우는 승리의 꽃다발을 목에 걸었다. 그는 1967년 9월3일 민정이양을 위한 제헌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65년 6월 응웬까오끼 장군에게 2순위로 밀렸던 그였다. 응웬까오끼는 2인자인 부통령으로 밀려났다. 티에우는 1969년 5월27일 대통령 취임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3박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자유중국(대만)으로 향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월남에서의 평화 확보가 될 때까지 연합국의 군사적 노력과 외교적 노력의 병행 △연합군의 일방 철군과 연정 반대 △한-월 협력의 강화 등이 뼈대였다. 박정희와 티에우 간의 최대 화두는 ‘명예로운 종전’이었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미국 간의 평화협정이 진행 중이었다. 그럼에도 베트남 북부를 향한 미군의 폭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티에우 대통령이 방한할 즈음, 최 중위의 보직은 바뀌었다. 포항상륙전기지사령부 본부중대장 겸 경비중대장. 사단 내 교도소와 헌병대, PX까지 관할하는 힘센 자리였다. 원래 고참 대위가 맡아야 했으나, 역시 장교가 부족했다. 그는 임시대위 계급장을 달았다. 그에게 티에우의 방한이란 별 의미 없이 스쳐지나가는 사건에 불과한 듯했다.

밀라이 사건이 주는 뚜렷한 기시감[1969년 11월, 밀라이]

“미군부대가 작년 3월 말 월남 ‘쾅가이’성에서 일으킨 ‘송미’(일명 ‘미라이’) 촌민 학살사건은 차츰 윤곽을 드러내면서 미국 내외에 심각한 파문을 던져주고 있다. 이와 함께 미 국방성은 또 다른 학살사건이 지난여름 ‘동탑’촌 근처에서 발생했었다는 정보를 입수,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어 ‘미국의 양심’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자못 높다.

지난 17일 ‘뉴욕타임즈’지의 특종 보도로 세상에 터져나온 미군의 ‘송미’ 촌민 학살사건은 24일 미군 당국이 학살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윌리엄·캘리’ 중위(26)를 계획살인죄로 군재에 회부, 이 사건은 재판의 진행에 따라 그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캘리’ 중위에 대한 혐의 사실은 ‘1968년 3월16일 월남의 ‘송미’촌에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하여 적어도 1백9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1969년 11월29일치)

국내 언론도 ‘밀라이 사건’을 보도했다. 1969년 11월17일치 의 특종이었다. 이후 등의 잡지도 이 사건을 커버스토리로 다루었다. 충격적이었다. 1968년 3월16일,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쾅가이)성 선띤현 선미촌(당시 표기는 ‘송미’, 작전지도명 밀라이)에서 미군의 발포로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가 최소 347명, 최대 504명 살해되었다. 미 육군 제23사단 11연대 1대대 찰리 중대의 소행이었다. 악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인물은 찰리 중대 1소대장 윌리엄 캘리 중위다. 그는 마을 민간인들이 무기를 소지하기는커녕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는데도 움직이는 물체만 보면 무조건 총을 갈겼다. 소대원들이 이를 뒤따라 했다. 며칠 전 동료 5명이 부비트랩에 걸려 사망한 사건으로 부대원들이 적개심에 고취돼 있었다지만, 그것으로 합리화될 수준이 아니었다.

미 육군 제23사단은 이른바 ‘아메리칼 사단’으로 불렸다. 그들이 작전을 벌인 꽝응아이성 선미촌은 본래 한국군 해병제2여단이 추라이에 주둔하던 시절(1966년 8월~1967년 12월) 작전범위에 있던 곳이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66년 9월에서 1967년 9월까지 1년간 한국군 해병제2여단은 ‘밀라이’(선미촌)가 속한 선띤현의 푹빈촌, 지엔니엔촌 등 13개 지역에서 1천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 희생자를 냈다. 해병제2여단은 호이안으로 이동하면서 이 지역을 아메리칼 사단에 인계했고, 한국군으로부터의 참화를 운 좋게 피했던 밀라이는 결국 미군의 희생자가 되고 만 것이었다.

퐁니·퐁넛은 한국군 해병 장교들에게 다른 이름으로 곧잘 응용돼 호명되었다. ‘한국판 밀라이’ 또는 ‘제2의 밀라이’였다. 밀라이 사건의 전개 과정은 베트남을 다녀온 한국 군인들에게 기시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완전범죄’에 실패하고 발각되었다는 점에서 밀라이는 퐁니·퐁넛과 완전히 닮았다. 다른 점도 있었다. 밀라이에서의 발포는 현지에 도착한 첨병소대(1소대)에서부터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퐁니·퐁넛은 앞서 진입한 1·2소대를 지나 3소대에서 우발적으로 이뤄졌다는 강력한 의심을 받았다. 밀라이 사건의 윌리엄 캘리 중위가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사진이 국내 언론에 보도될 당시, 최 중위를 비롯해 퐁니·퐁넛촌에 진입했던 장교와 하사관, 사병들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일이 벌어졌다. 중앙정보부 수사관은 “대통령이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는 말을 흘렸다. 대통령 박정희는 밀라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의 닉슨 정부가 수세에 몰리는 것을 보고, 위기를 사전에 차단한다는 포석으로서 퐁니·퐁넛 사건을 조사했을까?

특명수사 이끈 건 그 무언가의 징후?

중앙정보부로 조사를 받으러 갈 즈음, 최 중위의 보직은 다시 바뀌었다. 본부중대장 겸 경비중대장을 그만두고 훈련교장관리대 사격장 보좌관으로 옮겼다. 중앙정보부에서 ‘대통령 특명수사’라는 말을 접한 최 중위는 뒤늦게 6개월 전 ‘티에우 방한’의 기억을 소환해냈다. 해병 장교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니는 어떤 풍문 때문이었다.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티에우 대통령이 퐁니·퐁넛 사건에 관해 비공식적으로 항의하고, 이것이 한-월 외교 쟁점으로 비화했다는 거였다. 밀라이 사건과 중앙정보부 조사 사이에서 그럴듯하게 아귀가 맞는 시나리오 같았다. 그렇다면 혹시 대통령 특명수사를 추동한 근원적인 힘은 1969년 2월 퐁니·퐁넛촌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베트남공화국 하원의회 의장에게 보낸 탄원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

퐁니·퐁넛촌 희생자 유가족들의 탄원서와 티에우 대통령의 방한, 그리고 밀라이 사건. 그 세 가지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굳이 특명수사까지 지시한 대통령 박정희는 그 무언가의 징후를 예감했을 가능성이 컸다. 한 달 뒤 그 무엇인가는 정말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으니까.

고경태 토요판 에디터 k21@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